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市 이중섭 거리에 있는 그가 머물렀던 집..바람벽에 붙여진 싯귀이다.
화가 이중섭
....창밖의 까만 하늘에는 노란 달이 걸려 있었다. 나무 가지 사이로 떠오른 그 달은, 마치 햇과일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직 채 보름이 되지는 않은, 배가 불룩한 달이었다.
그 동그란 보름달로 점점 부풀어가는 노란 달이 창밖에서 병실 안을 몰래 엿보고 있었다. 병실 침대에는 화가 이중섭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는데, 그의 얼굴 역시 노란색이었다. 그의 턱에 꺼칠하게 자라 있는 털도 노란 수염이었다. 달빛 때문일까, 그가 덮고 있는 침대 시트까지도 노란색으로 보였다. 그래서 병실 안은 온통 노란색으로 둔갑해 있었다.
바로 그 때 이중섭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창밖의 노란 달을 바라보며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봐! 이거 봐! 이거야! 바로 이거야!"
이중섭은 바로 곁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지만, 그러나 병실에는 그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호수 같이 큰 네 눈 속에 빠져 죽고 싶어!"
다시 이중섭은 노란 달을 쳐다보며 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때 그가 노란 달을 통해 보고 있었던 것은 황소의 눈이었다. 환상이었지만, 그는 둥그스름한 달의 이미지에서 황소의 큰 눈을 떠올렸던 것이다.
황소의 눈은 점점 이중섭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 눈의 허상은 그의 온몸을 덮칠 듯이 큰 그림자로 확대되었다.
"내가 찾던 것이 바로 이거라구!"
이중섭은 황소의 눈 속으로 빨려들면서, 거기에서 비로소 한 소년을 찾아냈다. 황소를 열심히 스케치북에 데생하고 있는 그 소년은 바로 유년 시절의 그의 모습이었다.
유년 시대 /소에 미친 소년
그 때 소년 이중섭은 황소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서산 아래로 해가 떨어지는줄도 모르고 그는 스케치북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은 그 때 풀밭에 엎드려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석양에 비친 황소는 마치 거대한 산맥처럼 보였다. 그 산맥의 능선처럼 이어지고 있는 황소의 어깨와 등줄기 사이로 막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황소는 되새김질을 하며 멀뚱한 눈으로 이중섭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혼 속에 빛나는 황소의 눈은 물기에 젖어 번들거렸다.
"나는 슬프다."
이중섭은 방금 물기어린 황소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왜 슬프니?"
잠시 데생하던 손길을 멈추고, 이중섭은 물끄러미 황소를 쳐다보았다.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슬픈 거야."
슬픈 황소의 눈이 또 이중섭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맘도 나와 같구나."
이중섭은 이렇게 자기 자신이 황소를 대신해 묻고 대답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오산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당시, 이중섭은 이렇게 하루 종일 들판에 나가 풀을 뜯는 소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아침에 동쪽의 오봉산에서 해가 솟아오를 때 들판에 나가면 저녁에 서쪽의 제석산 너머로 해가 떨어질 때까지 움직일줄 모르고 소만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는 늘 점심을 걸렀지만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소의 큰 눈만 들여다 보고 있으면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소는 말을 못하니까 모든 걸 눈으로 말하지. 소는 그래서 거짓말을 할줄 몰라. 눈은 절대 속임수를 쓰지 않으니까."
어느 날 이중섭은 하숙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오늘도 소 데생하러 갔다 오는거야?"
집에 돌아오자, 같은 하숙방을 쓰는 후배 김창복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이중섭을 바라보았다.
"그래, 소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단다."
당시 이중섭은 오산중학교 5학년이었고, 김창복은 그보다 3년 후배로 둘 다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형, 마을 사람들이 형보고 뭐라는 줄 알아?"
"......뭐라는데?"
"소에 미친 녀석이래."
김창복의 말에 이중섭은 쒩쒩대고 웃었다. 좀 묘한 분위기의 웃음이었지만, 그러나 그 웃음엔 결코 불쾌한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았다.
"뭐에 미치든 미치는 건 좋은 거야. 창복아, 나는 앞으로 조선의 진짜배기 소만 그릴 테다. 소에게선 순수한 조선의 냄새가 나거든. 너도 앞으로 조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그림을 그려봐."
이중섭은 그러면서 또 쒩쒩대며 그 특유의 웃음을 토해냈다. 그는 얼굴이 좀 긴 편이었는데, 그 중 유난히 턱이 길었다. 약간 주걱턱이어서 그런지, 그 웃음 소리 끝에는 아주 특이한 여운을 남았다. 상대방을 깔보는 듯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은 자신을 향해 비웃는 것처럼 들리는 그런 웃음이었다.
이중섭이 웃을 때는 긴 턱도 흔들렸다. 그 턱에는 약간 거뭇거뭇하고 노르스름한 수염 자국이 나 있었다. 그는 이미 소년기를 넘어서 청년기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우수가 깃든 눈빛이 유난히 빛나는 것도 그의 정신적인 성숙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원래 이중섭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였다. 1916년 9월 16일 부농의 가정에서 2남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92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다섯 살 나이의 이중섭에겐 아버지의 꽃상여가 가장 기억에 남는 원색적인 색상이었다. 원래 7백 석이 넘는 부농이었기 때문에, 지주의 장례식은 거창했다. 울긋불긋한 만장기가 송천리 하늘을 뒤덮었다.
이 꽃상여의 행렬은 어린 이중섭에게 슬픔이 아니라 경이였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무서움이 아니라 신기함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기억 속에 하나의 색깔로 채색되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자 어머니가 소작인들을 직접 관리했다.
이중섭의 어머니는 소작인들에겐 여장부였고, 친척들에겐 만물박사로 통했으며, 손자들에겐 민간 의원이었다. 그녀는 소작인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머슴 하나는 술을 마시고 주정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3년 세경을 받고 붼겨났다. 그녀는 꽃을 가꾸고 과자 만드는 일에도 능했다. 바느질도 잘했다. 그녀의 손에 들어가면 무엇이든 물건이 되어 나왔다. 이처럼 솜씨가 좋았기 때문에, 일가친척들은 그녀를 만물박사라고 불렀다. 그녀는 늘 치마 허리에 큰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그 안에는 별의별 민간 치료약이 다 들어 있었는데, 집안의 웬만큼 아픈 사람은 그녀가 다 치료했다.
이중섭은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잡고 들에 따라 나가기를 좋아했다. 그 무렵 그녀는 소작인들을 독려하기 위해 자주 논밭에 나갔는데,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돌면서 자연 교육을 시킨 셈이었다.
어린 이중섭은 특히 논밭을 가는 힘센 황소에게 매력을 느꼈다.
"어머니, 저 황소는 힘이 아주 세지요?"
이중섭은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붙든 채 황소의 일하는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옛날 소가 없던 시절엔 사람이 밭을 갈았단다. 얼마나 힘이 들었겠니? 그러나 이젠 소가 사람 일을 대신하니 힘이 덜 들고 편리하단다. 농사짓는 사람들에겐 소가 재산이지. 소야말로 큰 일꾼이야. 그러니 소한테 사말들이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단다."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이중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의 눈이 참 순해 보여요."
이중섭은 한참 황소의 눈을 들여다 보고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 녀석! 인정이 참 많구나. 소가 불쌍해 보인단 말이지?"
"네, 너무 힘든 일을 하니까 불쌍해 보여요. 그런데 소는 말을 할줄 모르니까 아무리 힘이 들어도 계속계속 일만 하잖아요."
이중섭의 말에 어머니는 대견한 마음에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 시절 이중섭은 어머니를 따라 평양의 이문리 외가에도 자주갔다. 과수원을 경영하던 외할머니는 손자들이 오면 사과를 한 개씩 나눠주곤 했다.
사과를 받아든 이중섭은 그걸 곧바로 먹지 않았다. 그는 집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나무 끄트러기로 사과 그림을 그렸다. 그는 가을날 햇빛에 반짝이는 탐스런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과수원길을 걷는 것도 큰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이중섭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다. 그보다 열두 살이 많았던 형 중석과 다섯 살 많은 누나 중숙이 있었지만, 그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이중섭은 한문 사숙에서 동몽선습, 맹자, 논어 등을 배웠다. 그러다가 1924년에 평양 시내에 있는 종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그는 김병기, 양명문, 김이석, 황순원 등과 한 학년이었다. 이들 중 김병기는 후일 화가가 되었고, 양명문은 시인이 되었으며, 김이석과 황순원은 소설가가 되었다. 미래의 쟁쟁한 화가, 문인들이 한 학년이었던 것이다.
