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쾅, 쿠르르, 크고 작은 돌들이 굴러 떨어진다. 코끼리 무리가 달려드는 듯하다. 잘 생긴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박사가 펄쩍 뛴다. 가파른 절벽을 내달린다. 성궤가 눈앞에 있는데! 영화 ‘레이더스: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1981)의 한 장면이다. 만약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한국판 ‘레이더스’를 찍는다면 그 주인공은 단연코 <음식디미방>일 것이다. 조선시대 고서적 <음식디미방>은 영화 속 ‘잃어버린 성궤’만큼 330여년 전 주방의 비밀이 가득한 보물이다. 장금이도 탐낼만한 음식의 비법들이 꼼꼼히 적혀 있다. 이 책은 조선 중기 석계 이시명 선생과 결혼한 장계향 선생이 75살이 되던 해(1672년)에 쓴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이다. 이전에 허균의 <도문대작>이나 김유의 <수운잡방> 등의 요리책들이 있었지만, 모두 한자로 기록된 책들이었다. 이 책에는 재령 이씨 석계 이시명 선생의 종가음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
한 편의 드라마처럼 세상에 빛을 드러내다
이 보물책이 세상에 나오된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다. 1960년 당시 경북대 교수였던 김사엽 박사가 이시명 선생의 둘째 아들 존재 이휘일 선생의 후손 서가에서 책을 발견했다. 그는 ‘예사롭지 않은 서책’임을 단박에 알아봤다. 김사엽 박사는 논문을 통해 이 책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전통음식연구가들은 금은보다 엄청난 보물이 이 책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판 ‘인디아나 존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5년 황혜성 선생(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기능보유자. 2006년 12월 타계)은 <음식디미방>을 보기 위해 경상도로 길을 나섰다. 그는 버스에서 한 학생에게 ‘재령 이씨댁’을 물었는데, 그 학생이 재령 이씨 13대 종손 이돈씨였다. 당시 그는 대학 1학년이었다. 장계향 선생의 285주기 불천위(집안의 뛰어나신 분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집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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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황혜성 선생과 인연이 닿은 <음식디미방>은 <다시 보고배우는 음식디미방>(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저), <음식디미방 주해>(백두현 경북대학교 교수 저) 등의 여러 권의 책과 각종 논문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책은 경북대 고문서 보관실에 있다.
13대 종손 이돈(71)씨와 종부 조귀분(60)씨는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집안의 음식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조씨가 만든 석이편(석이버섯떡)은 단맛이 거의 없고 담백하다. 석이버섯을 잘게 다져 찹쌀가루, 쌀가루와 섞어 떡을 만들고 그 위에 잣가루를 얹었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다. 첫 맛은 너무 거칠어 떡인지 의심이 간다. 하지만 한 개, 두 개, 먹을수록 자꾸 손이 가게 하는 묘한 맛이 있다. 이 떡을 만드는 법은 <음식디미방>의 면병류 석이편법에 자세히 나와 있다. 종부는 “장씨 할머니 음식 중에 잡채, 대구껍질느르미, 동아느르미, 모시조개탕 등이 인상 깊다”고 말한다. | |
집안 몰락으로 흩어진 유물 찾으려 돈 버는 일부터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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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수원에 살고 있는 종손과 종부는 노구에도 조상이 남긴 유산을 아끼고 세상에 알리는 데 여념이 없다. 장계향 선생이 노년을 보낸 고택(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 옆에 집을 지어 종가를 새롭게 단장했다. 최근엔 <음식디미방>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곧 고향에 내려갈 예정이다.
60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종부는 안동 지역에서 열리는 종가포럼에 참여하고 종가음식에 대한 강연도 한다.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추운 겨울에도 고운 한복을 여며 입고 길을 나설 정도로 열정이 가득하다. 300여년 전 총명했던 장계향 선생을 보는 듯하다. 그는 “후손으로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라며 겸손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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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탄한 삶을 산 듯 보이는 종손은 ‘의지의 한국인’이다. 그의 아버지 이병흠씨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다. 집안은 황폐해졌다. 전쟁통에 집안의 유물들은 하나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씨는 종손으로서 그것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월급쟁이로는 뜻을 이루기가 힘들겠다”고 생각한 그는 10년간 잡아온 교편을 접고 37살에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설립한 가방회사는 1970~80년대 ‘백만불 수출탑’에 이어 ‘오백만불 수출탑’을 탈 정도로 성공했다. 그는 집안의 유물들을 찾기 시작했다. <전가보첩>은 그렇게 해서 다시 찾은 집안의 유물이다. “할머니를 알리는 일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라고 종손은 지금도 생각한다. | |
시와 서예에도 능했고 나눔에도 큰 손
장계향 선생을 흔히 ‘정부인 장씨’라고 부른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이 숙종 18년에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정부인’칭호를 받았다. 장계향 선생은 1598년(선조 31년) 경상북도 안동 금계리에서 경당 장흥효 선생(고려 태조 정필의 후예)과 첨지 권사운의 여식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19살에 재령 이씨 운악 이함 선생의 셋째아들 석계 이시명 선생과 혼인했다. 장흥효 선생은 제자인 이시명 선생이 아내와 사별하자 자신의 딸과 혼인을 시켰다. 장계향 선생은 윗동서 두 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맏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병자호란 이후 은둔생활을 시작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도 지켰다.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도 훌륭하게 키웠다.
