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화첩기행' -藝의 길을 가다-를 읽고,
*금강산도 느끼고 최북도 만나보고.....
이 요조
책을 읽다말고 나는 가슴이 뜨뜻해져 왔다. 책을 덮어버리고 나는 한참을 속울음으로 울었다.
北은 나와 아무런 정말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 이다.
더구나 금강산도 아직 한 번 다녀오질 못 했다.
남의 일인 것처럼 無心하게 살고 있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글 한 구절이 일순 내 가슴에 슬쩍 와 닿더니…….알지 못할 슬픔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것일까 책을 덮고도 한동안 그 어떤 슬픔에…….
시야가 뿌우옇게....초점이 잡혀 오질 않다가 내 마음 내가 달랠 요량으로, 뭔지 모를 썰물이 밀려나가듯 쏴한-마음의 갯가에서 조가비를 줍듯 그렇게 글을 주워 담는다.
그의(김병종) 글과 그림으로 옷 입혀진 화첩기행을 읽으며,"그의 눈부신 감성은 놀라운 招魂의 능력을 지키고 있다"는 書評의 글이나..(나는 병실에서 이 글을 쓰며…….쓰다가 말다가 끊기다가..글의 맥락이...감정이... 잘 이어지질 않는다.
책을 읽고 난 직후의 느낌, 넘쳐나는 감정의 흐름을 다 담아내지 못하고 그냥 흘려 보내버리는 이 아쉬움~~)금강산!
그 금강산에 대한 글을 단 몇 줄의 표현으로도....그는 오랜 세월, 단절된 더케의 아픔을 내게 단 몇줄의 글로 무겁도록 안겨주었다.
난, 최남단에서 전쟁이 터지던 그 해. 무더위가 시작된 그 달에 태어났어도...
北과의 피비린내 나는 처절했던 전쟁의 상흔에 대한.....그 무감각의 무딤과..
작금에 희미해진 이데 오르기의 상실시대에 살아오면서...쓸데없이 보낸 우리 조국의 억울한 그 세월의 허망한 이념껍데기를 본다.
김병종님의 "화첩기행을 읽으며....藝를 다루는 사람들의 기인성과 천재성을 접한다.
광기는 때로 예술가의 힘이라 했던가?
광기와 천재성이 실로 함께 반뜩이는 예인들...조선조 회가 최북, 이름을 破字 (北-七七)하여 칠칠이-칠뜨기라 자칭한 그의 기인성,
금강산 구룡연에서 몸을 날렸으나....
살아남았던 그,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지만 최북은 자기의 눈을 찔렀다 한다.
화가에게 눈은 바로 생명이다.
그림을 그려주지 않는 최북을 위협하는 권세를 부리는 이에게 차라리 내 눈을 내가 찌르고 말리라며, 한 쪽 눈을 찔러 실명케 된 최북...그는 그림도 그리지 않고 60이후를 빈궁하게 살다가 만취한 채 길거리에서 동사한 불운한 화가였다. 毫生館(호생관) 최북(崔北)의 '풍운야귀도上' 와 '공산무인도下' 스스로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호생관이란 호를 지은 것을 보면 낭만적 기질보다는 자조적 기질이 많았던 최북,
그 최북이 젊어서는 저자거리에서 그림을 파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하며 신광수는 다음과 같은 싯구를 남기고 있다.
"장안에서 그림을 파는 칠칠이를 보소.....문을 닫고 하루종일 산수화를 그려대네.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을 먹고,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을 얻어먹네....."
또 신광하 같은 문인은 '칠칠이의 그림은 싸다"라고 할 정도니 당시의 최북 그림은 예술성을 높게 인정받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기에 남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초절한 작품도 상당히 있다.
천성이 오만하고 수 많은 기행을 일삼었던 그도 그림만은 반대로 얌전한 작품이 많아 의아스럽기 까지 하다.
공산무인도...폭포와 마주하고 있는 정자"빈산에 사람이 없으나,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라는 왕유의 詩에서 따온 화제가 맵시 있는 반행(半行)의 흘림체로 씌어있어 그 내용과 함께 일종의 선미까지 느끼게 해준다.
공허한 산속의 정취, 왼쪽의 풍부한 농묵과는 반대로 정자 옆에는 마른나무를 그리고 기이한 물안개까지 피어오르고...
