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피카소-

 

 

피카소를 만나보기 위해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2006, 7월 14일)날씨는 매우 후텁지근했지만

미술관가는 길은 아직은 연초록빛 은행나무 그늘아래로 걷기엔 기분은 상큼했다.

오히려 에어컨 설치 잘 되어있는 미술관 관람은 한여름도 좋지 않을까 권유하며~~

 

서울 시립미술관으로 향하는 덕수궁 돌담길~

함께 가 보실까요?

전시장 내부 사진은 당연 찍을 수 없지만...

 

샤갈전에 가서 사람들에게 한 번 치인적이 있는지라 주말은 피하고 부러 주중을 선택해서 갔다.

태풍이 지나갔지만 폭우가 쏟아지던 화욜날(11일) 가면 무지 널널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대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바짓가랑이는 다 젖을 것만 같았고....을씨년스러워 참았던 게 금요일이 되었다.

 

 

 

가만....샤갈도....붉은 색이었나?

초록빛 거리에 붉은 걸이게 현수막,  피카소가 그 답게 꽤나 열정적으로 다가온다. 

 

 

미술관 입구

 

해 묵은 향나무의 인고의 몸짓도 예술?

 

내 느낌에는 너무 화려하지도 결코 넘치지도 않은 모던한 느낌의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서 부터 무척이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미술관 자체를 감상  둘러 보는 것도 ....좋지않을까...하는

 

 

 

매표소 입구, 예매가 아니면 주말엔 줄 깨나 설 성 부른....

 

빨강이다.

아마 그의 삶도 색채로 고르라면 빨강일 것 같다.

 

지난 번 샤갈전 기록을 뒤져 비교해 보니...화이트에 블루다.  하늘을 훨훨 날아 다니는 그의(샤갈)그림

불루가 아니고 그런 몽환적인 분위기를 끌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생각을...조금~

 

역시 피카소 그는 단연코 Red다.

 

 

금요일 점심시간을 막 지난 주중이라 한산한...

 

서양 갤러리문화는 편안한 의자가 많이 놓여져 있어서 편히 앉아서도 오래 감상할 수 있게끔 되어있다는 데 우리는 주말이면 완전 도때기 시장 모습이다.

큐레이터의 설명도 듣고 천천한 감상을 원한다면 주중을 필히 이용하시라 권하고 싶다(월욜은 휴관)

 

 

전시실 바깥 곳곳에 휴식의자는 그런대로 갖춰진 셈이다.

 

 

찍으면 안되지만 큐레이터를 쫓아 설명을 듣고자 몰려다니는 사람들 뒷 모습만 한 컷!

 

나는 어린 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피카소-

 

 

한때 친구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피카소의 암울한 청색시대를 주조했던

그의 친구 페르낭드 모습?인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휴게실 매점 창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미술관 입구

 

 

창에서 바라보이는 곳 북악산인가?

 

휴게실

 

휴게실 팥빙수와 쿠키~

 

3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shop~

 

 

휴게실에서 내려가는 나무계단

 

덕수궁 석조전이 마주 바라다 보인다.

 

미술관 매장답게 명화들로 만들어진 소품들~~

 

고흐와 크림트의 그림...모네의 수련등이 보인다.

실크 스카프가...8만여원, 넥타이가 6만여워~ 가량

 

 

그림 넥타이 청색계열 그림이 무난해 보인다. /내가 보기엔...역시 모네의 수련이 그 중 마음에 듬~ (右 3)

 

 

 

 

이전 글 (2)에서 부분 발췌문

 

