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소리 들으며... 그대... 마음담아 보내주신 소식 고맙습니다. 성당에서 회의를 마치고 밤에 돌아와 차를 세우고 우리 작은 둥지로 들어 올 때, 귀뚜라미 한 마리의 맑은 소리가 제 마음의 귀를 노크하였어요. 장마 때 보다 더 궂게 오는 비때문인지 말복도 입추도 지난 시기이건만 별로 느끼지 못하던 가을이, 약한 안개비 속에서 들린 맑은 한 마리 귀뚜라미 소리에 밀물처럼 왈칵 내 마음에 와 닿았지요. 가을. 아! 가을인가...? 서녘에서 하늬바람 불어오면, 가을을 채촉하는 비구름도 걷히고 맑은 하늘, 맑은 별, 깨끗한 은하수, 쪽 빛 바다 펼쳐지겠지요. 서녘 하늬바람 더 불어오면, 푸른 잎은 울긋 불긋 단풍으로 물들고, 오곡 백과 여물어 무르익겠지요. 가을. 아! 진정 가을인가...? 어린 시절 고향 초가 지붕엔 여름부터 하얀 박꽃 피어, 박이 주렁 주렁 달렸었지요. 가을이 되어, 소슬한 가을 달밤에 핀 하이얀 박꽃은 어린 내 마음을 어이 그리도 시리게 하였던지요? 무서리 내려 박꽃은 지고, 그 잎새도 마르고, 덩굴도 시들 무렵이면, 우리 둥지에선 박을 따 톱질하여 바가지를 만들었지요. 어린 우리 동기 네 남매는 학교에서 배운 흥부전의 행운을 기대하며 아버지 하시는 톱질을 도왔었구요. 어머니는 설익은 박 속으로 박나물을 만들어 가을 밥상에 올리시면, 물컹하고 무덤덤한 맛에 맛 없다 투정하던 우리 네 동기들의 천진한 모습... 이런 것들이 이 밤 귀뚜라미 소리 들으니, 되살아난 그 옛날 가을의 한 풍경이었어요. 그대, 이 가을엔 마음 비우는 연습을 하고 싶군요. 외로움이 아닌 고독을 통해, '텅 빈 충만'을 맛보고 싶어요. 가을 하늘처럼 푸르게 시리고, 가을 은하수 별처럼 맑고, 앙상한 가지에 소슬 바람부는 늦가을 황혼처럼 아름다운 '텅 빈 충만!'.... 이 가을은 그런 가을이고 싶어요. 하여,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가을엔 고독하게 하소서! 이 가을엔 비우게 하소서! 내 마음 모두 비워 그 누구, 그 무엇이건 담을 수 있는 '텅 빈 충만'을 누리게 하소서! 그대... 제가 무척 욕심장이이지요? 그래요. 욕심장이 랍니다. "사랑하는 이여 ~ 영원의 향기는 고난중에 발산된다는 사실을 묵상해봅시다 " 하신 말씀처럼 이 가을엔 고독한 비움의 고난 길을 걸어 가을 향기, '텅 빈 충만'의 향기, 영원으로 이어지는 향기를 내고 싶어요. 건강한 가운데 사업 번창하시고, 기쁜 나날 되소서! 안녕! 보니 드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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