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오후 느즈막히 짬을 내어
유리벽으로 꽉 막힌...바람의 숨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12층 병동을 단숨에 내려가서는 병원 로비를 지나 육중한 자동문이 너무도 가볍게 열리는
현관을 빠져 나와 건널목을 건너서는 인동넝쿨 우거진 동산 모롱이를 돌아서....
바람에 낙엽이 이리 저리 뒹굴어 다니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병원 담밖으로 난 작은 돌 층층계단을 밟고 바깥으로 통하는 세상으로 걸어 나갑니다.
은행잎이 노랗게 깔린 보도 블럭을 지나고....
비스듬한 산길같은 육교를(강아지풀과 달맞이꽃이 핀) 건너 작은 읍내 중심지 같은
도심지로 스적스적 걸어 들어갑니다.
약국을 지나고 식당을 지나고....포장마차 앞을 지나고..슈퍼앞..빵 가게앞,
한참을 인파 속으로 어우러지다 보면 내 못다한 이야기가 가득 담긴
기도문을 쓴 리포트같은 작은 디스켓을 들고 다시 윈도우로 불러 낼 인터넷 방을 찾아 기웃거리다
발견해둔 나의 밀실같은 피시방 3층 계단을 오릅니다.
잠 자지 않고 두둘겨 댄 내 기도같은 한숨들이 활자로 살아 꿈틀거릴
밀실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납니다
오늘은 이 곳까지 걷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재어보기로 했습니다.
정확히 12분...12층에서 빠져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12분이면 나는 숨 쉴 수 있는 산소를 얻습니다.
오가는 24분이 유일한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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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컴을 열자마자.
귀한 메일 한 통을 만났습니다.
미루나무에 그냥 묵묵히 멀리서 지켜만 봐주시던...
"청산에 살으리랏다" 란 닉을 가지신 목사님...
내일 대전에서 올라오시겠다고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제 딸 아이를 위해 친히 기도를 해 주시겠다는 눈물겹도록 감사한 말씀이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님의 입에서, 한나의 서원과
고백처럼 무슨 기도를 이끌어 내시려고 하시는 것은 아닐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내일 꼭 오시겠다는 일방적인 통보의 말씀에 전 만류도....
아무런..무엇의 몸짓도 할 수가 없습니다.
받아들일 수밖에요.
감사히 받아드릴 수 밖에요.
움씬을 할 수 없던 아이는 어제 부터 나오는 약에서...비닐 봉지에 빨간 글씨로
마약이라고 씌여진 진통제를 스스로 끊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전신을 꼼짝 할 수 없는 아이를 위해서..
욕창을 우려한 에어메트리스에...
일주일에 한 번..화요일,
기계로 머리를 샴푸해 줍니다.
아이는 제일 못 견뎌하는 게 일주일을 기다려야하는 머리감기입니다.
우울한 아이에게
오늘은 제가 직접 중간에, 한 번 더 감기는 서비스를 하겠다 했더니....
"감샵니다 감샵니다 어머니~"
하고 아이는 에미를 웃겼습니다.
침대 머리판을 떼내고....의자에 대야를 놓고 .식탁에. 새물을 가득 담은 대야 여러개를
준비해 두고....
머리를 감은 아이는 좀 나른한듯 혼곤히 잠들었습니다.
아이가 잠든 틈을 타..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마....
낙엽이 후두둑 흩 날리는 가을의 마지막 정취를 아이에게도 곧 나눠줄듯도 합니다.
이 모두가....
다 님들의 사랑의 격려가 보태져서....
못난 에미기 좀이나마 강인해지지 않았나..
그 공을 여러님들께.. 돌려드리고 싶은 밤입니다.
별은 별일 뿐이라지만..
아름다운 나의 별 하나.
나의 딸.
나의 소중한 별, 내 딸 아이의 건각을 지키기위한.. 에미의 눈물...
참으로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게 잘 걷는 젊은이들이 부럽습니다.
낙엽 뒹구는 거리를 연인과 둘이 다정스레 팔짱을 끼고 걷는 젊은이들을 돌아보고
또..돌아보고......자꾸만 보고..
정상인과 같이 잘 걷게 될...
기적의 의술과...
밝은 딸 아이의 얼굴과..
그리고 주님의 은총과....
이 죄많은 에미의 회개와...
희망사항이..
현실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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