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나는 공주처럼 살고 싶었다.
헨델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와 빵과 사탕으로 지은 집.
연분홍 얇은 레이스 커튼을 달아 리본으로 살짝 묶은 창이 있고
창가엔 치르치르와 미찌르의 파랑새가 새장 문을 제 맘대로 여닫으며 드나드는 집.
소공녀처럼 어느 날 아침 눈 뜨면, 난데없는 근사한 선물에 둘러싸여 흥분도 하고
사랑하는 가엾은 친구에게 아낌없이 가진 것들을 나눠주며 함께 즐거워하는 공상에도 잠겼엇다.
소공녀의 환상은 언제나 신비한 베일처럼
내 유년의 삶들을 늘 고운 빛깔로 물들여주고 포장해주는 마력을 지닌 채
내게 힘을 주고 꿈을 잃지 않도록 해 주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어려운 일들이 많았건만
어떤 경우라도 남을 원망하는 독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끊임없이 내 귓가에 들려오던 소공녀 세라의 속삭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제 세월이 흘러
어릴 적과는 또 다른 한 가지 소망이 돋아난다.
나는 野하게 살고 싶다.
산과 들판과 바다를 무시로 누비며 자연의 사랑스런 일부가 되어 살던
어린 시절의 때 묻지 않은 그 세계로 되돌아가고 싶다.
고무신에 진흙이 엉겨 붙어도 좋다.
하교 길에 빗물 불어난 도랑을 못 건너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마중 나온 오라비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던 그 때가 눈물겹도록 그립다.
옆집 누런 장닭이 시퍼런 꼬리를 곧추세우고 달려들면 소리조차 못 내고 자지러지던 그 시절
뒤뚱거리는 장닭의
깃발처럼 펄럭이던 그 찬란한 빛깔의
위세 당당한 꼬리 깃털이 다시 보고 싶다.
맨 발로 밟던 텃밭 흙의 촉촉하고 가슬가슬 부드럽던 감촉이 그립다.
푸성귀에 이슬젖어 기어 다니던 커다란 달팽이의 얇은 껍질을 잡을 때 손끝에 느껴지던 감촉과
행여 쥐면 깨어질세라 조심스럽던 기억이 새롭다.
누렁이를 데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침마다 오르던 앞동산이 그립다.
이제 정말 맘 놓고 야하게 살아보고 싶다.
마당 전에 채마밭이 딸린 집에서
흙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난 헛간에 호미랑 삽이랑 들여 두고
처마 밑엔 시래기두름도 주렁주렁 걸어두면 좋겠다.
마당이 햇살세수를 할 때까지 곤히 잠든 초가지붕위로
밤새 반짝이는 별빛이 마음껏 쏟아져 내리도록 두리라.
청솔가지를 태워 밥을 지으면 솔 향이 온 집에 가득하고
굴뚝으로 모락모락 푸른 연기가 오르는 집에서
수탉이 목청을 돋우어 소리 지를 때 눈뜨고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모을 때면 나도 일손을 거두리라.
봄이면 하얀꽃향기 진동하도록 찔레 울타리를 둘러야지,
한 켠에 감나무를 심고 아침마다 까치가 짓는 소리를 들을거야.
심심할라치면 바닷가에 나가 지천에 널린 굴을 따서
입가에 굴 딱지가 허옇게 앉도록 그 짭조름한 맛을 즐기리라.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통통하게 살이 여문 새우도 건져 보리라.
향내 나는 스킨로션도 썬 크림도 모자도 필요치 않은 야한 여자가 되어
눈썹 위에 손을 얹고 넘어가는 저녁 해와 노을도 맘껏 바라보리라.
한 벌 구두를 안 방 시렁 위에 얹어두고
아주 가끔씩 손질을 하리라.
몸뻬바지, 월남치마로 들과 산을 누비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은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정성껏 바르고 반듯한 양복도 걸쳐보며
하늘 아래 땅 위에
누구 앞에서도 꺼릴 것 없는 편안한 자연이 되어지고 싶다.
-하닷사-
(2003.1.2. 하닷사님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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