이중섭은 평양 교외의 '기생 마을'로 이름이 난 이문리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외할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으나 이종형제들 틈에서도 늘 외톨이로 지냈다. 그런 외로움은 자연 그에게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림 그리는 솜씨로 빛을 보게 되었다.
이중섭이 그림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보통학교 4학년 때부터였다. 어느 날 학교 친구인 김병기가 놀러왔을 때, 그는 문득 닳고 닳은 몽당 수채붓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얘, 병기야! 물감이 너무 많이 묻었을 때 이 몽당붓을 대면 쪽 빨아먹는다? 신기하지 않니?"
이중섭은 이미 그 때부터 그림 그리는 기법을 스스로 익혀 나가고 있었다. 물감과 붓의 성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중섭은 곧잘 김병기의 집으로 놀러가곤 했는데, 친구 아버지가 쓰던 화구들이며 캔버스에 그린 그림들, 온갖 외국의 미술 잡지 등을 뒤적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4학년 때 단거리 육상 선수로도 뽑힌 적이 있는 이중섭은, 그러나 운동보다 그림을 더 좋아했다. 교과서는 물론이고 온갖 공책 속에다 그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 무렵 이중섭의 또 하나의 취미는, 평양 시내의 종로거리에 있는 문방구점에 가는 일이었다. 거기에는 그림 그리기에 좋은 도화지와 물감들이 무지무지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호주머니에 돈이 없을 때는 그냥 문방구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문방구점 주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젖기도 했다.
당시에도 상급 학교 진학은 치열한 입시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래서 대부분 학생들은 5~6학년이 되면 머리를 싸매고 입시 공부에 몰두했다. 그러나 이중섭은 입시 공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그림 그리는 데만 열중할 뿐이었다.
"중섭아! 너 정말 공부 안 할래? 느이 형 중석이처럼 공부를 잘해서 평양제2고보에 합격해야지."
이모가 이렇게 말했지만, 이중섭은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림 그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헤헤, 난 그림 공부를 할 거야. 난 그림이 좋거든."
이중섭은 바보처럼 입을 헤에, 벌리고 웃었다. 그걸 보고 이모가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아무래도 미친 녀석이야."
결국 이중섭은 이모에게 '그림에 미친 아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 무렵 이중섭은 특히 고구려 벽화가 그려진 고분에 들어가 놀기를 즐겼다. 옛날 사람의 무덤이라고 해서 귀신이 나온다며 다른 아이들은 잘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늘 혼자 그 고분 속에 들어가 벽화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멍하니 벽화를 바라보다가 고분 벽에 기대어 잠이 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그런 이중섭을 보고 '귀신에 홀린 아이'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벽화 그림 속에 나오는 말타고 활쏘는 사람들이 다 귀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 나는 귀신에 미친 아이야. 벽화 귀신!"
이중섭은 그러면서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헤에, 웃었다.
보통학교를 마친 이중섭은 형처럼 평양제2고보에 입학 원서를 냈다. 그리고 만약에 떨어질 것을 대비해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에도 원서를 내고, 이중 시험을 치렀다. 그 결과 평양제2고보는 낙방을 하고, 오산중학교에는 합격을 했다.
이렇게 해서 이중섭은 1931년 봄 오산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가 집과 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중섭은 하숙을 정하고 유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평안북도 정주에는 오봉산이란 큰 산이 있었다. 그 산 이름을 약칭해서 지은 것이 오산중학교였다. 오산중학교는 부지가 약 10만 평에 이르는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해 었었다. 넓은 운동장 한 구석에는 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민족 의식이 강한 선생들이 특히 많았다. 당시 교장은 고당 조만식이었고, 함석헌도 이 학교에서 국사 강의를 맡고 있었다.
이중섭의 젊은 영혼을 흔들어 놓은 것은, 이 같은 민족 의식이 강한 선생들의 피끓는 강의에 의해서였다.
당시 오산중학교의 수재들은 '까치' '아구리' '고릴라' '곰' '두더지' 등으로 불리던 5대 명물이 있었는데, 그 중 '아구리'는 바로 이중섭의 별명이었다. 그가 '아구리'란 별명으로 불린 것은 유난히 턱이 길로 입이 컸기 때문이었다.
보통학교 시절 그림에만 몰두하느라 공부를 등한시했지만, 오산중학교에 입학한 후 이중섭은 줄곧 우등을 차지했다. 그다지 열의를 가지고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언제나 정상의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중섭이 오직 열심으로 공부에 임한 것은 그림이었다. 그가 열성으로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화가이며 미술 교사인 임용련 덕분이었다.
화가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가 오산학교에 부임한 것은 이중섭이 5학년 되던 해의 일이었다. 임용련은 미국 예일대학 미술학부를 우등으로 졸업한 유명 화가였고, 백남순은 일본여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했던 여류 화가였다.
임용련은 이중섭에게 후기 인상파의 화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정물화의 명인이었던 백남순은 이중섭과 같이 하숙생활을 한 3년 후배 김창복에게 그림 공부를 시켰다.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중섭아! 진정한 하나의 예술 작품은 수없이 많은 예술 습작에 의해 만들어진단다."
임용련의 이와 같은 가르침을, 이중섭은 뼈에 스밀 정도로 가슴 속에 아로새겼다.
이중섭은 이처럼 임용련에게 미술 지도를 받을 때부터 들판에 나가 황소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선생의 말처럼 수없이 스케치북에 데생 연습을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이중섭은 밀가루에 수채 물감을 범벅해서, 그것을 짓이겨 바르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물감이 다 마르고 나자 밀가루 덩어리로 얼룩진 화면에선 독특한 입체감이 되살아났다.
"그래, 중섭아! 바로 그거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거야. 독창성을 길러야 해. 부단히 새로운 소재를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술 교사 임용련은 이중섭의 밀가루 범벅 그림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용련은 아내 백남순에게도 이중섭의 밀가루 범벅 그림을 보여주며 '장래의 대화가가 나왔다'며 자랑을 했다.
어느 일요일날 김창복에게 개인적으로 미술 지도를 해주기 위해 하숙집에 들른 백남순은, 마침 이중섭이 열심히 밀가루 범벅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중섭 학생은 이미 화가야. 임용련 선생이 '장래의 대화가가 나왔다'며 내게 자랑을 하던 걸?"
백남순의 말에, 그러나 이중섭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황소 웃음처럼 아주 싱거운 웃음이었다.
그 무렵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해 국어말살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특히 민족 의식이 강했던 오산중학교는 다른 학교보다 더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이중섭은 하숙방에서 빈둥대며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창복아, 한글을 없애면 우린 뭐가 되겠냐? 나중에는 우리가 조선 사람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게 될 것 아니냐?"
"글쎄 말이야. 정말 큰일이야."
김창복도 근심어린 얼굴로 이중섭을 쳐다 보았다.
"난 한글로 그림을 그릴 생각이야. 그림으로 그리면 한글이 없어지지 않는다. 한글 획으로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림을 만드는 거야. 미술적 구도로 조합을 하는 것이지."
이중섭은 신바람이 나서 외쳤다. 그는 그 날 이후 황소를 데생하기 위해 들판에 나가는 것도 뒤로 미루고, 한글 자모를 가지고 독특한 구성의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선생님! 이 그림 어때요?"
이중섭은 그 그림을 임용련에게 보여주었다.
임용련은 그 그림을 보고 나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머리만 끄덕일 뿐이었다. 무언의 칭찬이긴 했지만, 교사로써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말로 칭찬을 해주면 이중섭이 용기를 갖고 그 일에 더 매달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이중섭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고 있는 임용련으로선, 그가 일본인들의 국어 말살 정책에 항거하다 자칫 다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오산중학교 5대 명물로 알려진 이중섭이 동료들을 끌어들여 그런 항거의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날 밤 이중섭은 몹시 괴로웠다. 늘 자신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던 미술교사 임용련이 한글 자모로 그린 그림을 보고도 이렇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칭찬으로 받으려고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이중섭은 그림으로도 얼마든지 항거의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답답해서 미치겠군!"
이중섭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형! 왜 그래요?"
옆에서 보고 있던 김창복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쪽바리들을 골탕먹일 수 있을까?"
그림으로 항거해서도 별 실효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이중섭은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일본인들에게 보복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매일밤 하숙집마다 교사들이 순찰을 돌았다. 순찰하는 교사가 지나간 다음, 이중섭은 5대 명물 중의 한 명인 '까치'란 별명의 학생을 불러냈다. 그리고는 셋이서 옥수수술을 사다가 밤새 마시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 학교 건물이 일본의 보험회사에 보험 가입이 되어 있다는 거, 너희들도 알지?"
