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좀 이른 결혼을 했다.
결혼이 급했던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고
결혼 다음 해 부터 연년생으로 두 아이를 낳고 키우다 한숨 돌리게 되던 어느날,
갑자기 공부가 더 하고 싶다는 너무도 강한 욕망에 시달리기 시작했구
해야겠다는 목표가 정해지면 그것이 무엇이던 지체할 수 없는 성격때문에
큰아이가 다섯살, 작은아이 네살 되던 해 나는 대학원이라는 곳에 등록을 했다.

그때 남편은 고등학교 평교사였고 남편의 월급만으로 내 학비 부담까지는
좀 벅찬 생활이기에 당연히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음대 지망생 몇명을 개인지도 하면서 호텔 커피숖과 고급 레스토랑에
재즈 피아니스트로 일을 했었던 것.

30대 초반의 아이 둘을 가진 유부녀였으나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이 아무런 의심없이
나를 20대 후반쯤의 처녀로 믿어주게 했던 것같다.

물론 남편은 아직까지도 그 시절 내가 그런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단지 학생들의 개인지도만을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이 사실은 아마 죽을 때 쯤 털어 놓을까? 말까??^^)

어쨌건 그렇게 1년반 정도를 지내면서 그곳 종사자들이
슬그머니 내게 붙여준 별명이 하나 있었다.

여자 종업원들이야 자연스레 언니, 언니, 하면서 호칭에 별 무리가 없었지만
남자 웨이터들에게는 호칭이 좀 애매했던 모양이었다.
나이들이 거의 스물두 셋, 많아야 스물다섯 정도이니 당연히 내가 연배였고
그렇다고 누나라고 부르기는 어색하고 미스 아무개라는 호칭으로는
내 분위기라 아니라고 했다.(무슨 분위기를 말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아마 미스라는 호칭이 직업 여성들에게 쓰이는 호칭쯤으로 해석되어서가 아닌가 싶었다)
선생님은 너무 거리감이 있고..... 어쩌구 쑥덕거리기에
"그냥 할매라고 불러라" 한마디 했더니 슬그머니 그게 별명이 되어버렸고
별명이 호칭처럼 되어 버렸었다.

격일로 저녁 7시30분부터 30분 간격으로 두 타임,
그러니까 중간에 30분 쉬는 시간이 있었고 내게는 쉬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첫 타임 연주 끝내고 방으로 들어오면 테이블 위에는 언제나 약간의 간식거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때로 몇 통씩의 팬레터가 있을 때도 있었다.
고백컨데 데이트 신청도 부지기수였고......^^

'데이트도 안하고 시집은 언제 가요? ' 라는 질문을 그 얼마나 많이 받았었던가..
그리고 유혹들은 또 얼마나 많았었는지.........ㅎㅎㅎ

연탄불이 꺼지지나 않았을까 불안해 하면서 내일 아침 식단을 걱정해야하는,
아이가 둘이나 있는 유부녀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
마치는 시간이 무섭게 '땡'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가 그들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사람들 눈에는 대단히 단정한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불우한 환경속에서 정말 불우하게 생활하던 그 사람들의 눈에
자신들과는 전혀 별개의 세상에 살고 있을거라는 작은 환상을 갖게 해 주면서
그러나 정말은 전혀 별거 아니던 나는 할매라는 호칭에 애정을 담아 불러주던
그 마음들이 어쩌다 가끔은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렇게 가을이 깊어가는 그런 날...........
지금은 그들도 중년의 나이로 아름다운 삶을 꾸리고 있을거라 생각하면서....

혹시 계십니까??

1980년대 초,
최상급으로 꼽히던 부산 대아호텔 커피숖에서 피아노 치던 그 여인을 알고 계시는 분??

그게 바로 저 였답니다... ^___^


2003.11.4. sesil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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