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포옹'  저처럼 착각하지 마세요!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하던 '은행나무 침대' 에서 오랜 시일이 흐른 후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미단 공주와 종문은 황혼의 들녘에서 은은한 햇살을 주고 받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로 환생한다.

 

그 어떤것도 우릴 갈라놓지 못해요. 그대 곁엔 언제나 내가 있어요...영원히~


어제 5천 년 전 포옹한 채 눈 감은 연인 유골 발견된 보도 사진을 뉴스로 접하고는 나는 뭔가  풀지못한 문제를 풀은 듯 ....기분이 싸-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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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미니홈피나 블로그가 없고 개인 홈페이지가 성황인 10여 년 전,

나도 홈페이지를 개설했었다. 비록 선물 받은 것이긴 하지만,


그 때  '백신스키'를 처음 알았고

그의 그림을 맞닥뜨렸을 때의 섬뜩함에 기가 질려 버렸다.

처음엔 얼핏 헤비메틀음악에나 어울림직한 그림이라고 폄하해 버렸었다.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 때  전율에 가까울 정도의 암울한  그의 그림을 접하고는 눈을 쉬 뗄 수 없었던 나는 이 후로 백신스키의 그림이라면  무조건하고 웹상에 떠도는 그림을 죄다 긁어모았지 싶다. 무려 4~50여개의....


물론 그의 이력에 대한 긴-글을 수집 정리 스크랩했다.

지금와서 활자화 시키려니 기억에 한계가 있어서 포털싸이트를 뒤져  검색을 해봐도 이전의 내가 수집하여 잃었던 자료(홈페이지 해킹)의  1/10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다.

물론 요즘에는 저작권법이란 게 있어서 함부로 가져올 수도 없지만...

아예 서점에서 그의 화보집을 산다면 또 모를까~


벡신스키 (Zdzislaw Beksinski)
1929년-폴란드 카르파티아산맥 근처의 도시 "샤녹(sanok)"에서 출생 유년시절을 2차대전의 영향으로 암울함속에서 보냄.
Cracow에서 건축학을 전공, 졸업 후 건축 감독으로 몇 년을 보내던 중 건축설계에 대한 압박감과 지겨움으로 건축일을 그만두고, 예술작업에 뛰어듦
1958년-비평가들로부터 그의 사진작업들이 호평을 받기 시작함.
그후, 그는 드로잉(drawing)작업에 심취함. 그의 극사실적인 묘사와 난해한 작업이 시작됨.
폴란드 현대예술의 대표주자가 됨 1977년 - 가족과 함께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Warsaw)로 이주. 폴란드를 비롯, 유럽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함. 1990-새로운 매체인 컴퓨터그래픽 작업 시작.


이외에도 기억을 되돌려 부언하자면 그는 절대적 반전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철사를 뒤엉키게 만들어 석고를 부치고, 마치 기괴한 주검을 나타내어 얼마나 전쟁이 죽음이 참혹하고 무서운지를 나타내려했다고 전한다.

그의 그림들을 모으면서 나는 폼페이 최후의 날의 화산석, 유물로만 알고 있던 '포옹'을 만나보고서야 비로소 그의 작품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그 확인이 있기 전, 화산재에 파묻힌 실제의 유물로 알고는 참으로 그 사랑에 감동했었다.

그런데...그 화가를 알고 나서 가공된 이야기에 시들하기는커녕, 그럴 수도 있을거야~ 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뉴스를 접하고 가히'백신스키'의 '포옹' 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한 셈이다.

 

 

두 팔로 서로를 감싸고 서로를 응시하는 듯한 이 유골은 5천 년에서 6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남녀의 유골이 이탈리아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돼 화제다.

6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은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 부근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원형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유골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치아 상태가 잘 보존 된 것으로 볼 때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는 이어 "이 유골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 더군다나 포옹하고 있는 형태의 유골이 발견하고는 모두 굉장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지난 25년간 폼페이를 비롯한 거의 모든 유명 유적지에서 발굴 작업을 해왔지만 이렇게 감동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발굴을 이끈 엘레나 멘토니의 설명.

 

 

폼페이 최후의 날 엿보기


1,700년이나 흐른 뒤, 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 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 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 안고 있었고, 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무더기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

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모든 집이 1,700년 전 8월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 작업장에는 연장이, 목욕탕에는 수세미가, 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한다.

 “하나의 도시를 완전무결하게 보전하는 방법으로 도시를 화산재로 덮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이 프레스코화는 그 시대 남자들의 생활을 잘말해준다 .

자신의 성기와 금은보화를 저울에 달고 있다.

 

폼페이를 신의 재앙이라고 부른다면 아마 이런 퇴폐한 생활 때문이었을 것이다라고 현대인들은 추정한다. 

정죄(定罪)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 예시의 역사가 아닌가 싶다.

 

 

2007,2,8. 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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