이중섭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건 왜?"
까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우리 오산중학교 5대 명물이 한번 일을 벌이는 거야. 본관 화학실 있잖아? 거기에 불을 지르는 거야. 화학실에는 불에 잘 타는 물질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금세 건물 전체로 번지게 돼."
이렇게 말할 때, 이중섭의 눈에서는 진짜 불길이 일렁이는 듯했다.
"불을 지른다구?"
이번에는 같이 술을 마시던 김창복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매우 놀란 눈길로 이중섭을 쳐다 보았다.
그러나 이중섭은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이 나서 건물이 타버리면 일본의 보험회사에서 새로 지어주게 돼 있다구. 우리 학교는 전혀 손해볼 게 없어."
"그래, 그거 괜찮은 생각이다. 우리야 뭐 꿩 먹고 알 먹고지."
갑자기 신바람이 난 까치가 팔까지 걷어붙이고 나섰다.
"우리 오산 5대 명물이 한번 본때를 보여주자구!"
술이 올라 얼굴이 붉어진 이중섭도 불끈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좋아! 우리 말고 나머지 애들에겐 내가 연락을 취하지. 오늘은 늦었고, 내일 밤 자정쯤 본관 건물 앞에서 만나자구."
까치 역시 술에 취해 걷어붙인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다음 날 밤이 되었다.
"형! 오늘 밤에 정말 일을 저지를거야?"
"흠......!"
김창복의 말에 이중섭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형! 난 아무래도 불안해. 일이 잘못 되는 순간에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김창복은 두려운 시선으로 얼핏 이중섭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 얼굴엔 어두운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일이 잘못되는 건 문제가 아니야.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면 그 뿐이야. 그보다는 우리 학교 본관에 불을 지른다는 일이 잘하는 짓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경솔했던 것 같아."
이중섭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건 나쁜 짓이라구."
김창복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친구들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도 없잖아."
마음이 흔들린 이중섭의 목소리도 사뭇 떨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성격적으로 섬약한 데가 있었다.
"형! 가지 마! 형이 안 가면 다름 형들도 불을 지르는 일을 감히 하지 못할 거야."
이제 김창복은 이중섭의 팔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그래, 창복아! 이 형이 너무 못났구나. 너 나가서 술 좀 받아오지 않을래? 술이라도 마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괴로워서 못살 것 같다."
이중섭은 푸욱, 한숨을 내쉬며 땅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그는 소년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아는 나이였다.
결국 이중섭은 그날밤 김창복과 함께 옥수수술을 마시며 괴로운 마음을 달랬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그는 잠을 한숨 못잤다.
다음날 아침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본관이 다 타버린 것은 아니지만, 처음 불이 난 화학실의 실험 기구들은 모두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안 이중섭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하던 그는, 아침 일찍 미술 교사 임용련을 찾아갔다. 학교가 아닌 집으로 찾아간 것이었다.
"선생님! 학교 본관에 불을 지른 것은 바로 제가 한 짓입니다."
이중섭은 고개를 꺾었다.
"아니, 네가? 왜 그런 짓을 했니?"
임용련은 전혀 뜻밖의 사건 앞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이 전소되면 일본의 보험회사에서 현대식으로 새 건물을 지어줄 거란 생각에서 한 짓입니다."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중섭은, 이제 아예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했는지 나는 말 안 해도 잘 안다. 그러나 학교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은 범죄 행위다."
임용련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때 방안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임용련의 아내 백남순이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세상에. 중섭 학생은 큰 범죄를 저지른 거예요. 이걸 어쩌면 좋아!"
백남순은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당신은 잠자코 있어요. 지금 얘기 안 들은 걸로 해두란 말이오.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임용련이 아내 백남순의 말을 저지했다.
"죄송합니다."
이중섭은 이들 부부 교사 앞에서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일어나라. 지금 이 순간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일로 생각해라. 그리고 돌아가 그림을 그려라."
임용련은 이렇게 타일러 이중섭을 돌려보냈다.
잔뜩 야단만 맞을 줄 알았던 이중섭은, 고해성사를 하고 난 뒤의 가벼운 기분이 되어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학교 본관 방화 사건은 임용련의 힘을 입어 순탄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달 후 졸업식 때 이중섭은 또 하나의 사건에 걸려 들었다.
1936년 3월, 이중섭은 오산중학교 25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 때 그는 졸업 앨범에 그림을 그렸는데, 바로 그 그림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한반도를 그리고 일본 쪽에서 불덩어리가 날아드는 그림이었다.
일본 순사들이 의심을 품은 것은, 그 그림이 일본의 기운이 조선으로 흘러든다는 걸 뜻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였다.
이 사건도 미술 교사 임용련이 아니었다면 이중섭이 위기를 모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불덩어리를 일본의 기운이 조선으로 흘러든다고만 볼 수도 없습니다. 당신들도 일본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 조선땅에 와 있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건너온 것도 이 불덩어리와 같은 것입니다."
임용련의 이와 같은 교묘한 그림 해석은 일본 순사들의 의심을 한 순간에 잠재워 놓기에 충분했다. 자신들을 치켜세워주자, 오히려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직후 이중섭은 학교 서쪽에 있는 제석산에 올라갔다. 그는 학교를 배경으로 한 풍경화를 그렸다. 학교 다닐 때도 잘 그리지 않던 풍경화였다. 그는 오산중학교 시절을 가슴 속 깊이 담아 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중섭은 자신이 그린 오산중학교 전경을 미술 교사 임용련에게 바쳤다.
"선생님, 이 그림은 제가 청소년기를 보낸 이곳 오산중학교의 추억을 제 가슴 속에 담아두기 위해 그린 것입니다. 저는 아마 평생토록 이 시절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그림은 또한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린 것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20대로 접어든 이중섭의 눈빛은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그 깊은 눈속에는 맑은 영혼이 샘물처럼 물기를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그래, 네 뜻을 알겠다. 나처럼 외국을 많이 돌아다닌 사람도 드물 것이다. 미국에서도 살고 프랑스에서도 살았지만, 그러나 우리나라가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사람은 조선 땅을 제일 사랑하는 법이다. 너도 네가 청소년기를 보낸 이 땅이 더 좋은 모양이지? 풍경화를 그리지 않던 네가 이 그림을 특별히 그린 걸 보면."
임용련의 벌써 그림만 보고도 이중섭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조선 사람은 조선 땅이 좋고, 그래서 조선 땅에서 살아야 한다면, 일본 유학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조선의 흙냄새를 맡으며 그림을 그리면 어떻겠습니까?"
이중섭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렇지 않다. 너는 일본으로 건너가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조선의 황소가 일본에는 없다. 그러나 진짜 힘 좋은 조선의 황소를 그리려면, 일본에 가서 그림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가라는 얘기다."
이중섭은 임용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이중섭은 일본 유학의 뜻을 굳혔다. 그러나 그는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후 1년 동안 원산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가족이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군의 땅을 정리하여 원산으로 이산을 한 것이었다.
당시 이중섭의 형 이중석은 일본 동경의 동양척식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원산에 있는 경성식산은행에 다니고 있었다.
이중섭이 곧바로 일본 유학을 떠나지 못한 것은 바로 형 이중석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것에 나는 반대다. 그림이야 아무 데서는 못 그리겠냐? 네가 나처럼 상과나 또는 법과를 택한다면 찬성이다만, 그림은 안 된다."
나이가 열두 살이나 위인 형 이중석의 말은, 당시 이중섭으로선 아버지를 대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형의 한 마디에 그는 기가 죽어 버렸다.
사실 이중섭도 한창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 때 형에게 대항하는 뜻에서 가출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집에는 그의 마음을 도닥거려주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늘 이중섭에게 용기를 주었다.
"아버지 같은 형의 말이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치 말거라. 내 곁에서 좀 쉬거라. 그러면 기회를 보아 내가 형에게 네 일을 다시 부탁해 보마."
어머니는 사실 이중섭과 그 동안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귀여운 막내아들을 옆에 붙들어 두고 싶었던 것이다.
하숙 생활을 하면서 정에 굶주렸던 이중섭 역시 당분간 어머니 곁에 남아 있기로 마음을 굳혔다.
