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패산 헤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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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반에 김선생을 만나기로 했다. 나이먹으면 잠이 없어진다더니 약속시간을 일찍도 잡았다. 어제(6.8) 사패산 가자고 전화가 왔길래 시간 장소를 정하라 했더니 회룡역에서 9시반이란다. 전철갈아타는 시간이 좀 걸려서 약속시간에서 6분 늦었다. 김선생은 벌써 나와계신다.

화장실에 들러서 큰일을 보고 슈퍼에 가서 청하 한병을 샀다. 요즘 계속 그 모양이다. 속이 안좋다. 하루에도 몇차례 화장실신세다. 그래 소주를 끊었다. 이젠 소주한테 진다. 번번히 지는 것을 안진다고 빡빡 우겨봐야 나만 곤해지니 이젠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끊은지 벌써 한달이다.

김선생이 이런다.
< 아 지도를 가져온다하다가 깜빡 잊었지 뭐요. 안주는 챙겼는데... 요즘 이 모양이라니까...... >
사실은 나도 집에서 나와가지고 한 10분 후에 아차 했다. 나도 지도를 깜빡한 거다. 왜 그러는 거야... 나이도 어린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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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골 매표소를 통과했다. 등산객이 별로 없다. 부근에 구멍가게 한개하고 음식점 한개뿐이다. 김선생은 요즘 인절미를 등산점심으로 가지고 다니시는데, 오늘 인절미를 사지 못해서 여기 구멍가게에서 빵을 사려했지만, 빵도 없단다. 손님이 없으니 빵을 들였다가는 상해서 버리게 되는 모양이다.

하늘엔 고가도로가 높고 웅장하게 걸려있다. 등산로는 차가 다닐만큼 너르고 포장이 잘되어있다. <사패산 터널 신설반대> 플래카드도 보인다. 한 십년전인가 여기 왔댔는데, 그땐 아파트도 없었고 고가도로도 없었지...

코스를 어떻게 잡을 거냐고 물었다. 사패산에 올랐다가 송추계곡으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회룡으로 되돌아오든지 란다. 일단 정상에 올라가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숨차고 힘든다. 왜 그러지? 전엔 안그랬는데... 김선생은 저만큼 앞서서 잘도 간다. 작은 키에 깡마른 분인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차림새도 멋지다. 등산화에 긴양말, 니커보커바지, 등산복 상의에 망으로 된 조끼, 멋진 모자, 빨간 배낭을 메고 오른손목을 빨간 손수건으로 동였다.

나는 어떤가? 내 차림새엔 <등산용>인 것이 하나도 없다. 오늘따라 거치적거리는 게 싫어서 등산화를 신지 않고 그냥 운동화를 신었다. 바지는 그냥 작업복바지. 셔츠도 어제 입던 것. 모자도 어제 쓰던 것. 바지주머니 세간도 없앴다. 지갑도 놓고 오고 핸드폰도 배낭에 넣었다. 배낭은 어떤 구두가게가 폐점세일할 때 천원주고 산 거다. 양말도 보통 때 신던 것이다. 그런데 이놈이 자꾸 흘러내린다. 등산시작한지 20분도 못되어서 양말이 발바닥에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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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사입구를 지나서 석굴암에 이르렀다. 길은 거기까지 너른 포장도로다. 마땅치 않다. 절에 다니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산속에 그렇게 너른 포장도로를 내서 자동차소음과 매연으로 산을 오염하는 게 영 마땅치 않다. 득도를 원한다면 호젓한 오솔길을 지나고 계곡을 건너고 숨찬 비탈길을 오르는 것도 좋은 수행일 것인데...

석굴암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 순사를 피해 은신했던 곳이며, 선생의 필적이 돌에 새겨져 있다한다. 선생은 해방이후에도 이곳을 자주 찾았으며, 자필 명문을 조각하여 준공식을 하던 1949. 6. 26에 선생은 피살되었다. 아주 커다란 돌 두개가 기대어 서있다. 그게 암자 입구다. 거길 지나 조금 가면 석굴이 있다.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올라가서 석문을 지나 석굴에 들어갔다. 촛불이 켜져있고 위패가 모셔져있다. 합장을 하고 나오다가 석문을 당겨보니 움직인다. 신기하다. 옛날에는 돌쩌귀로 무엇을 썼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에도 쇠가 있었을 테니 쇠돌쩌귀를 썼을 게다. 쇠가 없었다면 청동을 쓰면 될게고... 정 없으면 박달나무로 하더라도 꽤 오래 쓸수 있을게다. 통짜배기 돌로 만든 문을 처음 본 터라, 내심 겁을 먹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신을 다시 신으려고 계단에 앉았는데, 아무래도 무슨 수를 내는게 좋을 것같다. 맨살이 운동화에 이칫거려서 오른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힌 거다. 옳지, 방법이 생각났어. 여기저기 살피다가 끈을 찾았다. 공사용 마대자루 아가리에 있는 끈이다. 김선생한테 라이터를 얻어서 끈을 두뼘쯤 잘라냈다. 끝을 녹여서 뾰족하게 만들고 그걸로 양말모가지께를 꿰었다. 그리고 신발뒤에 있는 고리에 묶었다. 이젠 됐다. 흘러내리지 않을게다.

