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팅하기에 너무 어렵다.

그렇다고 늘...참 좋은 포스팅을 늘 그저 넘어갈 수는 없고

이 무더운 날 아침부터 선풍기 끼고 앉아 백과 사전 글 그대로 옮겨놓더라도 글을 써봐야겠다.

 

요즘 밀폐공포증이 생겼는지 어쨌는지...

박물관이나 전시관 안에 들어가면 첫째 호흠이 불편하며 갑갑하다.

물론 절전으로 에어컨시설도 아주 미약하지만 갑자기 50명이 들어 간 공간은 훅 찌는 찜통이다.

그리고 만든지 얼마 안되는 박물관이나 전시관 깊숙한 곳은 숨쉬기에 여러가지 냄새와...알지못할 표현하지 못할

갑갑한 면이 없잖아 있어서 이 번 여행에서 박물관이나 전시관 설명은 하나도 따로 들은 게 없다.

여름이라 더 그렇고...인원이 더 많아 그럴 것이다.

해설사를 쫓아 다닐 수가 없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 얼른 벗어나고 만다. 그러니 막상 글을 쓰려니 아는 게 너무나 없다.

글은 쓰지 않아도 되지만...이 여름 나는 스스로 정한 과제를 앞에 두고 낑낑대며 여름을 날 것이다.

무령왕릉!!

내게는 참 어려운 미션이다.

역사선생님은 당숙과 친구로 너무 온유하셨다.

난 그 빌미로 늘 역사책 아래 소설책을 놓고는 지리한 선생님의 학습보다  아예....독서시간으로 바꿔버렸던 옛 시간을 후회하며....

그리고 옛 역사 수업은 정말 지리하고 재미없었다.

이제사 철 드나보다 (나만 그런가?)ㅎㅎ

 

아래 글들은 거의 검색글로 채워졌습니다.

무령왕릉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7번째 발견된 고분이며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 송산리)이다.

지금도 아주 고가로 팔릴 것 같은 고급스런  이 문양의 벽돌들은

왕이 죽기 11년 전부터 512년 이미 굽고 있었다 한다.
묘에는 28가지의 벽돌 무늬가 있는데 연꽃무늬가 가장많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았던 등감과 그 밑에 창문시설까지 설치한 세밀하고 구체적인 공간이다.
무덤방에는 5개의 감실(동감)이 설치되어 있는데 양쪽 벽에 두 개씩 그리고 북벽에 1개가 있다.

사진의 이 벽돌들은 왕능 고분군을 건설하면서 새로 구운 이미지 벽돌로

건물 통로 내부 장식을 한 것이다.

 

사족을 덧붙이진 않겠습니다.

그냥 아름다움을 감상만 하십시오!

 

 

 

왕의 유물

왕의 금제관식 (국보 154호)국보 154호 : 금제관식
국보 156호 : 금제심엽형이식(귀걸이)
국보 159호 : 금제뒤꽂이
국보 165호 : 족좌(발받침)
허리띠
신발
동제수저

 

왕비의 유물

왕비의 금제관식 (국보 155호)국보 155호 : 금제관식
국보 158호 : 금제경식
국보 160호 : 은제팔찌
국보 157호 : 금제수식부이식(귀걸이)
국보 164호 : 두침(베개)
두침(베개), 족좌(발받침)
다리미
신발

 

허리띠, 수문경

베개

목관의 모조품왕과 왕비가 안치된 목관은 일본 규슈지방에서 나는 금송으로 밝혀졌으며, 금송은 일본에서 불단이나 무덤의 꽃으로 사용되며 일본인에게 금송은 신성한 나무로 여겨진다. 무령왕의 관목 과재는 수령 3백년 이상인 거목이었는데 금송은 키가 30미터 지름이 1미터 정도가 보통이다. 금송은 매우 단단하고 습기에 강하여 관재로 최고급으로 여겨지며 일본에서는 지배계층만 사용하였다. 왕의 관은 동쪽에 있고 왕비의 관은 안쪽, 즉 서쪽에 놓여 있었다.