원산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중섭이 할 일이란 별로 없었다. 그는 원산 일대의 자연에 매료를 느껴 매일 들판을 쏘다녔다. 송도원 일대를 돌며 그는 들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스케치북을 들고 나가 소를 데생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동작의 황소를 그렸다. 뿔 달린 머리, 툭 불거진 튼튼한 어깨, 뒷발, 꼬리 등 부분을 나누어 그리기도 했다.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원산에서 생활한 1년은 이중섭에게 큰 공부가 되었다. 그는 비로소 자연을 알게 된 것이었다. 자연과 소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즉, 소도 자연의 일부였고, 그 소를 그리는 자신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원산 생활 1년이 가르쳐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7년 이중섭은 드디어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어머니가 형 이중석에게 다시 얘기를 해서, 그에게 일본 유학이 허락된 것이었다. 사실은 형이 허락을 했다기보다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묵인을 해준 정도였다.
그래서 이중섭은 원산을 떠날 때 아무에게도 자신이 일본으로 유학간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형의 묵인 아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몰래 도망치듯 떠나온 것이었다.
이중섭은 현해탄을 건너면서 문득 오산중학교 졸업 앨범에 그렸던 자신의 그림을 떠올렸다. 검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배의 난간에 기대선 그는, 그 파도 속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힘의 원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한반도를 향해 일본 쪽에서 날아오는 불덩어리처럼, 저 파도 역시 일본 땅에서 조선 땅으로 쉬임없이 굽이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는 이제 저 거센 파도를 타고 있는 거야."
이중섭은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생각하는 파도는 꿈틀대는 힘의 원리이기도 했지만, 세계를 한아름으로 포옹하는 마치 어머니와도 같은 부드러운 가슴이었다.
"나는 이제 저 파도를 타고 세계와 만나는 거다."
이렇게 말하는 이중섭의 가슴은 갑자기 어떤 포만감으로 뿌듯해졌다. 그는 벌써부터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청년 시대
동방의 루오
동경에 첫발을 내딛은 이중섭은, 그러나 1년 동안 숨어서 지내다시피 했다. 그는 먼저 동경에 와 있던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낡은 아파트의 음침한 자취방에 틀어박혀 지내며, 그는 묵묵하게 미술연구소에 다녔다.
이중섭은 이처럼 동경의 낯선 분위기를 익히는 데 1년이나 걸렸다. 곧바로 대학에 원서를 넣고도 싶었지만, 그는 일부러 밀폐된 생활을 자청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 데 힘썼다.
동경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후, 이중섭은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미 그곳에는 조선에서 온 유학생도 적지 않았으나, 그는 그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외톨이였고, 사색을 좋아하는 감수성 예민한 청년이었다.
조선에서 이중섭이 생각하고 있던 동경은 너무나도 달랐다. 오산중학교 시절에 생각했던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이미 그 당시 일본 화단은 서구의 전위미술까지 들어와 있을 정도로 활발했다.
이중섭은 자연 그런 분위기 때문에 주눅이 들었다. 유파에 따라 추종자가 생기고, 그림을 모방하는 풍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싫었다. 그가 다니는 동경제국미술학교에는 일본의 부유층 자녀들이 많았다. 그러니 돈과 예술이 자연 혼동되는 시대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좋은 쪽으로 말하면 자유분방한 예술 세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중섭은 예술을 돈으로 사는 식의 풍토가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예술이야말로 개인의 창조적인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의 유파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창조성 뿐만 아니라 역사성 조차 없는 것이라고 이중섭은 생각했다. 진짜 예술은 그것을 그린 사람이 태어나 자란 곳의 땅 냄새가 물씬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단순하면서도 고집스런 예술관이었다.
이중섭이 대학에 다니면서도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혼자 고민하고 생각했고,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의 예술관에 입각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중섭에게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그에겐 잊을 수 없는 은사인 오산중학교 미술 교사 임용련의 편지였다. 편지 내용은 간략했다. '봄이 오면 다시 오라'는 것이 그 내용 중 뼈 있는 대목이었다.
이미 은사 임용련은 제자가 동경에서 겪고 있는 정신적 갈등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중섭은 '봄이 오면 다시 오라'는 은사의 그 편지 한 구절을 보다 그만 눈물을 흘릴 뻔했다.
당시 이중섭은 동경 시내의 '길상사'란 절이 있는 공원 안의 한 아파트에 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은사의 편지를 받고 향수에 젖어 있는 그의 자취방으로 문득 친구가 찾아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너 고릴라 아니냐?"
이중섭은 너무 반가워 친구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 '고릴라'란 별명을 가진 친구는 오산중학교 시절 5대 명물 중의 하나로 학교 본관 방화 사건에도 관여했던 이준명이었다.
이준명 역시 화가 지망생으로 동경에 왔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한 채 빈둥거리고 있는 상태였다.
"중섭아! 나는 지금 갈 곳이 없다."
이준명이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
"잘 왔다. 여기서 나하구 같이 있자."
이중섭은 이준명과 함께 같은 방에서 자취를 하는 한편, 형에게서 부쳐오는 돈을 나눠 그 친구에게 학비까지 대주었다.
그 무렵 이중섭은 동경제국미술학교를 그만두고 동경문화학원으로 학적을 옮겼다. 이 문화학원은 '니시무라 이사쿠라'라는 일본 건축가가 세운 학교인데, 남녀 공학에 교복이 없었을 정도로 아주 자유분방한 학풍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여학생들 중에는 미니 스커트를 즐겨 입고 담배도 피우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그만큼 자유스럽고, 또한 개인의 창조적 능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다.
이 문화학원에는 유영국, 문학수 등의 조선 유학생이 있었다. 또 보통학교 시절 이중섭의 동기동창이었던 김병기까지 있어서, 전에 그가 동경제국미술학교에 다닐 때보다 덜 외롭게 지낼 수 있었다.
갑작스런 새로운 문화에 충격을 받아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이중섭은 문화학원에 다니면서 비로소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동경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기까지 적어도 2년 이상이 걸린 셈이었다.
그 당시 이중섭은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다니는 조선인 유학생 구상과도 친하게 지냈다.
이중섭이 구상을 소개받은 것은 동경제국미술대학교에 다니던 친구에 의해서였다.
구상은 이중섭을 처음 보는 순간 대뜸 이렇게 말했다.
"루오 그림의 예수 같소."
이 때 이중섭도 구상의 손을 반갑게 잡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이 그런 것 같소."
구상의 말처럼 이중섭은 사실 그 당시 문화학원에서 '동방의 루오'라고 불리고 있었다. 루오는 당시 프랑스 화단에서 이름을 떨치던 화가로,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그린 연작은 세계적 주목을 받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중섭의 그림을 보면 루오의 그림처럼 선이 굵고 힘찬 율동으로 꿈틀거렸다. 그는 개성을 존중하는 학풍인 문화학원에서 비로소 자신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마음대로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학원 학생들 사이에선 이중섭에 대한 다음과 같은 소문들이 퍼져 나갔다. '동방의 루오가 나타났다' '루오처럼 시커멓게 칠하는 학생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그것인데, 이처럼 학생들은 모두 이중섭을 괴짜로 생각했다.
같이 자취를 하는 이준명이 다른 친구집에 가 있을 때면, 이중섭은 아예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방문 앞에 '면회 사절' 딱지를 붙여 놓은 채 그림 그리는 데만 몰두하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특히 조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소를 그릴 경우 예전 같지 않게 굵은 선으로 된 골체만 그린 그림이 많았다. 사람을 그려도 해골과 뼈대만 그렸다.
이런 화풍의 그림을 보고 학생들은 이중섭을 '괴짜 화가'로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다 친구들이 뼈만 남은 소 그림에 대해 물으면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곤 했다.
"헤에. 여기선 조선의 소를 볼 수가 없잖아? 그래서 나는 상상의 눈으로 소를 보곤하지. 그러면 말이야 너무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소를 꿰?고 뼈까지 보게 되는 거야. 그러니 소 뼈다귀나 그릴 수밖에. 헤헤헤."
이중섭은 이처럼 곧잘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린 채 웃길 잘했다. 또 어떤 때는 쒩쒩대면서 턱에 난 노란 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소름끼치게 웃는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는 언제나 허무의 쓸쓸한 여운이 그의 얼굴 주변에 흩어져 있곤 했다.
그 무렵 오산중학교 시절 이중섭과 같은 하숙방을 썼던 3년 후배 김창복이 동경제국미술학교로 왔다.
이중섭은 너무 반가워 김창복을 자신의 아파트 자취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의 방에는 늘 화구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는 후배 김창복에게 손바닥만한 작은 그림 하나를 보여 주었다.
"창복아! 이 그림 어때?"
이중섭이 내민 것은 은박지 그림이었다.
"이건 뭐야? 담배 은박지 아니유?"
"그래."
"형, 참 기발한 그림인데? 착상이 좋아요."
김창복은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산중학교 시절 수채와 밀가루를 범벅해서 미술 교사 임용련을 놀라게 했던 이중섭이었다.