난 꼭끼는 것이 싫어서 헐렁헐렁한 양말을 신는다. 사람은 발이 편해야 한다. 그래야 피도 잘 통하고 정신도 편안하다. 당뇨병있는 사람은 특히 발을 잘 모셔야 한다. 맨발이 제일 좋지만, 왜 그런지 맨발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들을 한다. 맨손은 괜찮고 맨발은 나쁘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어른들도 맨발로 잘 다녔다고 기억한다. 공연히 서양사람들 예법을 들여와서 그렇게 된 거 아닌가? 서양사람들은 양말은 물론이고 신발벗는 것도 싫어한다.

어쩔 수 없이 양말을 신어야 한다면 할 수 없지. 헐렁한 양말을 신어야지. 그런데 이렇게 오르막길에서는 문제란 말이야... 더 잘 흘러내리거든. 10년내에 헐렁하면서도 흘러내리지 않는 양말을 만들어 내겠다. 사실 아이디어는 대충 되어있다. 언제 돈을 들이느냐가 문제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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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대웅전 공사중인 석굴암을 아래에 두고 또 올라간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안개가 약간 있는 날씨다.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숨을 헥헥거리며 김선생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두달만에 하는 등산이라서 그런가? 요 며칠 잠을 적게 자서 그런가? 아니면 이제 진짜로 맛이 가는 중인가? 등줄기에 땀이 흘러서 팬티까지 흥건할 지경이다. 하여튼 회룡능선에 올랐다. 좀 더 가니 큰 바위가 나온다.

아아~~ 시원하다.
시원한 바람과 탁트인 시야와 널찍한 바위.
한동안 머리카락으로 가슴으로 바람을 흘리다가 끄응 주저앉았다.
허리띠를 풀려고 만지작 대다가 그만 끊어져 버렸다.
허리띠 장식 이빨이 허리띠를 물어끊어버렸다.
이런이런... 요즘 배가 나와서 좀 꽉 묶고 다녔더니 그랬나?
바지가 흘러내릴 테니 허리띠를 빼고 다닐 수도 없고...
할 수 없지... 띠를 더 잡아당겨서 맬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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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패산(賜牌山) 정상이다. 정상은 아주 너른 바위로 되어있고 남쪽으로 보이는 병풍같은 산들이 장관이다. 왼쪽으로부터 포대능선--자운봉--오봉능선--상장능선이 이어지고 그 뒤로 인수봉과 백운대는 보일듯말듯 하다.

사패산은 도봉산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산이다. 북한산 국립공원안에서 제일 사람의 때가 덜 묻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울창한 숲은 원시림에 가깝고 물가 큰 바위를 뒤덮은 두터운 이끼는 이곳이 얼마나 깨끗한 곳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단다. 얼마전까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었던 덕분이란다.

키가 작고 잎사귀가 무성한 소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허리를 곧추 세우면 머리가 소나무가지에 닿는다. 신문지를 깔고 먹을 것을 꺼낸다. 김선생에게 싸온밥을 반으로 잘라서 드렸다. 반찬은 간단하다. 깻잎장조림, 햄부침, 김치, 표고버섯기둥장조림, 계란 두알. 요즘 치과에 다니기 때문에 술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오늘 옅은안개가 좋고 시원한 바람이 좋으니, 청하 한잔 좋겠다.

허리띠를 풀어제끼고 다리는 편하게 주욱 뻗치고,
밥 한 젓가락 먹고, 반찬 하나 집어넣고, 청하 한모금 꿀꺽.

앞으로는 병풍같은 산봉우리와 능선,
바위 저 아래로 펼쳐진 푸르른 숲,
산 병풍 바로 위에는 뾰죽뾰죽한 소나무 잎새.

뒤에서는 경상도 사나이 몇이서 얘기판을 벌인다.
50대 후반인 듯하고 국민학교 동창들인가보다.
< 내가 ㅇㅇㅇ선생님을(미인처녀 선생님인듯) 엄청 좋아했다는 거 아니가? >
< 그 선생님, 글씨를 아주 잘 쓰셨지, 지금도 답장편지를 가지고 있지...>
얼마전에 명퇴를 한 모양이다.
< 빨리 시작해야 돼... 돈 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을 한다고 생각해야 돼... >
< 얼마전에 들은 얘긴데... 며느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아버지가 누군지 아나?
개인택시 운전사래. 술먹지 못하지, 서비스업이니까 친절하지, 그러니까 곱게 늙을 수 밖에.
나도 봐서 개인택시 해볼까 생각하고 있지...>