 

무령왕릉 현실 단면의 '석수'

'석수'

석수 (국보 162호)널길의 입구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으며 재료는 응회암제이다. 뭉뚝한 입을 벌렸고 코는 크나 콧구멍은 없고 높은 콧등날이 등뒤까지 계속되었고 그 좌우에 눈과 귀가 있다. 등에는 불룩 튀어나온 긴 무늬가 네 곳에 있고 머리 위 융기 위에는 철제의 나뭇가지모양의 뿔이 패어진 홈에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에 날개모양 갈기가 새겨져 있다. 출토 당시부터 오른쪽 뒷다리는 파손되어 있었다. 이 석수는 중국 한 대(漢代)이래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무덤내부 앞에 세우는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이다. 국보 162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령왕릉의 구조

무령왕릉은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의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반원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굴식 벽돌무덤이다. 돌방무덤은 한성도읍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무덤 양식이며, 벽돌무덤은 6세기초 중국 남조 양(梁)나라로부터 들여온 무덤양식이다. 봉분의 윗부분은 지름 약 20m의 원형 구모양을 가지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무덤 꼭대기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무늬 벽돌과 글자가 새겨진 벽돌 등으로 쌓여진 하나의 방으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천장은 아치 모양이며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꽃모양 창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무령왕은?

무령왕(武寧王, 461년 혹은 462년~523년, 재위: 501년~523년)은 백제의 제25대 국왕으로 성은 부여(扶餘)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고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이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자의 아들이고,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무령왕릉의 지석에 따라 삼근왕과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백제신찬에 따르면 무령왕의 아버지는 개로왕으로 동생 곤지와 부인을 공유했다고 하나 이것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로 보인다.[1] 그는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했으며, 성격이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501년에 동성왕이 위사좌평인 백가의 계략으로 시해되자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재위 20년, 나이 62세에 죽고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였다.

 

즉위와 전쟁
무령왕의 아우이자 전왕(前王)이었던 동성왕은 왕권전제화 시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위사좌병 백가를 위시한 반대파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왕은 오히려 한솔 해명과 함께 502년 정월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하고, 같은 해에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말갈족을 물리쳤고.[4],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였다.[5] 507년 고구려의 지시를 받은 말갈족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에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 전쟁을 통해 세력의 균형이 이룬 무령왕은 가야지역으로도 진출하여 임실, 남원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하여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경남서해안으로 진출하였다.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였다.


[편집] 왕권강화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양서에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왕족을 지방통치에 이용하여 대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왕족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최고 관등급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구 세력을 통제하였는데 직책이 없는 좌평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귀족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있게 분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편집] 외교
무령왕은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령왕은 512년과 521년에 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521년 양 무제(梁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즉위 6년에 왜에 이미보내어진 마나군이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과 교체를 하여 왕족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한편, 일본의 게이타이 천황에게 동경(銅鏡)[6]을 하사하였다.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516년 고안무(高安茂)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민생의 안정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식자(遊食者)들을 구제해 농사를 짓게 했다.


[편집] 붕어
62세에 붕어하여 무령왕릉에 묻혔으며 1971년 음력 7월 공주시의 송산리에서 이 능이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에서는 모두 108종류의 2,906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유물 가운데 입구에서 발견된 왕과 왕후의 지석을 통해 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그의 아내임을 알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최초로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무덤이며 이 무덤에서 나온 수많은 부장품은 오늘날 백제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영왕릉 현실 단면 (출토당시 재현) /실제 출토현장 모습▼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뮬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오수전(엽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고
지석뒤에는 석수(돌로만든 무덤지기)가 입구쪽을 향해 서 있었고
묘실의 관대위에는 왕과 왕비의 장신구류와 수많은 부장유물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한다.

발견된 청자 등 중국 물품들은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무령왕대에 국제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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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역사가 함께 묻힌 왕릉

1500여년 전 만들어진 왕릉이 1971년 발굴되어

40년이 지난  지금은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유적지가 되었다.

 

2011, 7, 06  다녀오다.  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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