이미 그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는 김창복이었지만,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이중섭의 독창적인 기법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날 김창복은 이중섭의 자취방에서 잤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골아떨어졌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중섭이 옆자리에 없었다.
"형이 어디 간 것일까?"
김창복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마침 그 때는 겨울이었는데, 아파트 근처의 길상사 공원 호수에서 이중섭이 얼음을 깨고 냉수 마찰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김창복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형! 감기 들면 어쩔려고 그래?"
"흐흐. 괜찮아. 이렇게 매일 아침 냉수 마찰을 하는데, 정신이 맑아지는 게 아주 좋아."
이중섭은 자신의 소 그림처럼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바짝 마른 몸으로 근육 자랑을 했다.
처음 김창복은 그 모습이 웃으워 배꼽을 잡았지만, 곧 그것이 바로 이중섭의 정신 집중 훈련임을 알아챘다.
"창복아! 너 춥겠구나. 이 털외투 너 입어라."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자신이 입던 고급 옷을 아무 생각 없이 김창복에게 주었다.
이중섭은 형이 부쳐주는 돈으로 생활에 큰 곤란을 겪지는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다른 조선 유학생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그는 가난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옷을 스스럼없이 벗어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중섭의 형이 동경에 왔다. 형 이중석은 자신이 부쳐준 돈으로 동생이 이준명의 학비까지 대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너에게 돈을 부쳐주지 않겠다. 앞으로는 네가 벌어서 생활해."
이중석은 동생을 이렇게 꾸짖고는 화가 나서 곧바로 귀국해 버렸다.
그 이후 진짜 형에게서는 돈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중섭은 가난을 결코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림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그 무렵 그는 거의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고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했는데, 간혹 어쩌다 친구들이 찾아와도 '면회 사절'이라는 딱지가 방문 앞에 붙어 있어 아쉬운 발길을 돌리게 하곤 했다.
때마침 그 때 프랑스 화단에 데뷔했던 일본 화가 쓰다가 문화학원 교수로 부임해 왔다. 어느 날 이중섭은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가지고 그 교수를 찾아갔다.
뼈만 남은 소의 그림들과 은박지에 그린 소품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쓰다는 대뜸 이중섭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군! 이군은 두보를 좋아한다지? 나도 두보와 이백을 읽었네."
쓰다는 이미 이중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동양 철학과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면목 없습니다."
이중섭은 자신의 내면을 발가벗기운 것 같아 몹시 부끄러웠다.
"이군의 얼굴을 보면 모든 것이 그려져 있어. 우리 문화학원의 '루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네. 이 그림들은 아주 놀라운 작품이네. 아주 작은 소품들이지만 큰 벽화에 견줄만한 대작들일세."
쓰다는 작은 것과 큰 것이 그림의 크기가 아니라 내용에서 비교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화가였다.
이중섭은 특히 작은 크기의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오만과 자신만만함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무조건 캔버스가 크다고 대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20대에 벌써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발견하는 동양적 사고와 우주적 원리를 터득했던 것이다.
쓰다는 그날 아껴두던 고급 양주를 이중섭에게 대접했다.
"위대한 화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술이네. 자네 그림에 대한 축배지."
이 같은 쓰다의 찬사에 이중섭은 아무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내심 기쁘긴 했지만, 그 동안 그림을 그리느라 눈을 제대로 붙이지 못하다가 갑자기 술기운이 돌자 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던 것이다.
쓰다의 집을 나와 자취방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오랜만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정말 달고도 평화스러운 잠이었다.
이처럼 그림밖에 모르는 이중섭에게 사랑스런 여성이 하나 나타났다. 어느 날 실기 수업을 끝내고 그가 붓을 빨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마찬가지로 붓을 빨고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마침 두 사람 뿐이어서 자연 말이 오가게 되었다.
"나는 한 가지 붓을 오래 사용해요. 이렇게 몽당붓이 될 때까지 말입니다."
여학생이 자신의 몽당붓을 자꾸만 쳐다보자, 이중섭은 그것이 부끄러워 먼저 변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제가 그림 하나 사고 싶은데요."
여학생은 매우 수줍어하는 얼굴로 이중섭을 쳐다 보았다. 그녀는 이미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알아요?"
"네, 쓰다 선생님께서 굉장히 칭찬을 하시던데요?"
그 여학생은 이중섭보다 문화학원 2년 후배로, 이름이 야마모토 마사코였다. 그녀는 그 무렵 파리로 유학을 가기 위해 불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문화학원 유화과에 다니고 있었지만, 그림보다 문학에 취미가 있었다.
문학 역시 좋아했던 이중섭은, 곧 그런 마사코와 친해졌다. 두 사람은 다방 같은 데서 자주 만났다.
주로 말을 많이 하는 쪽은 이중섭이었다. 그는 원래가 눌변이었다. 그러나 어눌한 말투이긴 하지만, 그는 열심히 마사코에게 문학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보들레르, 발레리, 릴케, 베를렌느 등 세계 유명 시인들의 명시를 암송해서 들려 주기도 했다.
"조선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마사코는 늘 우울한 얼굴을 하고 다니는 이중섭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이야기를 하려니까, 말이 잘 안 나오네요. 아무튼 서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이중섭은 그 긴 턱이 무너지도록 길게 한숨을 내리쉬었다.
"그런 나라에서 훌륭한 예술가가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루오'상처럼."
마사코를 손으로 이중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이중섭과 마사코는 문화학원 내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그들은 멀리 신주쿠의 '남만' 다방까지 진출해 밀회를 즐겼다.
당시 이중섭의 옷차림은 아주 특이했다. 코트의 아랫부분을 무릎 위에 달랑 걸쳐지도록 짧게 잘라내어 입고 다녔다. 그 잘라낸 천조각으로는 네모진 큰 주머니를 겉에 달았다. 이러한 짧은 코트에 마도로스 모자를 쓰고 다니자, 친구들에 그에게 '허자비'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허수아비란 뜻이었다.
그래서 이중섭은 '루오'란 별명 이외에 '아고리' '노란 수염' '허자비'란 별명까지 얻었다.
긴 턱에 노란 수염을 단 허수아비, 이것이 바로 동양의 루오 이중섭의 당시 모습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이중섭은 이런 옷차림으로 마사코를 만났다. 그녀는 모처럼 기노모에 게다까지 신고 나왔다.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지만, 그런 것에 관계하지 않고 신주쿠의 번화한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그런데 마사코가 길을 가다 발을 다쳤다. 자신의 게다가 기노모 자락을 밟는 바람에 그만 넘어진 것이었다.
이중섭은 마사코를 차에 태워 급히 자신의 자취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정성스레 그녀의 다친 발을 치료해 주었다.
"이건 조선의 소요. 이걸 드리겠소."
그 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자신이 그린 황소 그림을 선물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 두 사람은 더욱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1940년 3월, 이중섭은 문화학원을 졸업했다. 졸업 기념으로 제4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낸 작품 '소'가 협회장상을 받았다. 당시 일본 신문에서는 그의 작품을 크게 기사화하기까지 했다.
문화학원을 졸업한 후 이중섭은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다. 마사코 역시 같은 유학의 꿈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치열해 지면서 두 사람 모두 유학의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 무렵 이중섭은 마사코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사코는 '미츠이'라는 창고 주식회사 사장의 네 딸 중 셋째딸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가톨릭 가정이었고, 아버지는 아주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셋째딸 마사코가 조선 사람, 즉 한국인과 사귀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결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결혼의 걸림돌은 이중섭에게 있었다. 민족 의식이 강했던 그는, 도무지 조국을 강제로 빼앗은 나라의 여성과 결혼한다는 사실 자체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이중섭은, 마침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이종사촌 형 이광석을 찾아가 의논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 내가 일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데 대해서?"
"난 우선은 반대야. 그러나 중섭이 너는 특수하니까 안 될 것도 없지 뭐. 넌 남달리 열정이 강하잖아. 그러니 네가 사랑을 저버릴 수는 없지."
이광석의 말에 이중섭은 용기를 얻었다.
1943년 제7회 창미전에서 이중섭은 '망월'이란 작품을 출품해 또 다시 태양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 그림은 화면 왼쪽에 둥근 달이 떠 있고, 중앙에 얼굴과 한 손을 하늘로 향한 청년의 머리 단상과 오른쪽에는 역시 머리가 반쯤 잘린 소가 그려져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의 조국의 비운과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 상을 타고 나서 이중섭은 귀국을 서둘렀다. 본국에서 형이 더 이상 돈을 붙여주지 않아 궁핍한 생활에도 진력이 났을 뿐더러, 마사코와의 결혼을 서두르기 위해 어머니와 급히 상의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마사코! 내가 귀국하면 반드시 당신을 부를 것이오. 그 때 내게로 와 주시오."