이같이 호쾌한 기상이며,"기이하면서로 예스럽다"는 찬사에 남김없이 값하는 명품이다.
(참고도서; 학고재 간, 이태호 유홍준 편저, 조선후기의 그림과 글씨 중에서)
숨겨진 예인들의 많은 이야기들을 새삼 다시 들으며, 그 분들이(우리 선조들의 藝人) 나, 즉 내 마음 안으로 접목되어지는 듯.....한결 가까워져 옴을 느낀다.
"문학과 미술의 용호상박이란다.그의 손길이 닿으면..모든 것이..."모든 무명의 기인들이 그의 손 끝에서 영혼이 다시 살아 일어 설 것만 같은, 그래 바로 그 것이었다.
김병종(현 서울대 미대 교수) 바로 그가 기인이었음에...나는 그의 그림에 글에 매료되었다.* 금강산의 예인들* 에서그는 금강산을 뒤로 두고 떠나면서..이렇게 서술하고 있었다.
"금강산을 뒤로 두고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화구를 챙기는데 붓이 울고 있었다. 내 귀엔 그렇게 들려왔다.
불현듯 만물상을, 옥류동을 다시 보고 다시 그리고 싶었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피부에 불이 붙듯 그 감정은 절실해진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평생 그리던 여인을 만나자말자 다시 헤어져야하는 것처럼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묶으려던 붓을 다시 풀자 그것은 싱싱한 성욕처럼 일어서며 나를 부르르 떨게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난 그의 감정이 나에게로 전이되어 옴을 느꼈다.
오죽 그리고 싶었음에...오죽하였으면... 다시 금강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여기 그의 책에서...갑자기 내 마음을 뜨끈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의 글, 단 몇 줄이나마 책의 행간에서 옮겨 들고 나왔다.
"엊그제 꿈에는 비로봉을 보았다. 잘생긴 산이다. 꿈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잘생긴 산이야, 산이 생기려면 저 정도는 돼야지 면서 눈을 떴다.
서둘러 서재에 들어가 내가 그려온 <금강화첩>을 펼쳐보았건만 꿈에 본 그 산이 아니었다. 둔하고 못난 손. 이렇지가 않았어. 나는 애꿎은 손에만 짜증을 내었다.
폐일언하고, 나는 요새 '금강산 정(情)떼기'에 골몰하고 있다.
사람들이 물으면 무슨 억하심정 가진 사람처럼 이렇게 말한다.
"금강산 그거 갈 거 못돼요. 요사한 계집처럼 사람을 마구 홀리더라니까.
하마터면 화가 최북이도 거기서 죽을 뻔했잖소,...아무튼 쌍녀러산이야."
용서하시라. 민족의 성산(聖山)을 두고 마구 비속어를 쓴 나를. 그러나 금강산 유람 동안 버스의 옆자리에 동승했던 한 노인도 나처럼 그렇게 말했다.
버스가 온정리의 한 마을 가까이로 둥글게 돌아갈 때 말없이 앉아 있던 노인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저기야. 저 산등성이 넘어 학교를 다니곤 했어. 알겠어? 저기라고, 저 고개말이야. 우리집이 바로 저 고개너머야."노인은 숫제 내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차가 그곳을 멀리 벗어났을 때에야 노인은 털썩 앉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거지같애. 별것 아니면서...50년이나 못 오게 하고...환장할 세월을 살았는데...거지같애."
나는 노인의 마른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못 본 척 했다.
말은 안해도, 바로 이 상처와 후유증이 무서워 차마 금강산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떠나온 그 세월이 너무 애달퍼 단 며칠 그 땅을 밟고 휭하니 되돌아올 수는 없는 것이겠기에, 그러기에 격한 마음 뜨거운 가슴 가진 사람들일수록 조심할 일이다.
금강산행을......(오늘 이 글을 병실에서 잠 오지 않는 밤에 단숨에 쓰곤 난 내일 후회할는지 모른다.
나의 글 솜씨에, 부끄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쑥스러운 못난이 글이 될지라도, 단 한 번의 추고를 거치지 못한 뒤죽박죽의 글일지라도. 솔직한 내 마음, 내 느낌을 고스란히 전하고자..)
최북의 공산무인도
- 디지털 카메라로 처음 찍은 책...유홍준의 화인열전 2 에서"여름날의 낚시"/최북( 유흥준의 "화인열전" 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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