*미술지에서 읽었던 내 기억 뒤집기+


많은 사람들은 예술은 몰라도 피카소는 다들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말하기를"눈이 튀어 나온다느니~""코가 납작해졌다....."
또는"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댔다""입이 얼었다"이런 왜곡된 언어들처럼...
왜곡되게 그려진바로 그점이 피카소의 그림의 키워드가 된다.
피카소는 살아생전 부와 명예와 사랑을 누린 아주 특별한 예술가였다.
여러 여자들과의 열렬한 사랑......아마 그는 틀림없이 대단한 열정가 였으리라...
그는 많은 여자들에게서 한결같은 사랑을 받았었고 그는 많은 여자들을 앎으로 해서 氣를 뺏기는 게 아니라 되려
영감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1973년에 91세로 사망했다.     200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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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년
폭염이 내리 쬐던 여름,
63빌딩 1층 전시관에서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의 대서사시”<게르니카>를 관람했다.
파블로 피카소는(1881-1973.스페인 출생 파리활동) 전쟁의 인간말살,파괴에 대해 1937년 캔버스에 유채, 세로 349 가로776센티의 거대한 그림을 그렸다.
인간파괴를 고발한 예술가의 양심으로----
광복기념 행사 일환으로 열린 이, 전시회를 관람하며 전쟁이 끝난 우리의 싯점에서 우린
<게르니카>의 비극에서 진정으로 해방 되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볼 문제였다.
전쟁이 발발 한지 어언 50년,
냉전은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로 돌아서고---
우린 20세기를 빛낸 천재화가 최고의 걸작인 <게르니카>를 만난다.
고국,스페인의 소도시<게르니카>가 파시스트로부터 무차별 폭격을 받은 기사를 읽은
피카소가 분노하여 수십 번의 밑그림(exquisse)을 통해 완성한 그림.
엄청난 충격과 사회적 이슈를 일으킨 에스키스42점과 그 작품을 대하며 그의 예술 세계를
한층 가까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는 생존 시,드물게도 가장 부요를 누리던 운 좋은 예술가 피카소!---
그의 작품 <게르니카>의 뒷얘기를 찾아 보기로 했다.

캔버스에 나타난 숫소는 파시즘이 아니라 잔인성과 암흑을 표현한 것이라고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답했다고 했다.
게르니카의 화폭 속에서는 진짜 적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분명치 않다.
마찬가지로 정의에 편에 서있는 자가 누구인지도 찾아내기 어렵다.
인민을 상징하는 것으로 편리하게 해석했던 숫소도 피를 흘리면서 보이지않는 적을 찾고 있는 것처럼 광폭스럽게 그려져 있다.

포화에 견디는 얼굴, 추위에 견디는 얼굴
거부에 밤에 부정에 타격에 견디는 얼굴

뒤집혀진 죽은 심장

여인들 아이들은 같은 붉은 장미들을
눈 속에 지녀
저마다 자신의 피를 보여준다.
(게르니카의 승리<부분>)

,엘뤼아르’(프랑스 최고의 저항시인,자유의 찬가노래 1894-1952)
피카소완 남다른 친분 관계며 굳건한 예술적 동지이다
그가 피카소에게 보낸 편지 한귀절을 빌면
“한폭의 그림앞에 설 수 있는 시인처럼 한편의 시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다.”
피카소는 분명 시인 기질이 넘쳐 흐르는 예술가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피카소 자신이 상당량의 시를 쓴바 있고
‘앙드레 브르통’이 “시인 피카소”라 당당히 불러준 사실에서도
그의 시적 상상력의 풍부함과 창조성을 확인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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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하나다.
예술은 언어가 필요치 않다.
예술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한 커무니케이션을 이루기 때문이다.

문학이 그러하고 음악이 그러하고 그림이 그러하고
무용이 그렇다.(난, 무용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무용은 샤먼에서 기인한다고 들었다.
신과의 교접----
마치 신 들린 듯한 몸짓이 아니고서야 어찌 몽매한 범인이 공감이 있을까?---
무언의 그 어떤 느낌, 우린 본능의 느낌으로 그냥 알고 있다.
단지 표현에 한계성만 느낄뿐, (2000년도 글에서~)

 

 

 

 

......2006년에 만난 피카소.........

 

 

그는 또 다른 이야기를 몰고 왔다.

기획 전시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게 그 색깔을 달리한다.