이중섭은 동경에서 마사코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귀국했다.
원산에 돌아온 이중섭은 일본 동경에서 그리워하던 소를 실컷 볼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는 거의 매일 소를 구경하기 위해 들판으로 나갔다.
원산 근교의 송도원 들판에는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이 많았다. 그 많은 소들 가운데 사람이 하나 있었다. 마치 소처럼 아예 배를 깔고 엎드려 되새김질하는 어느 황소의 눈을 들려다 보고 있었다. 이중섭이었다. 황소의 눈을 들려다 보는 그의 눈 역시 황소의 그것을 닮았다.
이중섭이 바라보고 있는 황소의 눈은 마치 호수 같았다. 맑고 투명했으며, 어떤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 황소의 눈이 호수라면 부뚝 튀어나온 어깨와 완만한 등허리의 곡선은 거대한 산맥이었다.
"그렇지. 그래, 바로 소는 우리나라의 몸이야. 소의 눈은 우리나라의 정신이고. 나는 반드시 소의 그림을 통해 그 정신을 표현해 내고야 말거야."
이중섭은 그러면서 쒩쒩 웃었다. 마치 황소가 재채기라도 하듯 그렇게 웃었다. 풀밭에 엎드려 되새김질을 하는 황소처럼, 그는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키워나갔다.
이처럼 이중섭은 소에 미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동경 유학 시절에 그는 소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는 소를 그릴 때도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다 보니 뼈만 남은 소를 그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중섭은 오래도록 소에 굶주려 있었다. 그러나 귀국해서 송도원 들판의 소를 만나자, 그는 그 굶주린 허기를 메우기 위해 매일이면 매일 소와 함께 사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 동경에서 그리워하며 상상 속에 떠올렸던 뼈대만 남은 소와 귀국해서 송도원 들판에서 다시 만난 소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송도원의 소는 뼈보다는 근육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제 이중섭은 상상 속에서 키워온 자신의 정신적인 소에게도 살을 찌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도원 들판의 소에 비하면 이중섭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소는 송아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소처럼 들판을 헤맸고, 황소가 먼 산바라기를 하며 울듯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호수 같은 눈으로 황소가 눈물을 흘릴 때 그도 따라서 울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이중섭은 완전히 소에 미친 사람이었다. 어떤 농부는 그를 소백정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어떤 소 주인은 그가 소도둑인줄 알고 가가운 주재소에 신고를 해 곤욕을 치르게 만든 적도 있었다.
당시 이중섭은 원산 광석동에 있는 창고에 화실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하루 종일 송도원 들판에 나가 소를 관찰하다 돌아온 그는, 화실 속에 틀어박혀
밤새도록 황소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잘 안 될 때면, 이중섭은 소주를 마셨다. 천장의 높이가 6미터나 되고 화실 크기가 30평이나 되는 휑뎅그렁한 공간에서, 그는 마늘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소주 속에 마늘 조각을 넣어두고, 그걸 안주로 해서 술을 마셨다.
이중섭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찾아왔지만, 그는 그런 친구들도 잘 만나지 않았다. 아예 화실 문앞에 '제작중'이란 딱지를 붙여놓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다만 조카 이영진만은 화실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이중섭은 조카에게 자주 목탄이나 물감 등 그림에 필요한 물품들과 중국빵을 사오도록 심부름을 시키곤 했던 것이다.
아직 나이가 어린 조카 이영진은 중국빵 먹는 재미 때문에 삼촌의 심부름을 발벗고 나서서 해주었다. 그런데 이중섭은 조카가 사온 중국빵을 간식으로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림 그리는 데 쓰려는 것이었다.
"얘, 영진아! 이렇게 하니까 참 멋 있지?"
이중섭은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고 나서 빵조각을 뜯어 화면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 아까운 빵을 왜 검댕이를 칠해서 못먹게 만들어요?"
조카 이영진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헤에, 영진아! 이 세상은 빵만으로는 살 수가 없단다. 이 삼촌은 빵보다 예술을 먹고 산단다. 빵은 잠시의 배고픔을 잊게 해주지만,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워서 영원히 살게 해준단다. 이런 중국빵으로 우리 인간의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니?"
이중섭은 까만눈을 깜빡이는 조카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그럼 삼촌은 하느님이네? 기적을 낳는 사람이니까."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조카 이영진의 말에 이중섭은 바보처럼 헤벌쭉 웃었다.
조카가 떠나고 나면 화실은 갑자기 공허해지기 마련이었다. 이중섭 혼자서 30평의 넓은 공간을 이겨낸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림이 잘 안 되면 소주를 마시고, 소주를 마셔도 괴로울 때면, 그는 편지를 썼다.
괴로울 때마다 이중섭의 눈앞에 와 어른 거리는 것은 일본 동경에 있는 마사코의 얼굴이었다. 그는 엽서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그녀에게 부쳤다. 소도 그리고, 생선도 그리고, 바다도 그렸다.
특히 이중섭은 마사코가 그리울 때마다 원산항으로 달려가곤 했다. 항구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그래도 꽉 막혔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곤 했던 것이다. 바다는 이중섭과 마사코를 이어주는 하나의 길이었다. 바다를 건너가거나 건너와야만 그들은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바다야말로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보내는 우편엽서에다 빨리 와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그녀 쪽에서는 올 형편이 아니었다. 그쪽의 부모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중섭은 괴로웠다. 자신이 일본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태평양 전쟁이 하루 뒤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중섭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구 몸부림을 쳤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는 마사코를 아예 잊으려고 했다. 그리고 일부러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는 당시 유명한 무용가였던 최승희의 제자와도 가깝게 지낸 적이 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큼 열정이 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1945년 4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마사코가 부모 곁을 떠나,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이중섭에게로 달려왔다.
이중섭은 그런 마사코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늘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에 일본에서 날아오는 소식을 시시각각으로 듣고 있었다.
바로 그 즈음 시모노세키에 정박한 한국의 정기 연락선 '금강환'이 미군 잠수함의 어뢰를 맞아 침몰했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중섭은 이제 영영 마사코를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꿈에도 그리던 마사코가 이중섭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서로의 만남은 반갑기 그지 없었지만, 그들은 사랑의 표현을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마사코는 정기연락선이 끊기자 곧바로 하카다에서 임시 연락선을 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연락선이 일본과 한국을 잇는 마지막 배였다. 그녀는 곧 부산에 내렸고, 4일이나 걸려 경성에 도착했다. 일단 조선호텔로 갔으나 빈 방이 없어 그 근처 여관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곧 조선호텔로 가서 원산에 있는 이중섭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어 만나게 된 것이었다.
급히 경성으로 달려와 마사코를 만난 이중섭은, 그러나 어눌하기 그지 없는 말투로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참으로 용케도 왔네요. 연락선이 끊어졌다던데?"
"하카다에서 겨우 임시 연락선을 탈 수 있었어요."
마사코는 역시 수줍음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 무척이나 그리워했지만, 막상 만나고 나서는 그런 그리움을 행동으로 표현해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두 사람 다 순진했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순수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마사코와 함께 원산 집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우선 어머니에게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간청했다. 어머니의 결혼 승락은 어렵지 않게 떨어졌으나, 그는 형 이중석의 허락을 받아내는 일이 걱정되었다. 그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형에게 용기를 내어 말했다.
"마사코는 일본 여자지만 조선 여자나 다름 없습니다. 참한 여자입니다. 부디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중섭의 말에 형 이중석은 의외로 선뜻 경쾌한 웃음까지 보이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네가 사랑하는 여자니까 완벽한 조선 여자로 만들 자신이 있겠지? 내 지금까지 네가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겨왔다만, 네가 만약 저 여자를 조선 여자로 만들 수만 있다면 나는 찬성한다. 어찌 유쾌한 일이 아니겠느냐?"
마사코가 한국에 온지 한 달만인 1945년 5월에, 이중섭은 사모관대를 썼다. 그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아내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고쳐 '이남덕'이라 지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의 덕이 많은 여자란 뜻이었다.
신부 이남덕은 조선식으로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양볼에 연지곤지를 찍었다. 영락없는 조선 여자였다. 신부는 신랑에게 큰절을 했고, 이날 시인 양명문이 결혼 축시를 낭송했다. 화가, 음악가, 문인 친구들도 많이 와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이남덕은 시어머니인 이중섭의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그리고 시아주버니가 되는 이중석에게도 시아버지 대하듯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면서 차츰 조선의 풍습을 익혀나갔다.
