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22일 집을 나서며
책을 읽을 시간이나 날라나?
미심쩍어하면서도 짐 속에 습관처럼 챙겨넣었다.
통영 한산도로 출발하면서 이왕지사 읽지않은 책중에서
토영이 배출한 문장가 박경리님의 유고시집을 챙겨넣었다.
떠난지 이튿날까지 책은 한 줄도 읽지 못하고...
제목만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눈도 어둡고 챙겨야할 돋보기도 짐이다.
읽을거리를 챙기는 습관도 이젠 놔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사흘 째 되던 날,
이 곳은
한산도하고도 작은 섬, 추봉도!
일행은 모두 낚시를 나가고
여름휴가 막바지 주말 바닷가는 쓸쓸하고도 고즈넉하다.
tv에선 올림픽의 꽃인 남자마라톤 마지막 중계로 적막을 깨트릴 뿐,
드문드문 삽화와 함께 있는 책을 집어든다.
나는....
방 깊숙히 쏟아지듯 디미는 햇빛을 피해
데구르르 굴러 벽에 가차이 붙어 누웠다.
유고시집, 고인의 딸이 마지막 어머니의 글을 정리한 책이다.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가면서 슬프고도 또 슬펐다>는 서두문에
내, 엄마인 것처럼 괜히 콧날이 시큰거리다가...
이런! 갑자기 난데없는
벌레가 바로 얼굴 옆 베륵박을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라서 책에서 눈을 떼니...
아니~~ 망막이 노화되어 생기는 그림자가 아닌가?
마치 벌레, 날파리 같은 게 슬슬 기어다니는 듯한.....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이 인다.
그래 이젠 책도 손에서 놔야 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언젠가 나도 떠날 때가 되어 마치 내가 내게 이르는 말처럼
행간의 언어들이 내 가슴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며 되살아난다.
내겐 함께 운동하고 산책하는 메이트가 있었는데
나이는 너댓살 더 많아 언니같기도 한 그녀는
늘 습관처럼, 입버릇처럼 그랬다.
<이젠 슬슬 삶을 정리해야 할 단계인가봐,
사진도 찍기싫고, 살림살이도 예쁜것에 시들하고
버려야 할 것만 보여....>
정리해야 할 삶의 일들이 자꾸만 떠 오른다는...
그 때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그녀가 아주
어른스럽고 한편으로는 멋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던 그녀는
지난 해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http://blog.daum.net/yojo-lady/1058627
미리 알았던 것일까?
갈 때를 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처럼 갑자기 발병해서 죽더라도
어느정도는 부끄럽지않게 살아야겠다.
제 자리를 치우고 간다는 거....
내가 잠시 앉았던,
소풍자리를 깨끗이 치우고 간다는 거...
문득 감정이 밀물처럼 몰려와서
방바닥에 엎디어 책을 읽다말고 마려운 오줌처럼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졌다.
외딴 민박집 방에 엎디어 모처럼 볼펜을 굴려 글을 긁적인다.
대문을 열면 바로 앞이 바다다.
투명하고도 잠잠한 리아스식해안의 바다가 강인 듯 싶은 곳!
그 맑고 투명한 물에 안긴듯한 민박집을 통채로 빌렸더니 주인은 며칠 어디로 가버렸다.
간간이 들려오는 갈매기의 호들갑스러운 울음소리만 없다면
여기가 깊은 산사인지 착각할 정도로 조용한 오전나절이다.
눈부시게 방안까지 침범하는 태양빛이지만
하나 무섭지도 않다. 벌써 가을 볕처럼 고슬고슬하니 상쾌하다.
<이야기가 고마 오데로 흘렀누~~>
책을 읽기전 책을 만지기 좋아하는 나는....
마치 장님처럼 책을 쓰다듬어 느낀다.
손으로 먼저 느끼고, 눈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느끼고,
그리고 표지 디자인과 종이질감과 때깔과 글꼴까지도...
그런 걸 눈여겨보는 버릇이 있다.
홍수처럼 마구 난무하는 인쇄물은 싫어도
언젠가는 나도 참한 내 책을 내겠다는 욕망일 것이다.
나, 어쩌자고....
버리고 무시해야 할 오욕칠정들,
비우고 또 비워내야만 할 것들.....
무소유가 즉 소유임을 깨달아야 할 한 갑자의 나이가 바로 코 앞인데,
박경리!
그녀의 글은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된 매끈한 농작물이 아니라
그냥 텃밭에서 생긴 그대로 툭툭 분질러서 따 온 호박이고, 상추고, 풋고추였다.
한산도 하고도 추봉도 민박집에 엎디어 누워 나는 제대로 된
글 쓸 종이가 없어 책 겉표지 안쪽에다 내 마음을 쓰노니~
어제는 바다에 지는 노을이 아름다웠고
오늘은 오전 풋풋한 태양빛에 가을 고추처럼 뒹굴거리며
굽굽했던 나를 말리노라~
햇살이여!
내 수피 골골이 쓸데없는 물기를 걷우어 가다오!!
제발!!
2008년 8월 24일
몽돌해수욕장의 돌멩이
그 날...나는 절반의 시집을 읽고 접어두었던 거....
부산으로 가서 하루를 더 쉬고 올라오는 상행선 기차안에서야 마저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박경리는 할머니였다.
언제나 텃밭에서 머물던 머리가 하얀, 글쓰는 후속들이 머물면
마치 혈육의 할미처럼 따뜻한 밥에 푸성귀, 된장으로 밥을 차려내던...문단의 할머니!!
책속의 그녀는 인테리신여성이었고.....
그녀가 진주여고시절...친구에게 건넸다는 만화같은 그림도,
서른 두 해의 멋진 아름다움도~~
담배를 손에 든.....흰고무신을 신은 그녀의 근영近影은 그런 모든 것 다 버리고...홀가분하게 훌훌 떠났을 것이다.
2008년 8월 26/이요조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일 잘하는 사내
박경리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저마다 맺힌 한이 있어 울었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
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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