큐레이터를 쫓아 다니기에 평일이라도 6~70명은 좋이된다. 어떤 해설은 잘 들리고 어느 그림은 건성 지나가듯 하지만,

시대적으로 일목요연 분류 게시된 피카소 그림들... 함께 동거한 여인에 따라 그림도 그 색깔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시대적 나눔이 곧 현실의 배우자와의 나눔도 되는 듯,

그 배우자와의 삶에서 그림도 바뀌고 주,모델도 바뀌는...이 번 피카소 주제 컵셉은 넷상에서 한참  떠 돌던

피카소의 여인들 이야기에 포카스가 맞춰졌다.

어쩌면 <게르니카>전 보다 시대의 유행흐름인 누리꾼들의 입맛에 맞춘 듯....

 

그의 그림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와 모델이란 제목하의 수많은 그림들을 보면서 느낀점은

다소 거칠고 조악해 보이는 드로잉과 왜곡

 

한결같이 웬 여성 모델들의 성기는 그렇게 과다노출 크로즈엎 시켰는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건 그의 그림에서 오는 섭함이 아니다.

 

우리나라  천재화가 이중섭님이 자꾸만 오버랩되어 온다.

그는 아이들 그림에서 夏童을 많이 그렸고 자연 성기가 노출된 어린아이들로 구성된 그림이었다.

 

그의 그림은 전시를 앞두고 그림이 내려지는 불운을 맞았다.

그림이 쌍스럽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에 의해서~~

 

1880년대에 출생한 파블로 피카소와 1916년에 태어난 이중섭,

우리의 불운했던 화가가 왜 가슴 한 켠에서 청승처럼 꿈틀거리는지....

 

왜 시대는 ...세상은..... 관점이랄지...관념?이  그렇게나 다른지?

우리는 왜 그렇게 예술의 눈뜸이 늦었는지....참으로 애닯은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다.

피카소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은 과감하고도 거칠어 보이는 붓질이다.

실로 거리낌없는 단숨의 붓놀림들이다.

그에게 캔버스가 주어지면 생각할 겨를도 없는 사람처럼 단숨에 스윽쓱 대충? 그리고는 그 자체가 완성인 적이 많았다 한다.

마치 동양화의 선의 미술...여백의 미술을  짐작,   커닝한 것처럼 말이다.

 

시쳇말로 제 꼴리는대로 그린 그림...요즘 아이들이 본다면 호색환 변태라고 주저없이 말할 것 같다.

그는 자유뷴방한 화가이면서 누릴 건 다 누렸다.

부와 명예와 여자 마저도....아마도 그의 정력은 대단했었지 싶다.

그의 예술적 에너지는 끝없는 스테미너에서 나온 게 아닌지 짐작한다.

 

 

그의 그림이 조악내지는...거친듯 하다고 했던 생각은 오히려 판화 에칭부분에 가서 그 생각을 접는다.

동판, 석판이라 하기에는 얼마나 섬세한지 차라리 몽환적 분위기가 나는 그림들...

그의 싸인, 년도가 거꾸로만 보이는 것만 아니라면 실제 내가 선호하는 (그 다운?)그림인 듯...

역시 대가답구나!! 하는 인정의 기 눌림을 받았다.

 

 

깨어진 그림!!

 

그는 사물을 보이는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것을 그린다는 파블로 피카소!

 

내 자화상을 들여다 보니...마치 피카소가 그린 그림보다 더 하다는 생각을 잠시잠깐 해본....

피카소와의 데이트~ 좋았습니다.

 

이상 무식쟁이의 그림읽기 이요조 였습니다.

 

 

 

 

 

 

2006년 7월 14일 다녀와서 15일 쓰다.

 

 

 

 


파블로 피카소 ( 1881~ 1973년 스페인 말라가 출생)

 

피카소전/서울시립미술관  http://www.seoulmoa.org/  

기간/5월20~9월3일(월요일 휴관)

지하철 이용/시청 1번 출구 : 덕수궁(左) 돌담길을 끼고 250m 좌측

요금/12,000원(성인) 5,000(어린이)

관람시간/오전 10시~ 오후 10시(평일) /오전10~오후 8시(토,일 공휴일)

전시문의/02-724-2900

ARS 2124-8800

 

 

 

7월17일 제헌절은 월요일이지만 개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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