얼마 안 가서 어머니는 아들 이중섭 부부가 따로 살림을 나도록 해주었다. 새로 마련한 살림집은 같은 광석동으로, 산마루에 위치해 있었다. 방이 셋이었고, 마당이 넓어서 그 한켠에 닭장을 짓고 양계를 했다.
이중섭은 닭을 키우면서, 자연 닭을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닭은 곧 그의 그림 소재가 되었다. 그는 너무 닭을 가까이 하다가 닭의 깃털에 기생하던 이가 옮아 고생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어떤 그림 소재에 관심을 가지면 적극적으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었다.
신혼살림에 한창 재미가 들 무렵인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그날 이중섭은 아내에게 말했다.
"남덕! 일본이 항복을 했다."
그 때 이남덕은 일본 동경에 있는 부모를 생각해 눈물을 흘렸다. 이중섭은 그런 아내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해방이 되자 이중섭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수닭처럼 활기를 되찾았다. 그는 서울에서 열리는 해방 기념 미술전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그러나 원산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과 제대로 연락이 안 돼 시일을 놓쳤다.
작품을 출품하지는 못했지만, 이중섭은 오랜만에 서울에 모인 화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만도 즐거웠다. 마침 그 때 술마시는 자리에서 화가 최재덕이 이중섭에게 미도파 지하실의 벽화를 함께 그리자고 제의해 왔다.
"좋지. 암, 좋구말구."
이중섭은 쾌히 승락했다.
그 때 그 벽화의 밑그림을 이중섭이 그렸는데, 복숭아 나무에 아이들이 매달려 있는 그림이었다. 여러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그려진 일명 '군동화'였다.
1946년은 이중섭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픈 해였다. 3.8선이 그어진 후 당시 원산에는 공산주의 체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대지주였던 그의 형 이중석은 원산 내무서에 갖혀 있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당했다. 형의 이 같은 죽음은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이중섭의 아내 이남덕은 첫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 아이는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한 팔삭동이였다. 그 아이의 불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그 아이가 디프테리아에 걸리고 만 것이었다.
첫아들을 낳은 기쁨은 잠시였다. 이중섭 부부는 곧 비탄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아이는 이 세상에 나온지 채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 날 마침 이중섭은 서울에 갔었다. 아내 이남덕은 혼자서 죽은 아들을 안고 울었다. 울다가 지친 그녀는 오래도록 그 아들의 얼굴을 간직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녀는 남편이 쓰던 화구들을 꺼내놓고 죽은 아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울에 갔던 이중섭이 돌왔을 때, 이남덕은 자신이 그린 죽은 아들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내의 그림에 감탄을 했다.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아내의 그림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은 내 작품과 견줄만한데?"
이중섭은 아들의 죽음으로 슬픔이 북받쳐 올라왔지만, 애써 아내 앞에서 슬픈 표정을 감추었다.
마침 그 때 이중섭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 동경 유학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는 시인 구상이 달려왔다.
"나가서 술이나 마시세."
이중섭은 구상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날 술좌석에서 이중섭은 아무나 붙들고 농담을 하고, 술집 여자들에게 주정을 부렸다. 구상은 같이 술을 마시면서도 어떤 위로의 말로 친구의 슬픔을 달래줄지 몰라 그저 잠자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 가세나. 우리 집에 가서 우리 아들과 마누라와 함께 자세나."
술집을 나선 이중섭은 그러면서 구상의 팔을 잡아끌었다.
술김에 구상은 이중섭의 집에 가서 식구들과 함께 한방에서 잠을 잤다.
다음 날 새벽녘에 방안에 불이 켜져 있어서 잠을 깬 구상은, 이중섭이 홀로 일어나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본 구상은 흠칫 놀랐다. 이중섭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림 그리는 데 몰두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놀라움은 잠시였고, 구상은 드디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들이 죽었는데 그 아버지가 슬퍼하기는 커녕, 술이나 진탕 마시고 또 뭐가 좋아 싱글벙글 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봐! 중섭이! 자네 그게 무슨 짓인가? 대체 뭐가 좋아 싱글벙글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구상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따지고 들자, 이중섭은 바보처럼 헤에,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림을 그리구 있네. 우리 아들 천당에 가면 얼마나 심심하겠나? 그래서 동무하고 놀라구 꼬마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지."
구상은 문득 놀라 이중섭이 그리고 있는 그림에 눈길을 주었다. 그림은 여러 장이었다. 그는 그 중 한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 이것은 뭔가?"
"응, 그거? 천도복숭아야. 우리 아들 하늘나라에 가서 따먹으라구 그린 거지, 헤에."
구상은 이중섭의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성질이 지독해도 아들이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 그는 결코 고운 눈길을 보내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이중섭은 아들의 시체를 송판관에 넣어 광석동 뒷산으로 지고 올라갔다. 구상도 장례 치르는 걸 도와주기 위해 같이 따라갔다.
이중섭은 흙구덩이를 파고 아들 시체를 묻을 때 집에서 가지고 온 작은 불상과 동자상이 그려진 도자기들과, 구리고 자신이 새벽에 일어나 그린 그림들을 함께 넣어주었다.
"잘 자거라, 우리 아가야!"
이중섭은 흙구덩이를 메우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 때까지 그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아들을 땅 속에 묻고 집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그 때서야 아내가 그린 아들 그림을 부둥켜 안은 채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참고 참았던 울음이 뒤늦게 북받쳐오른 것이었다. 그걸 본 구상도 울었고, 울다 지쳐 눈물조차 말라버린 이남덕도 다시 울었다.
한참을 소리내어 울고 난 이중섭은 문득 서럽게 울고 있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헤에, 그만 울어요."
이중섭의 얼굴엔 금세 장난끼가 어렸다. 그는 살금살금 다가가 우는 아내의 옆구리를 마구 간질렀다. 그러면서 쒩쒩대고 그 특유의 노란 수염을 흔들며 마음껏 웃어제꼈다. 우는 아내를 달래보려고, 그는 짐짓 그런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이었다.
당시 이중섭은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살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이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아들이 죽은 후에 이중섭은 우편엽서를 수백 장씩 구해다 아이와 물고기 그림을 수도 없이 그려댔다. 그는 아들을 잃은 데 대한 슬픔을 그런 식으로 달랬던 것이다.
그 후 평양에서 있었던 해방기념 미술전에 출품된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는, 이중섭이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그렸던 그림들 중의 하나였다.
그 무렵 이중섭은 양계를 하면서 닭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가 즐겨 그린 '투계도' 역시 그 당시의 그림이었다. 그의 집 양계장에서는 닭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수탉끼리 싸우는 걸 보면서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이중섭의 닭싸움을 소재로 한 그림을 보고, 공산주의자들이 특히 극찬을 했다. 농민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공산주의 사상이 그 그림 속에 들어 있다고 그들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었다. 성난 소, 성난 닭, 성난 까마귀떼 등의 그림은 그런 오해를 받기에 충분할만큼 굵은 선과 속도감 있는 힘찬 필치로 그려져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러면서 이중섭에게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이중섭은 원산 문학가동맹에서 펴낸 해방 기념 시집 '응향'의 표지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 '응향'이라는 시집에는 시인 구상의 시도 실렸는데,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반동의 표적으로 찍혔다.
"중섭이! 난 남쪽으로 가려네. 우리 같이 가세."
친구인 구상이 이렇게 말했지만, 이중섭은 선뜻 따라 나서지 못했다.
형이 죽고 없었기 때문에 이중섭은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 형수, 그리고 조카들을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탄압을 받더라도 여기에 남을 수밖에 없네."
결국 이중섭은 공산주의자들의 괴로핌을 견뎌 내며서 원산에 남았다. 그는 살아남기 위하여 북조선 미술동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중섭 역시 구상처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그는 그들이 김일성의 초상화를 영웅적인 분위기가 감돌게 그리라는 것을 거절했다. 또 당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자, 그 유명한 구레나룻을 없애고 그려 문책을 받기도 했다.
이중섭은 일부러 '투계도'를 그릴 때도 털이 다 빠진 힘 없는 닭을 그려서 북조선 미술동맹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어느 날인가는 소의 엉덩이 위에 올라탄 두 소년 그림을 보고 한 공산당원이 그에게 물었다.
"이 동무! 이게 대체 무슨 그림이오. 어디 한 번 설명을 해보시오."
"그림은 설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오. 감상하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이란 말이오."
이중섭은 어처구니 없는 질문에 화가 났다.
