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홈페이지 ... http://bull.new21.org/
초상화
종이에 연필, 48.5×31cm, 1955년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히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됨으로써 또 다른 면모를 알 수 있다.
☆ 여인 ☆
'대향'이란 서명을 처음으로 쓴 작품이라 합니다.
모델은 후에 그의 아내가 된 사람이랍니다.
엽서 말고는 몇점 안되는, 그의 초기작입니다.
이중섭이 마사코와 매우 가까워진 시기에 그녀를 그린 그림이 <여인>이다. 오른쪽 젖가슴과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두 갈래 머리카락의 한 가닥을 오른쪽 팔에 걸치고 그 일부분을 손가락으로 쥐게 함으로써 화면에 생기를 부여했다. 또한 전체적으로 곡선이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상체는 벗고, 허리 부분에서 치마를 걸쳤는데 고갱의 타히티 시절 그림에 등장하는 멜라네시아 열도 문화권에서 입는 사롱과 흡사하여 그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마사코는 손과 발이 다소 큰 것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내가 만난 이중섭(李仲燮)
- 김춘수-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 남천(南天), 근역서재, 1977 >
[아내에게 보낸 편지]
글 사이사이에 그림을 곁들였다. |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통영에서 그려진 대표작의 하나가 바로 새 그림이다. 흔히 <부부>라는 제목으로 통칭되고 있다. 그러나 이중섭의 서울 개인전 목록에는 <부부>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새들>이나 <애정>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는데 아마도 이 제목 중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 <봉황>에 등장하는 새는 흔히 닭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봉황이다. 이중섭이 닭을 자주 그린 것은 사실이나 이 그림에 등장하는 새를 자세히 보면 털이 없는 목을 하고 있으며 아래쪽의 새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흡사한 꼬리털을 하고 있다. 닭이 아니라 봉황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그림을 가리켜 부부를 그린 것으로 꼬집어 규정하거나 헤어져 있는 아내를 만나고 싶은 열망을 표현한 것으로만 해석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 얼핏 보면 새들이 공중에서 정겹게 어울리고 있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정황임을 알 수 있다. <봉황>을 비롯하여 비슷한 설정의 그림은 모두 위쪽에 수컷새가 그려져 있는데 화면 너머 무엇인가에 긴박(緊縛)된 듯 허공에 매달려 더 이상 내려오기 불가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래쪽에 그려진 새 역시 날개를 끊임없이 파닥거리고 있지만 다리조차 땅에서 떼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다. 다리가 엿가락처럼 축 늘어져 있다. 두 마리의 새는 서로 만나려 애쓰나 도무지 만나기 어려워 보인다. 아니 서로 만날 수 없는데 애를 쓰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겨우 입만 대일락말락한 상태인 것이다. 봉과 황이 만나고자 하나 그렇지 못하듯 실제로 이중섭은 아내와 결합하려고 애썼으나 결국 헤어진 채로 죽고 만다. |
[판잣집화실]
일본에 헤어져 있는 가족에게 보낸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9월에는 판잣집을 지어 혼자 지냈다. 이 무렵 이중섭은 일본의 가족에게 쓴 편지와 함께 <판잣집 화실>을 그려 보냈다. 이 그림은 종이에 펜으로 그리고 수채물감으로 색을 입혔는데, 당시 이중섭이 살던 집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강아지가 웅크리고 있는 스산한 집 밖을 차가운 색으로 표현하였고, 그와 대조적으로 가난한 한 칸 방안은 따뜻한 느낌의 진한 노랑색으로 칠하였다. 자신이 생활하는 작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집의 한쪽 면을 자른 듯이, 또는 투명한 벽을 통해 들여다보듯이 표현하였다. 방안에 누워 있는 이중섭은 쾌활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몸 전체는 건강함이 느껴지는 주홍빛으로 칠해져 있다. 그림 속 인물은 그림을 다 완성한 후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낼 편지까지 써놓고 이제 하루의 일을 다했구나 하는 흡족한 표정으로 누워서 담배를 물고 있는 것 같다. 이 방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은 굴뚝의 연기로 피어오르는데 이 올라간 연기로 인해 차가운 하늘까지 밝게 느껴진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났으므로 일본을 오가기가 더욱 쉬울 것이라 여겼을 터였다. |
[이중섭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
세상에서 제일로 상냥하고(?) 나의 소중한 사람, 나의 멋진 기쁨이며 한없이 귀여운 나의 남덕군.
따스한 마음이 가득 담긴 9월 9일자 편지 고마웠소.
내 편지와 그림을 그토록 기뻐해줘서 ......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꽉차 있소.
책방의 돈 문제는 아고리가 떠날 때는 완전히 해결이 될 테니 염려 마시오.
태현이의 공부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요.
아빠가 가면 ...... 꼭 공부에 재미를 붙이도록 지도를 해줄 테니까 ...... 남의 집 아이는 아빠가 지도를 해주는데 ...... 싶어 너무 성급하게 무리를 하면 소중한 당신의 몸만 해치게 되오.
