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의 계절 -
동학사의 계곡 물소리는 벌써 차가운 안개를 뿌리며 중중거리고 흘러간다. 울긋불긋 곱던 단풍잎도 거의 지고 동학사로 들어가는 산길은 적막하기만 하다.
나는 누구를 찾아가는지 조차 모른 채, 힘없는 발길을 옮겨갔다. 스물 셋의 팔팔한 청춘이련만, 최근 1년여 동안 너무 많은 방황으로 기진해 있었는지 모른다.
학교를 다니다가 군에 지원 입영하였으나 훈련소에서 신검 불합격 판정을 받고 귀향하였다. 사실 나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 입대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 당장 갈곳이 마땅치 않았다. 시골 친척집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추수 일을 거들고 약간의 여비를 얻어 이렇게 방랑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45킬로를 겨우 넘는 깡마른 체격에 의기 또한 소침해 있으니 그 초라한 모습을 어디에 비할까 ? 조정에서 추방당한 뒤 할 일없이 전원을 방황하던 중국 전국시대 굴원의 초췌한 행색에는 그래도 고결한 풍이 서려 있을법하고, 문전축객을 당하던 김삿갓에게는 시와 해학이 있지 않았나 ?
숲에서 울려나오는 목탁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작고 퇴락한 동학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6·25 때 불타고 남은 건물은 옛 명성에 미치지 못하였다. 한 때는 길재, 김시습 같은 명인들이 머물며 고려유신과 사육신등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도하던 명찰이 아니었던가.
절 마당에 여승이 가끔 눈에 뜨일 뿐, 주변은 고요하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스님을 찾았다. 잠시 후 나를 맞은 사람은 칠순이 훨씬 넘은 듯한 노승이었다.
노승의 안내로 나는 툇마루에 좌정하고 경내를 둘러보면서 이마에 땀을 닦았다.
" 스님, 여기서 공부할 방 하나 얻어볼까 하고 왔는데요. 형편이 어떠신지요 ? "
노승은 내 표정을 여러 모로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 이 절에는 모두 여승들만 있어요. 사내라곤 나하고 나무하는 사람 단 둘이지. 여기는 젊은이들이 있을 데가 못돼요. 좋은 세상 놔두고 뭣하러 이런 데를 찾아와요 ? 사람 사는 데는 어디든 마찬가지랍니다. 절간에 들어온다고 별 다른 게 있나요 ?"
노승은 아마 내가 불도를 공부하러 절에 오려는 줄 알았나 보다. 나는 더 이상 사정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잠시 후 앳된 여승이 검정 칠을 한 작은 밥상을 들고 와서 살며시 놓고 합장을 한다.
" 손님, 편히 드세요. "
저런 고운 여인이 어쩌다가 중이 되었을까? 햇볕도 모르고 이 산중에 갇혀 젊음을 보내다니 ……, 저 여승은 오히려 지금 나를 부러워할는지도 모르지. 혼자 잠시 공상을 하다가 노승의 말에 놀랐다.
" 식기 전에 드시지요. "
보리가 섞인 밥에 산채 몇 가지였으나 따뜻한 김이 오르는 밥은 꿀맛이었다.
식후에 노승을 따라 절을 한 바퀴 돌았다. 여승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여승만 있는 동학사에서 노승은 불경을 가르치는 강사 일로 소일한다고 했다. 불경은 모두 한문으로 돼 있기 때문에 불경을 배우려면 먼저 유가의 사서삼경 같은 것을 배운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노승은 나에게 불경 이야기는 한 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자신도 어쩌다가 불문에 들어와 속절없이 늙었다는 회한 어린 얘기뿐이다.
나는 노승을 하직하고 중문을 나섰다. 나무하는 중년 남자가 골방 문지방에 걸터앉아 낫자루를 맞추고 있었다. 나는 후원 감나무 밑에 잠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것은 무얼까 ? 정신이냐 물질이냐 하는 원론적인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드디어 만유는 물질에서 비롯한다는 결론을 다지고 있었다. 도를 닦는다며 10년이나 산촌에 칩거하시던 아버지는 뒤늦은 후회를 안고 다시 서울로 가셨다. 지금 얼마나 뼈아픈 시간을 보내고 계실까 ?
서늘한 늦가을의 산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진다. 감나무에서 물은 홍시가 바위에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지금은 비록 어둡고 괴로운 길을 걷고 있지만, 세월이 가면 나에게도 꽃피는 봄날이 찾아오겠지 ! 흥진비래요 고진감래라 하지 않았던가 ?"
골짜기엔 벌써 계룡산 그늘이 길게 덮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절에서 내려와 다시 무작정 걸었다. 공주군 반포면 어디쯤이었을까 ? 들에는 볏가리가 무리 지어 늦가을의 풍요를 연출하였다. 붉은 노을이 서녘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초가 지붕에는 저녁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저물기 전에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낯 선 집 사립문안으로 들어가서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 미안하지만, 저기 저 집으로 가 보셔유. 이장님 댁 이니께유. " 이장 댁 사랑방엔 석유 남포등이 무척 밝게 빛났다. 한 눈에 부농 티가 났다. 낯선 나그네를 아무 거리낌 없이 들이고 저녁 대접까지 하던 그 농부의 인정이 지금도 그립다.
다음날 아침, 외로운 가을 나그네는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채, 마을을 떠나 유성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몇 해 지나서 동학사의 노승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노승이 길에서 주어다 키운 양녀가 27년 만에 동학사 승방을 뛰쳐나가는 바람에 노승이 크게 실망했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하룻밤을 묵었던 이장댁, 저녁 노을이 빨갛게 불타던 그 마을을 나는 지금 다시 찾아가 보고 싶다. * -바람과달
동학사의 계곡 물소리는 벌써 차가운 안개를 뿌리며 중중거리고 흘러간다. 울긋불긋 곱던 단풍잎도 거의 지고 동학사로 들어가는 산길은 적막하기만 하다.