"인민이 알도록 그려야지. 그린 사람도 설명을 못하는 걸 어찌 예술이라 할 수 있소?"
그 공산당원은 한 술 더 떴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이 소는 우리나라를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준 소요. 이 아이들은 장차 우리나라의 미래를 뜻하구요."
"그럼, 이 아이들 중 어느 것이 북조선이요?"
이중섭은 어거지의 말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공산당원에게 질려 버렸다.
그러나 이중섭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는 아들 둘을 낳았던 것이다. 첫아들은 죽었지만, 그 이듬해인 1947년에 둘째아들 태현이,그리고 2년 뒤인 1949년에 셋째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공산주의 세상이 된 이후 원산 광석동 사람들은 이중섭이 일본 여자와 함께 산다고 해서 '친일파'라고 비난을 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그는 술에 잔뜩 취해 돌아와 '남덕아! 남덕아!'하며 아내 이름을 부르며 울곤 했다.
그래도 이중섭 부부에겐 금쪽 같은 두 아들이 삶의 희망이었다.
어떤 때는 네 식구가 어른이고 아이고 없이 발가숭이가 되어 이불 위에서 딩굴며 지내기도 했다. 그럴 때 이중섭은 발가벗은 채로 두 아들을 웃기게 하려고 소 흉내를 내며 엉금어금 방바닥을 기어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들은 깔깔대며 마구 웃어대곤 했던 것이다.
피난 시대
난민 수용소의 겨울
전쟁이 났다. 1950년 6월 25일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었으나, 이중섭은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남한이 북침을 한 것으로 알았다.
전쟁 초기에만 해도 원산은 조용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서 포성이 점점 북쪽으로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유엔군이 참전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소문은 틀리지 않았다. 곧 원산 상공에 유엔군 전투기 편대가 날아와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광석동 이중섭의 집은 비행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는 일단 아내와 두 아들을 어머니, 형수, 조카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이중섭은 간단한 화구를 챙겨들고 석왕사 뒤의 학이리 산중에 있는 폐광으로 몸을 숨겼다. 전에 금을 캤다는 그 폐광 굴 속에서 그는 친구 화가들과 함께 숨어서 그림을 그렸다.
하늘에선 비행기의 폭격이 있었고, 지상에선 육군포대의 포격이, 그리고 바다에선 함포사격이 작열했다. 원산 일대는 금세 쑥밭이 되어 버렸다.
이중섭은 이러한 포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폐광의 어둠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제대로 될 리 없었지만, 함부로 밖에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선 그림 그리는 것 외에 따로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는 실정었다.
연일 계속되던 포격 소리가 멎었다. 너무 조용하다 싶어 폐광 밖으로 나와 본 화가 한 명이 소리쳤다.
"중섭 형! 저길 봐요. 태극기가 보입니다."
이중섭은 그림 그리던 붓을 팽개치고 굴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건 국군이다. 틀림없는 국군이야."
굴에서 튀어나온 또 한 명의 화가가 소리쳤다.
이중섭도 군군의 행렬을 보았다. 도로에 뿌연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그군용 지프도 보였다.
"내려가자. 더 이상 이 굴 속에 숩어 있을 이유가 없어!"
이중섭도 소리쳤다.
"그래, 이 굴 속에서 굶어죽느니, 어니 내려가서 국군들에게 도움이라도 청해 보자."
나머지 화가들도 이중섭의 말에 동의했다.
이중섭 일행은 다시 폐광으로 들어가 화구들을 챙겨들고 산을 내려왔다. 그들을 보고 국군 지프가 멈추었다.
"당신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오?"
군인들은 이중섭 일행을 의심으로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후퇴하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공산당원쯤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화가요. 포사격을 피해 잠시 폐광에 숨어 있다가 나온 거요."
이중섭이 말했다.
군인들은 이중섭 일행의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했다. 휴대품 중 의심이 갈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군인들은 좀처럼 의심을 풀지 않았다.
일단 이중섭 일행은 군인들과 함께 원산 시내로 돌아왔다. 시내에 들어와 다시 한번 검문을 받았다.
마침 그 때 군인 중에 이중섭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오산중학교 당시 같이 하숙방을 쓰던 후배 김창복의 친구 조일태였다.
"아니 중섭 형! 이게 어찌된 일이오?"
조일태는 유엔군 통역관이었다.
"사정이 그렇게 됐네."
이중섭은 그 동안의 경위를 조일태에게 털어놓았다.
이렇게 해서 이중섭을 위시한 화가 일행은 빨갱이로 몰려 즉결 총살형을 받기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군대에서 풀려난 이중섭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던 가족을 데리고 일단 광석동 집으로 돌아왔다. 포격에 반쯤 쓰러지다 남은 집은, 대충 방을 수리해 군대가 작전 본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중 다행으로 마침 방 하나가 그대로 비어 있었다. 이중섭은 가족 일행과 함께 한방에서 기거했다.
원산에 머물러 있던 국군은 10월 들어서면서 북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11월이 되자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밀어 닥친다는 소문이 돌았다. 12월 혹한과 함께 흥남 일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흥남에 머물던 미군이 철수를 한다는것이었다.
흥남과 가까운 원산도 예외일 순 없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어머니가 먼저 이중섭을 불러 말했다.
"나는 여기 남아 있겠다. 그러나 너는 남쪽으로 떠나거라. 네 형과 같은 죽음을 내 눈으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영진이도 함께 데리고 가거라."
너무 단호한 어머니의 말이라 이중섭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조카 이영진은 당시 원산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그러니 같이 데리고 갈 수 있었지만, 형수와 나머지 조카들은 어머니와 함께 원산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로 했다.
"어머니, 이 그림들을 잘 보관해 두세요. 다시 어머니를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중섭은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그는 어머니가 앉아 있던 자리의장판 조각을 뜯어 그 짐 속에 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쟁 마당에 만약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체취가 묻은 장판 조각을 가지고 가고 싶었다. 그 장판은 어머니가 손수 정성드려 기름을 먹인 것으로 꽤나 의미가 깊은 것이었다.
이중섭은 아내 이남덕과 두 아들, 그리고 조카 이영진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화가 한상돈 가족과 김인호가 그들 일행과 합류해서 원산 부두로 향했다.
1950년 12월 6일 저녁 무렵, 이중섭 일행은 원산 부두에 도착해 남쪽으로 떠나는 배를 교섭했다. 그 시각에 원산 부두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타고 갈 배는 적었고, 피난민은 너무 많았다.
원산 부두에는 퇴각하는 미 해병대 군인들을 태운 선박만 있을 뿐 피난민을 배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중섭 일행은 미군들에게 배를 태워달라고 사정했지만 매번 거절만 당했다. 그는 어머니를 두고 온 터라 마음이 매우 착잡해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미군들에게 거절을 당할 때마다 그는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원산항에는 제1부두에서 제4부두까지 있었다. 이중섭 일행이 제4부두까지 갔을 때는 이미 피난민들이 배를 얻어타는 걸 포기한 채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날씨도 추운데다 밤이 이슥하게 깊어가자 일단 내일을 기약하고 잠자리부터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중섭 일행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군인들에게 배를 태워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 때 마침 한국인 해군 병사 하나가 물었다.
"당신들은 예술가입니까?"
이중섭을 비롯한 화가 두 명의 머리 모양과 옷차림을 보고 대충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
"네,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입니다. 한 번 사정을 봐주십시오."
그 때는 비굴이고 뭐고 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할 사정이었다. 그러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중섭 일행은 그 해군 병사에게 사정을 하며 매달려 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해군 병사는 잠시 후 해군 문관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 역시 한국군이었다.
"아니, 이중섭 선생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그 해군 문관이 이중섭의 얼굴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그렇소만."
이중섭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런 곳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앗던 것이다.
"일행이 몇 명입니까?"
"총 아홉 명이오."
해군 문관은 좀 난처한 듯 생각에 잠겼다가 흔쾌히 말했다.
"타세요. 제가 책임질테니까요."
이중섭 일행은 뛸듯이 기뻤다.
"정말 고맙습니다."
배에 오른 이중섭 일행의 말에, 그 해군 문관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한민걸이라고 합니다. 원래 원산 사람인데, 해방 직후 월남했지요. 원산에서 이중섭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 간첩 아닌가요? 그 전에는 먼빛으로만 뵈었는데,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이렇게 도와주시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중섭은 한민걸의 그런 호의가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드디어 배는 12월 6일 저녁 9시 정각에 원산 부두를 출발했다. 배 안에는 해군 병사들 이외에 피난민 1백여 명이 타고 있었다. 배는 곧 시커먼 바다 위에 표류된 듯 겨울 바람을 가르며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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