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시월의 마지막 밤을 지새우며,
* 깊은 가을 녘의 어떤 일출 *
여 행이란 어디를 그냥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 어디를 들러 봤다는 결과보다도 그 과정이 더
의미 있는 여행이고 싶다.
가서, 보고, 느끼고 향기마저 맡고 와야 비로소 여행다울 수 있는 그런 여행을 또 떠나고 싶다.
지난 여름휴가를 친정 식구들이랑 통영에서 보냈는데 이 해가 가기 전에 우연히 또 통영을 찾게
됐다. 이전에 충무로 불리다가 옛 이름 찾아 다시 통영으로 불린다고 한다.
10월 마지막 날, 사천 공항에 내렸다 마리나 리조트, 지난 여름은 그렇게나 무덥고, 어수선하고
부산했었는데---
지난 여름 그렇게나 유행한 '꿍따리샤바라'가 .휘황한 불빛과 함께 뒹굴던 시끌시끌한 소란은
쓰러지고 늦은 가을날 도착한 그 곳은 주말이 아니어서 인지 겨울 바다라서 그런지 그렇게 조용
할 수가 없다. 바다는 잔잔한 호수였다.
노산 이 은상의 내 고향 남쪽 바다가 절로 흥얼거려 졌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나르리 가고파라 가고파~ "
나는 방파제와 등대가 있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바다와 전혀 무관한 뭍 가운데 묻혀 살면서, 언뜻 바다 타령을 들은 남편은 그나마 그
배려를 자주 해주는 편이다.
마리나 리조트 앞 바다는 통영 만인지 한산만 인지 아무튼 한려해상국립공원이다.
11월1일
새 벽녘에 잠이 깬 나는 혼자서 바다를 몰래 훔쳐보기로 했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바다가 환히 보이는 창 앞에 커튼을 활짝 걷고 바다를 향해 마주 앉았다. ‘
동이 틀 때까지 지켜보리라’ ‘바다의 氣를 흠씬 받아 보리라.’ 다짐하면서,
1997년 11월 1일 새벽 5시.
칠 흑 같은 어둠뿐이다. 바다와 하늘 모두--- 잠결에도 간간이 들렸던 소리, 통통배 소리가 살그
머니 아련하게 들린다. 지금은 조용하다. 적막과 어두움뿐이다.
큰 창으로 보이는 하늘엔 별들이 초롱초롱하다. 리조트 야경, 가로등불에 저 아래 있는 선착장
으로 가는 철제 다린, 노란 페인트칠을 하고 마치 연극 무대에 설치된 소품처럼 아름다운 피사
체로 다가온다.
배우는 없다. 관객은 오로지 나, 하나. 적막 속에 묘한 분위기만 연출 할 뿐, 마주 보이는 섬마
다 몇 개씩 켜진 불빛들이 바다 위에 아주 길게 흔들리고 있다.
5시50분
새 벽 미명에 바다는 마치 고등어 등처럼 푸르스름한 빛으로다가 온다.
작은 통통배와 소리 없는 작은 배들이 좀 부산해졌다. 시커먼 섬마다 열매처럼 매달고 있던 불빛
들이 바다 위에 흔들리던 빛 줄기를 슬금슬금 그물로 걷어올리고 있었다. 섬들이 어둠에 포개져선
그냥 하나로 보인다.
섬, 섬들은 불그레한 조명을 등뒤로 받으며 아직 잠이 덜 깬 채 미명 속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붉은 기운이 점점 뻗어 나가는가 싶더니 하늘 위쪽으로 점차 푸르스름한 빛을 띄우기 시작하는 신
새벽이다. 막 새날이 밝는 중이다. 배가 지나간 자리엔 자국이 길게 남는 게 보인다.
마치 제트기가 지나간 창공에 생기는 흰 줄 띠구름처럼---- 배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발자국 같은
긴 자국 자국들--- 맨 앞의 섬, 옆 그 중간 섬, 또 그 뒤섬의 포개진 실루엣이 낱낱이 드러나는
걸 보니 날은 꽤나 밝았나 보다.
6시25분
제 일 먼저 잠에서 깬 부지런한 갈매기 한 마리가 높이 날아 올랐다가 곤두박질 치며 자맥질한다.