김선생은 한잠 주무시겠단다.
하긴 나이 60에 바삐 올라왔겠다, 술 한잔 걸쳤겠다, 곤하기도 하겠지.
난 그 30분 동안 다리를 제멋대로 뻗고 앉아서 건너편 산들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마를 소나무가지에 기대니까 훨씬 편하고 또 조금 졸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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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기로 했었지만 사실 마음은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송추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다. 지도를 안 가지고 왔으니 그냥 짐작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내려가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다. 그나마 조금 가니 길이 없어진다. 가파른 바위가 끝이다. 이렇게 세군데를 다녔지만 길은 없다. 바위보다는 땅이 안전할 것이어서 그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웬 낙엽이 이렇게 많은가. 미끄럽고 푹푹 빠진다. 낙엽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곳도 있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고, 나무는 빽빽하다. 모기도 있다. 그렇게 미끄러지고 헛발디디면서, 나무줄기에 의지하면서, 갈 방향을 가늠하면서, 엉금엉금 내려간다. 그러다 <숲속의 빈터>를 찾았다.

주위는 나무들이 들어찼는데, 거기는 비었다. 앉아서 잠시 쉬기로 한다. 이렇게 헤매는 건 불안하기도 하지만 재미도 있다.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정신이 집중된다. 잡생각이 안난다. 김선생도 나처럼 무엇을 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는 분이다. 그래서 같이 말하기가 좋다.

< 당신은 왜 좋은 길 놔두고 길이아닌 길로만 갈려구 그래? >
아이들과 함께 등산을 갈 때(10년쯤 전), 나는 길이 아닌 길로 가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그래야 더 재밌으니까) 그때마다 집사람이 내게 하던 말이다. 사실 그건 등산에만 국한되는 말은 아니다. 발명을 한다고 책을 쓴다고 이리저리 헤매기를 밥먹듯이 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난 한우물을 판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사람들이 <쓰잘데 없는 짓>을 한다고 했었지. 어쨌든, 오늘 이곳 사패산에서 다시 헤매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즐겁다.

한참을 헤매다가 오솔길을 발견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풀과 나무가지들이 오솔길을 침범했다. 손으로 머리로 이리저리 헤치며 내려간다. 한 시간이 걸려서 계곡에 도착했다.

계곡은 말라있었지만 가다보니 물이 조금씩 흐르는 곳이 있어서 거기 앉았다. 세수할 곳을 만들었다. 모래와 돌멩이를 퍼내고 물을 흘려내보내서 깨끗하게 한 다음, 출구를 막으면 된다. 세수를 하고 오이를 씹으면서 청하 남은 것을 마셨다. 아까 산에 오를 때부터 느끼던 것이지만, 나무가 상당히 울창하다. 이쪽 계곡쪽으로는 소나무는 거의 안보이고 거의 활엽수다. 참나무종류가 많다. 내려오면서는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렇게 울창한 숲속 오솔길을 호젓하게 걸으니 기분이 점점 더 좋아진다.

젊은 여자 둘하고 여자아이 하나 그리고 예쁘게 치장한 푸들강아지 한마리를 마주 쳤다. 좀 더 내려가니 넓은 계곡 가에 젊은 여자 둘이 누워있다. 푸들 강아지와 일행이란다. 10년전부터 여기에 다니는 친구를 따라왔단다. 물어보니 여긴 송추계곡이 아니란다. 계곡 양쪽이 물에 많이 소실되었다. 길도 가다가 끊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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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가 계곡바닥에서 아주 너른 바위를 만났다. 50평은 족히 되어보인다. 거기서 한참을 쉬었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바람소리다. 계곡에 있는 나무는 잠잠하고 조용한데 저 산위에 나무들은 푸르르 떨고 솨아 소리를 낸다. 내 뒤 어느 풀끝이 하얀고깔인가 했더니 너풀너풀 계곡을 건너서 수풀로 사라진다. 내가 나비를 본게 언제였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계곡상류쪽으로 큰 상만한 바위가 있는데 그 뒤쪽위로 갑자기 콩새가 올라앉는다. 고개를 몇번 갸우뚱거리더니 계곡아래쪽으로 낮게 날아간다. 이상한 일이다. 여지껏 한시간을 내려와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우리를 마중하러 온 것인가? 그런데 한 5분 지났을까... 잠자리 한마리가 높이 날아서 계곡아래로 내려간다. 이게 무슨 조화람......

사패산을 즐거이 헤매었다. 하긴 이제껏 내 생활이 그러했다. 틀에 얽매이기 싫어하고 제멋대로 놀기를 좋아했다. 부모님말씀 선생님말씀을 잘듣는 모범생이지만, 속으로는 아주 못된 <꾸러기>가 들어있었나보다.
이젠 다시 중심을 잡아야하나 ? 너무 늦지 않았을까 ? 아니야... 그동안 한 실패가, 그 경험이 나를 도와줄거야. 나비도 콩새도 잠자리도 축하행진을 해주었지 않아?

이제 가자. 가다가 빈대떡하고 동동주 한사발 해야지...
가는 길에 벚나무에서 버찌를 좀 따먹었다.
그리고 한움큼은 비닐봉지에 담았다.
집사람 갖다주어야지...


작은큰통.200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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