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한 기다림, 어쩌면 불안이었을 그런 과민함이 선연하게 밝아오는 아침의 빛 속에서 나를
주저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누운 채로 창문이 빛을 바라보았다. 마당으로부터 유리창을
넘어 오는 형수의 과장된 흥분과 단절된 마디마디의 외침이 눈부신 빛의 입자처럼 선명하게
나의 주저함 위로 쏟아져 내렸다."
(1988년 어느 신문 신춘문예 당선 소설 첫머리란다)

난 이런 문장을 보면 마음이 괜히 불안하다.
공을 들여 쓴 글임에 틀림없는 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글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기록방법인 글과 창작도구인 글이라.
만약 글이 없었다면 윗글과 같은 창작물은 나올 수 없었을 터.
글이 아닌 말로 한다면,
"아침에 게으름 피우면서 누워있었는데 마당에서 형수가 외치더군." 하는 정도일 게다.

난 발명과 창작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윗글을 쓴 이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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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음이 약간 들뜬다. 정신이 한 곳으로 집중되면서도 좀 들뜬다.
"구상은 이미 다 해놨는데...... 왜 이리 질정이 안되지? 하긴...... 글의 첫머리란 건 항상 어려운 법이니까...."

그는 창조하는 사람이다.
그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만드는 것이 굉장한 것이다'하는 마음과,
'실패해도 다시 할 수 있다'는 마음이 필요하고,
그런 마음이 일도록 하는 화학물질을
끊임없이 스스로 공급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창조를 할 수 있다.
"무조건 멋진 글을 지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다.

그에게 기세가 충천해서
어떨 때는 세상이 돈짝만하게 보일 때도 있지.
그래 글짓는 건 재미있는 일이지.

그런데.............

"왜 문장이 자꾸 길어질까?"
"그건 그만큼 내 글에 내용이 많다는 뜻이지."

"왜 어려운 말이 자꾸 나올까?"
"그건 내 글이 의미심장한 것이어서 쉬운 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지."

"왜 한 얘기를 또하고 또하고 그러지?"
"그야 중요한 내용이니까 강조하느라 그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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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는 재미있다.
그렇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상한 나라'로 가게 되는 수도 있다.
'알맹이도 없이 껍데기에 치중하는 나라' ---- 그런 이상한 나라로 가게 된다.

별 내용도 없으면서, 이런 치장 저런 기교로, 길게 엮어놓은 문장,
괜히 어려운 단어를 갖다붙이고 어렵게 글을 써서 읽어도 모를 정도인 문장,
술취한 사람처럼 한 얘기를 자꾸 반복하는 글,

그렇게 글을 써 놓고도,
그걸 보고 스스로 감탄하고 으스댈 정도라면
'이상한 나라'에 깊숙하게 들어온 것이다.

그런 골치아픈 글보다는
현실 삶에서 우러난
그냥 수다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듣기 좋으냐!



문화가산책 2003/01/01 작가:작은큰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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