나는 누구를 찾아가는지 조차 모른 채, 힘없는 발길을 옮겨갔다. 스물 셋의 팔팔한 청춘이련만, 최근 1년여 동안 너무 많은 방황으로 기진해 있었는지 모른다.
학교를 다니다가 군에 지원 입영하였으나 훈련소에서 신검 불합격 판정을 받고 귀향하였다. 사실 나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 입대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 당장 갈곳이 마땅치 않았다. 시골 친척집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추수 일을 거들고 약간의 여비를 얻어 이렇게 방랑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45킬로를 겨우 넘는 깡마른 체격에 의기 또한 소침해 있으니 그 초라한 모습을 어디에 비할까 ? 조정에서 추방당한 뒤 할 일없이 전원을 방황하던 중국 전국시대 굴원의 초췌한 행색에는 그래도 고결한 풍이 서려 있을법하고, 문전축객을 당하던 김삿갓에게는 시와 해학이 있지 않았나 ?
숲에서 울려나오는 목탁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작고 퇴락한 동학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6·25 때 불타고 남은 건물은 옛 명성에 미치지 못하였다. 한 때는 길재, 김시습 같은 명인들이 머물며 고려유신과 사육신등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도하던 명찰이 아니었던가.
절 마당에 여승이 가끔 눈에 뜨일 뿐, 주변은 고요하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스님을 찾았다. 잠시 후 나를 맞은 사람은 칠순이 훨씬 넘은 듯한 노승이었다.
노승의 안내로 나는 툇마루에 좌정하고 경내를 둘러보면서 이마에 땀을 닦았다.
" 스님, 여기서 공부할 방 하나 얻어볼까 하고 왔는데요. 형편이 어떠신지요 ? "
노승은 내 표정을 여러 모로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 이 절에는 모두 여승들만 있어요. 사내라곤 나하고 나무하는 사람 단 둘이지. 여기는 젊은이들이 있을 데가 못돼요. 좋은 세상 놔두고 뭣하러 이런 데를 찾아와요 ? 사람 사는 데는 어디든 마찬가지랍니다. 절간에 들어온다고 별 다른 게 있나요 ?"
노승은 아마 내가 불도를 공부하러 절에 오려는 줄 알았나 보다. 나는 더 이상 사정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잠시 후 앳된 여승이 검정 칠을 한 작은 밥상을 들고 와서 살며시 놓고 합장을 한다.
" 손님, 편히 드세요. "
저런 고운 여인이 어쩌다가 중이 되었을까? 햇볕도 모르고 이 산중에 갇혀 젊음을 보내다니 ……, 저 여승은 오히려 지금 나를 부러워할는지도 모르지. 혼자 잠시 공상을 하다가 노승의 말에 놀랐다.
" 식기 전에 드시지요. "
보리가 섞인 밥에 산채 몇 가지였으나 따뜻한 김이 오르는 밥은 꿀맛이었다.
식후에 노승을 따라 절을 한 바퀴 돌았다. 여승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여승만 있는 동학사에서 노승은 불경을 가르치는 강사 일로 소일한다고 했다. 불경은 모두 한문으로 돼 있기 때문에 불경을 배우려면 먼저 유가의 사서삼경 같은 것을 배운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노승은 나에게 불경 이야기는 한 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자신도 어쩌다가 불문에 들어와 속절없이 늙었다는 회한 어린 얘기뿐이다.
나는 노승을 하직하고 중문을 나섰다. 나무하는 중년 남자가 골방 문지방에 걸터앉아 낫자루를 맞추고 있었다. 나는 후원 감나무 밑에 잠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것은 무얼까 ? 정신이냐 물질이냐 하는 원론적인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드디어 만유는 물질에서 비롯한다는 결론을 다지고 있었다. 도를 닦는다며 10년이나 산촌에 칩거하시던 아버지는 뒤늦은 후회를 안고 다시 서울로 가셨다. 지금 얼마나 뼈아픈 시간을 보내고 계실까 ?
서늘한 늦가을의 산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진다. 감나무에서 물은 홍시가 바위에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지금은 비록 어둡고 괴로운 길을 걷고 있지만, 세월이 가면 나에게도 꽃피는 봄날이 찾아오겠지 ! 흥진비래요 고진감래라 하지 않았던가 ?"
골짜기엔 벌써 계룡산 그늘이 길게 덮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절에서 내려와 다시 무작정 걸었다. 공주군 반포면 어디쯤이었을까 ? 들에는 볏가리가 무리 지어 늦가을의 풍요를 연출하였다. 붉은 노을이 서녘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초가 지붕에는 저녁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저물기 전에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낯 선 집 사립문안으로 들어가서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 미안하지만, 저기 저 집으로 가 보셔유. 이장님 댁 이니께유. " 이장 댁 사랑방엔 석유 남포등이 무척 밝게 빛났다. 한 눈에 부농 티가 났다. 낯선 나그네를 아무 거리낌 없이 들이고 저녁 대접까지 하던 그 농부의 인정이 지금도 그립다.
다음날 아침, 외로운 가을 나그네는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채, 마을을 떠나 유성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몇 해 지나서 동학사의 노승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노승이 길에서 주어다 키운 양녀가 27년 만에 동학사 승방을 뛰쳐나가는 바람에 노승이 크게 실망했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하룻밤을 묵었던 이장댁, 저녁 노을이 빨갛게 불타던 그 마을을 나는 지금 다시 찾아가 보고 싶다. * -바람과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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