곧 이어 또 한 마리 뒤 이어 두 마리------ 이제 정말 아침이 열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선 통통배 소리가 조심조심, 가만가만 들려 왔는데--- 이젠 제법 통통배다운
씩씩한 소리를 내는 건 마음의 귀 탓인가? 통! 통! 통! 통! 마음놓고 편안하게 소리를 잘도 낸다.
맞은편 섬 마을의 밝디 밝은 불빛이 제 빛을 잃어 버렸다. 조용하던 바다가 기지개를 켜며 잠에
서 지금 깨어나고 있다.
6시30분
제 법 큰 어선 세 척이 어디에서 나타나 위풍도 당당하게 저 너머 큰 바다를 향해 돌진한다.
누가, 바다 한 가운데서 부르는 것일까? 배란 배는 모두모두 어린 아이들 학교엘 가듯 올망졸망
달려나간다.
6시45분
아 니다. 벌써 부지런한 배는 되돌아오는 것도 보인다. 어림잡아 틀림없이 만선이리라.
바다가 아니라 영락없는 호수라는 생각이 또 든다. 붉은 여명도 어느새 걷히고 그냥 날이 싱겁게
밝아 버렸다. 그런데 도대체 해는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서 뜨는 걸까?
6시50분
내 가 앉아 있는 맞은편에 있는 섬 그림자가 드디어 동이 터 오는 징조를 알리는 불그레한 빛,
빛이 아니라, 정말이지 이건 일출 하는 진통의 붉은 이슬이 어리어 오나 보다.
산, 뒤편의 붉은 스포트라이트가 점점 붉게 밝아온다 드디어---
6시55분
섬, 산 능선 모습이 흡사 사람의
누워있는 얼굴의 프로필 같은 실루엣으로 떠오르면서
정작 산은 더 검게 어두워
온다. 사람의 옆모습을 한 산은 그 입에서 마치 용이 여의주를 뱉어내듯 구슬을 뱉어냈다.
오! 붉고 빛난 큰 구슬! 눈 깜짝할 사이의 신비다. 일출이다. 서서히 가 아니라 뱉어내듯
일순간이다.
아! 눈부심! 정녕 새 날이 밝고야 말았다.
7시00분
둥 근 해가 11월의 첫 날 아침에도 온전히 떠올랐다.
해가 떠오르자 바다는 길을 열었다. 바다에 길게 새로 난 황금 빛 실크 로드----
태양하고 곧장 곧은길을 틔어 놓았다. 이렇듯 매일의 일출이 진통처럼 떠오르는데,
나는 하루를 그저 건성으로 넘긴 나날이 얼마나 숱했던가?
10시00분
실 크로드의 폭이 점점 드넓어지며 금빛에서 은빛으로 탈바꿈했다.
붉디붉은 태양은 이제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 부셔지며 허물을 벗어 던졌다.
12시00분
해 는 중천에 떠오르고 바다 물결 하나하나 마다 은빛 날개를 죄다 달아 주었다.
바다가 온통 미루나무 잎사귀처럼 반짝인다.
13시00분
삼 각 모양을 한 쪼그만 물결들이 은빛 고깔 모자를 쓴 것 같다.
온통 신비롭게 반짝이는 바다로 변했다. 또 하루의 바다는 일제히 일어나고 숱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들만큼이나 반짝거릴 것이다.
나 는 아주 슬픈 역사적인 해를 보고 만 것이었다.
그 당시 미국 리버사이드에 있는 침례대학에 있는 딸에게 늘 돈을 부치곤 하였는데..
며칠 늦었다. 10월 25일 경 부쳐져야 하는데...(당시 환율 780~90)
통영 여행 다녀와서 부치지 뭐 하였더니
이날 오후 딸아이 전화로 "엄마...여기 신문에는 환율이 1200까지도 오를 거래요"
"뭐라고?"
이 말을 시작으로 IMF! 그 것은 예고성에 불과했다,
우리 모두에게 잔인한 97년 11월의 해는 이렇게 떠올랐던 것이다.
97년 11월 1일 잔인한 해돋이를 맞으며
글/이요조
music:bbsUpFiles/물에 비친 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