즐겁고 밝게 그리고 천천히 한 가지씩 노는 것보다 아빠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울 테니 ...... 그 때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싫증이 나지 않도록 지도해주구려.
학교 공부란 생활해가는데 있어서 약간만이 필요할 따름이오.
전부가 아니잖소?
당신과 나의 소중하고 믿음직한 두 아이들은 반드시 훌륭한 정신을 갖고 인생을 살아갈 가장 훌륭한 자식들이라고 믿고 있소.
무엇보다 귀여운 마음의 아내 남덕군, 더욱더 밝고 마음 편히 모든 일을 처신해주기 바라오.
당신을 가장 행복한 천사로 만들어 보겠소.
안정을 지켜서 어서어서 건강을 되찾아 주오.
아빠는 당신과 두 아이들을 가슴 가득 채우고 더욱더 힘을 내어 열심히 제작하고 있소.
이제 한고비만 참으면 되오.
바짝 힘을 냅시다.
아빠 중섭
[어린이를 주제로 한 그림들.. 이중섭]
은박지화
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굵어 새긴 위에 물감을 바른 뒤 이를 닦아내 긁힌 부분에만 물감을 먹게하는 효과를 보았다. 이러한 방법은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우리 미술의 특징의 하나로 내세운 상감기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에서의 개인전 목록에는 은지화들이 빠져 있지만, 그는 당시 50여점의 은지화를 출품했다고 한다. 오산 학교의 스승인 임용련의 부인이고 역시 화가인 백남순이 회상한 바에 의하면 화가는 오산 시절(사춘기 정도의 나이)부터 이 방법으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법은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것이라 늘 그리기를 갈망하던 이중섭에게 만족을 줬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다음에 할 작품들의 밑그림으로 쓰이기도 한 것 같다.
봄의 어린이
다섯 아이와 끈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바닷가의 아이들
두 어린이와 복숭아
연꽃밭의 새와 소년
연꽃밭의 새와 소년
물놀이하는 아이들
Let It Be...숙명 가야금 연주단
1916년
4월 10일 평남 평원군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사이의
막내로 태어나다.
1920년
5세가 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시작하였다.
1923년
마을의 서당을 다니다가 8세에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가서
종로보통학교에 입학. 선구적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초등과정을 같이 지내며 그 집에
가서 김찬영이 쓰던 화구와 미술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1929년
14세 초등과정을 졸업하고, 평북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중등 과정 내내 소를 즐겨 그려서 학생들과 하숙생
사이에서 소에 미쳤다는 평을 받았다.
1931년
16세 미술과 영어 과목의 교사로 부임한 유화가 임용련과
그의 부인 백남순에게 미술에 대 한 재능과 열의가 인정되
어 집중적인 지도를 받게 되었다.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린다. 이후 내내
한글 풀어쓰기로 이름 쓰기를 실천한다.
1935년
20세에 몇몇 동급생과 공모하여 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낡은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불을 지름. 졸업기념
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가 일었고 사진
첩은 취소 되었다. 졸업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사립 테이
고쿠 미술학교에 입학.연말에 다친뒤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
1936년
21세 사립 예술대학인 분카 가쿠잉으로 옮김. 이규상등이
동기,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인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다고 함. 피카소와 루오에 심취하여 이들의 그림
을 모방하여 교수가 힐난한데 항의하기도 함. 실제로 학교
에서는 배운 것이 없고, 상급생인 문학수를 통해서 알게된
화가 쓰다 세이슈에게 오가면서 배운것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회고하기도 함. 쓰다에게서 사숙하던 송혜수를 알게됨
1938년
23세 5월 일본인 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 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에 응모하여 입선 하고, 협회상을 받았으며,
문학수와 함께 일본의 여러 평지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반다. 조선인 출품자는 김환기, 박생광, 유영구, 주현이다.
이 무렵 같은 과의 후배인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졌다.
1940년
5월에 공모전에 <누운 여자>, <소의 머리>, <서있는 소>,
<작품1>, <작품2>를 출품하다. 10월 경성에서 열린 제4회
공모전에 <서있는 소>, <망월>, <소 의 머리>, <산의 풍경>
을 내어 길진섭, 김환기, 진환으로부터 찬사를 받다. 연말에
원산 에 머물면서 마사코에게 그림으로만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
1941년
26세 3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활동하던 조선인 유화가
김종찬, 김학준, 문학수, 이쾌대, 진환, 최재덕과 조선신미
술가협회를 결성하고, 5월에 창립전을 가짐. 이 무렵 이쾌대의
형과 그를 통해 알게 된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가르침과 형의
우리 문화재 수집 활동에 영향을 받아 휴가차 귀가 하면 개성
박물관에 다니면서 스케치에 몰두 4월 5번째 공모전에 <망월>과
<소의 여인>을 출품. 회우로 추대됨.
