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40년 그 짧은 예술의 삶]
 
 
 
"화가 이중섭, 시대와 끝내 不和했던 천재"

평생지기 한묵 화백, 눈물의 회고강연




친구 이중섭과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원로화가 한묵씨



지난18일 ‘이중섭과 서귀포’ 세미나가 열린 제주도 서귀포시 KAL호텔.
백발의 노화가가 강단에 올라섰다. 생전의 화가 이중섭(1916~1956)과 일본 유학시절부터 함께하며
평생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냈던 한묵(89) 화백이었다.
30분간 이어진 화단 원로의 강연은 생전의 이중섭에 대한 상투적인 회고가 아니었다.
시대와 불화(不和)했던 외로운 천재의 예술혼을 기리는 절절한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가면서
노(老) 화백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일부 청중들도 손수건을 꺼냈다.

지금은 전설의 화가로 추앙받는 이중섭 화백이지만 살아 생전 그의 그림은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묵 화백은 회고했다. 북에서는 ‘인민의 적’이라고 공격 받았고 남에서는 ‘풍기문란’이란 이유로
그림이 철거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젊은 날의 이중섭은 멋진 외모에 솔직한 성격으로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한 화백은 “중섭이가 권투를 배워 일본인들이 건방지게 굴면 때려주기도 했죠.
여름에 원산 해수욕장에서 팬티 바람으로 서 있을 때 보면 중섭이 체격이 얼마나 근사했다고요.”
일제 말기, 한 화백은 금강산 온정리에 머물렀는데 이때 원산에 살던 이중섭과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중섭이는 골치 아픈 일만 있으면 휙 하고 금강산으로 달려오곤 했습니다.”

한 화백은 이중섭의 예술적 좌절도 곁에서 지켜봤다. “광복 후 당시 예술동맹에서 중섭이 그림을
소련 평론가들에게 보여줬어요. 그런데 이들이 중섭이 그림을 보고 대뜸 ‘인민의 적’이라는 거예요.
소가 싸우고 닭이 싸우는 듯한 그림이 인민에게 공포심을 준다나요. 내용이 틀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중섭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그의 병은 근본적으로 여기서 출발했을 겁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한 화백은 이중섭의 월남 배경을 짐작했다. “이중섭이 표현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지 않았나 싶어요. 북에서는 전시하려고 하면 당 문화부 심사를 받아야 했어니까요.
그림을 전부 이데올로기로만 평가했기 때문에 심사할 때 ‘왜 빨간 꽃이 적냐’는 식으로 트집 잡곤 했지요.”

그렇다고 이중섭이 남에서 예술적으로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피란 시절 한 화백은 이중섭과
부산 남포동에서 ‘콩쥐팥쥐’ 오페라 무대장치를 맡았는데 이때 이중섭의 유명한 ‘은종이 그림’이
탄생했다고 한다. “극단장이 가끔 우리에게 담배를 주곤 했는데 중섭이가 어느 날 변소에서 일 보다가
옆에 굴러다니던 꼬부라진 못으로 담뱃갑 은종이에 그림을 그려봤답니다.

이후 우리가 피우던 담뱃갑도 전부 달라고 해서 열심히 그렸지요.”
이중섭은 은종이 위에다 주로 아이들을 그렸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가족들과 장난치는 내용인데
이게 또 문제가 됐어요. 서울서 은종이 그림을 전시하는데 ‘왜 이리 나체가 많냐’ ‘풍기문란이다’
라는 비난을 받고 그림이 강제 철거당했어요. 중섭이에게는 쇼크였지요.” 한 화백은 이어 “중섭이가
일본 여자와 산다고 눈총도 많이 받았다”며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자포자기 상태에서
술을 많이도 퍼마셨다”고 회상했다.

어느 날 대구에 머무르던 이중섭을 시인 구상이 서울로 데려왔다. “깜짝 놀랐어요, 그 잘생겼던 중섭이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됐을까 하고요. 통 먹질 않고 사람도 몰라보는 거예요.” 거식증에 걸린 것이었다.
한 화백은 친구들과 의논해 이중섭을 당시 육군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까
어느 환자를 꽁꽁 묶어놓고 때려가면서 억지로 음식을 먹이는 거예요.
중섭이도 저런 학대 받는 것 아닌가 싶어 다른 병원으로 옮겼어요. 거기서는 전기 찜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한묵 화백은 이중섭이 거식증에 시달리며 투병 생활을 하던 과정을 자세히 털어놓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한때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던 이중섭은 다시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이어 적십자 병원에서 죽었다.
“화장하고 나니 중섭이는 없어지고 뼈다귀만 남았어요. 그 가루를 반은 처가 있는 일본에 보내고
반은 망우리 묘지에 묻은 뒤 친구들과 비석을 세워줬습니다.”

 

 

 





"이중섭 [1916.4.10~1956.9.6]"







담배를 피우는 이중섭의 모습
 

이중섭 생가

서귀포, 그가 머물렀던 제주 생가 마루에 설치된 이중섭 부조(relief )

 
 
 이중섭, 이요조
 
 
서귀포 이중섭 거리에서 만난 이중섭 미술관,
또 그 속에서 만난 폭풍우의 화가 '변시지'선생님
그 분의 그림을 소개하기에 너무 늦었다.
 
그분의 서울, 돈암동? 개인 미술관도 찾아 보기로 하였는데,
자제분의 관리..전화번호등이 적힌 명함과 책도 두 권이나 받아왔는데도
어려운 숙제처럼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한다.
 
⑥ 이중섭 편에서는 무식쟁이 이요조의 이중섭님 그림을 보고 느낀,
에필로그로 종지부 찍으려 했었는데...
 
변시지님의 그림으로 빨리 옮겨가기위해
⑥ 이중섭은
잠시 접어 두어야겠다.
 
 
아래 여백은 그 마지막 글을 넣기 위해 남겨 두어야겠다.
언젠가 쓰고 싶을 때,
 
다시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분의 그림의 감동이 우러나올 때 
다시 쓰고자 하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