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저녁에도 마찬가지다.
가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사무실이나 집으로 가는 날도 있다.
서울특별시 외곽지대에 살다보니 커다란 대로보다는
중간정도 넓이의 도로를 건너는 일이 더 많다.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려 길을 건넌다.
아침에는 길을 건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거의 대부분의 날들이 나 혼자 건넌다.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는 길이기도 하려니와
사무실쪽은 직장들이 몰려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은 대부분은 물받이를 위해 가운데가 높고 가장자리가 낮다.
황단보도임을 표시하기 위한 흰색표지 페인트가 제법 두꺼워 길 가운데 서면 무대에 선 기분이 든다.

관객은 차안의 운전자들이다.
신호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본다.
의미가 있던 없던 본다.
볼 것이 없으면 맞은편 사람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여 고개를 돌리거나 당황하여 어찌할바를 모르기도 한다.


사람도 없는 횡단보도를 혼자서 걷는 기분은 무대에 올라 관객을 웃겨야하는 개그맨이 된 기분이다.
옷을 돋보이게 해야 하는 모델이 된 기분이다.
몇십년동안 횡단보도를 건넜으면서도 언제나 긴장한다.
차안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유한마담으로 보일까
순진한 아줌마로 보일까
깍쟁이로 보일까
지적이고 우아한 센스있는 여자로 보일까
섹시한 여자로 보일까
새 핸드폰을 구입한 날은 핸드폰을 줄만 잡고 건넜다.
나도 컬러핸드폰임을 자랑하기 위해서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길을 다 건넜다.
무대에 섰다는 생각에 걸음걸이는 부자연스럽기 마련이다.
가뜩이나 엉성한 걸음걸이가 우스꽝스럽게 변한다.
왜 나는 날마다 무대에 서야하는 것일까.
무대에서 사는 사람들은 무대에 서지 않으면 병이 난다고 하던데 나는 아직도 어색한 것일까.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조연보다는 주연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무대에 혼자 서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싫던 좋던 인생이란 무대에서 나는 주인공이고 주연이다.
주인은 자기를 지켜키고 가꾸어야 할 의무가 있다.
주연은 드라마를 연극을 영화를 빛내야 할 의무가 있다.


주어진 의무를 다 하지 못하면 직무유기가 된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유기가 되는 것이다.
직무유기는 어떤 벌이 있더라

나는 내 인생의 무대에서 제작자이고 주연임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항상 변방에서 주위만 맴돌다가 인생의 삼분의 이를 살았다.
내 삶에 대한 직무유기를 한셈이다.


하루에 두 번씩 서는 무대에서조차 자신있게 걷지 못한다.
시선을 한 군데로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린다.
이제는 자신있게 살아야 하는 나이임에도
자신이 없어야 할 나이 때보다 더 자신이 없다.


8월 어느 날...잠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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