1942년
6번째 공모전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지일
(遲日)>들을 출품하다. 이 무렵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이
상향'이라는 뜻의 "대향"으로 고치다.
1943년
28세 3월 7번째 공모전에 이대향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에서
<소묘6>과 <망월>, <소와 소 녀>, <여인>을 출품. 이 해 말
평양 체신회관에서 평양출신의 화가들인 김병기, 문학수,
윤중식, 이호궁, 황염수와 6인전에 참가. 이 후 그림을 그리
면서 징병이나 정용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일하기도 함.
연필화 <소년>, <세 사람>은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1945년
30세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와 5월 결혼함.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 다. 최재덕과 지금의 미도파
백화점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림.
1946년
2월 조선예술동맹의 회원부원이됨.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
가 되었으나 금새 사직. 닭을 키우며 이를 그리는데 열중하여
이가 옯아 고생하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원산문
학가동맹 소속의 구상등이 펴낸 공동시집"응향(凝香)"의 표지
에 어린이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다. 이로 인하여 이듬해
이 책에 실린 시들이 복고적이고 반동적이라 하여 북조선문학
가동맹의 규탄을 받을 때 같이 거론되기도 함. 이 무렵 화가
김민구, 이호궁, 한 묵등이 자주 들렀고, 화가 지망생 김영환,
김종식 등이 찾아와 그림 품평을 받기 시작함.
1947년
32세 6월 친구 오정환의 시집 "나 사는 곳"의 속표지를 그림.
평양에서 열린 8.15기념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내다.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음. 아들 태현 태어남.
1949년
34세 봄 태성 태어남.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함. 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 소 주인에 게 고발당함. 원산에서 열린
전시회에 함께 출품한 것이 인연이 되어 화가 박수근과 사귐.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친일파라는 지목을 받다.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자주 술을 마심.
1950년
6월 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다.
10월에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됨. 12월 초
미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위협에 부인과 두 아들, 장손인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감.
1951년
36세 부산에서 제주까지 배편을 제공해 준 선주가 사느 서귀포
까지 여러날을 걸어서 도착하여 그 집에서 두 달간 머물다.
<피난민의 첫 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것임. 이곳에서 그린
그림으로는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다.
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 부인과 아이들이 영양부족으로
병이 드는 등 곤란이 계속되었으므로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
갔다가 곧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친정으로 감.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엽서가 시작됨. 박고석, 손응성, 한묵과
기조동인을 결성하고 전람회를 염.
1953년
38세 부인이 남편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일본을 왕래하는
선원인 오산의 후배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거액의 빛을 지게
됨. 3월 제3회 신사실파전에 2점의 <굴뚝>을 출품. 유영국,
장욱진의 그림과 함꼐 수상하다고 하여 계엄기관의 조사를 받다.
8월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다리던 끝에 일시 체류 허가를 얻어
일본으로 갔다가 곧 돌아옴. 이것이 가족과 마지막 만남이 되다.
유강렬의 제의를 받아 통영으로 가서 안정을 얻게 되어 풍경화
등을 제작하고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다. <흰 소>, <황소>는 이
때의 작품임.
1954년
39세 봄에 함께 공모전에 함께 출품한 인연이 있는 화가 박광생
의 초대로 진주에 머물면서 제작하고 이를 다방에서 전시.
서울로 가서 6.25 4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링
대한 미술미협전에 <달과 까마귀>외 2점을 내 호평을 받음.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유화 40여점. 은지화를 비롯한 그림을 비롯한 소묘 50여점을
내다. 전시는 호평을 받았으나 당국은 은지화를 춘화라고 하여
철거하도록 했으며 그림값을 떼이기도 하고 술로 지내다가
빈털털이가 됨으로써 자학과 기진맥진에 빠짐. 5월에 미국공
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짐. 저조한 실적, 영양 부족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 성가병원 정신과에 보내져 1달여 입원. 거식증
등의 증상으로 정신병자라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반박하기
위하여 연필로 자화상을 그리다. 곧 서울로 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다시 정신병원으로 다시 보내졌다.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 이 때 간장염에 금물인 술을
계속마셔 화달이 심해짐.
1956년
41세 영양 부족과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 대구전을 관장한 미국인 맥타가트에 의하여
미국 모던 아트 뮤지엄에 기증된 은지화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다. 9월 6일 지켜보는 사람없이 홀로 숨을 거두다.
3일 뒤 이를 알고 망우리 고동묘지에 묻다.
1957년
이중섭을 따르던 차근호가 새긴 묘비가 세워지다.
1960년
부산 로터리 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
서울 현대 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
이중섭의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
정부에 의해 건국 훈장이 수여됨.
1979년
젊은 시절 애인에게 그려 보낸 엽서, 그림과 일본의 가족
에게 맡겼던 은지 그린을 중심으로 한 전시가 서울, 대구,
부산에서 열리다.
1980년
이중섭이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번역되어 출판
1986년
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림.
1997년
제주도 서귀포시가 이중섭이 살던집을 복원하여 개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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