시도 잘 짓고 서예에도 능했던 장계향 선생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도 넉넉했다고 한다. “시아버지인 이함 선생의 문집에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대문 밖에 큰 솥을 걸고 도토리죽을 쒀 300명이나 되는 걸인들을 먹였다고 해요. 끼니 때 연기가 안 나는 집에는 사람을 보내 양식도 주었답니다.”종손의 기억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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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 선생은 25살이 되던 해 친정어머니가 죽자 새어머니를 모셨고, 아버지가 어린 이복동생들을 남기고 죽자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살림을 보살폈다. 지금 고택이 있는 영양군은 장계향 선생이 시아버지가 죽자 남편과 터를 잡은 곳이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인 남긴 책 <정부인 안동장씨실기>에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 |
기록된 모든 음식 개량화해서 좀 더 실용적으로 복원
<음식디미방>을 세상에 알리는 데 종손과 종부만 열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2006년 ‘영양군 음식디미방 보존회’가 결성돼 일부 음식을 재현하고 있다. 2009년엔 영양군청에서 허성미 안동과학대 교수에게 ‘음식디미방 레시피 표준화 작업’을 의뢰하기도 했다. 허 교수는 최근까지도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모든 음식을 개량화해 좀더 실용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책에 기록된 음식법이 매우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어서 복원이 쉬웠다. 하지만 면 요리는 까다로웠다”고 말한다.
복원을 위해 한 가지 음식을 수십 번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가 기록한 양은 엄청나게 많아요. 평상시에 늘 먹는 요리가 아니라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집안의 큰 행사, 보양이 필요할 때 만들어 먹었던 요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 교수가 복원한 <음식디미방>의 음식은 저칼로리 건강식이다.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고, 대부분 찌는 방법을 사용해 담백하다. 그 중에서 ‘느르미’가 독특하다. 밀가루가 들어간 소스 같은 것이다. 잡채도 특이하다. 당면이 들어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가 어우러진 음식이다. 종부 조귀분씨는 이 복원작업에도 큰 도움을 줬다. 맛을 보거나 만드는 방법을 지켜보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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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불은 ‘매운 불’, 고명은 ‘교태’, 부패한 건 ‘독한 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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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디미방>의 뜻은 ‘음식 맛을 아는 법’이다. 그 법을 살짝 들여다보자. 총 146가지 조리법이 있다. 면병류(면과 떡)가 18가지, 어육류(생선과 고기)가 74가지, 주류 및 초류(식초)가 54가지. 부록으로 ‘맛질방문’이 있다. 꼼꼼히 살펴보면 재미난 것이 많다. 밥과 죽에 대한 요리법이 없다. 밥짓기는 너무 평범해서 뻔 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국수는 밀가루가 아니라 메밀가루와 녹두가루로 만들었다. 당시엔 귀한 음식이었다.
모든 음식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게 임진왜란 때라고 하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 대신 천초, 후추, 마늘, 파가 들어간다. 육류요리가 많은 데 재료는 주로 소의 위나 개고기, 꿩고기다. 개고기의 창자로 만든 순대는 별미 중 별미다. 개장찜, 개장느르미, 누렁개 삶는 법까지 세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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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발바닥 요리도 있다. 각종 한과와 떡 만드는 법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숭어나 모시조개, 참게로 만드는 요리들도 있어 다양하기까지 하다. 양반집답게 술 빚는 법도 여러가지다. 다식은 두장의 기왓장을 붙여 불에 데워 만드는데, 오늘날 과자를 굽는 것과 비슷하다. 허 교수는 “버섯종류로 추정되는 진이나 곰발바닥, 자라, 참새, 개 등만 빼면 요리법에 들어가는 많은 식재료가 지금도 구하기 쉬운 것”이라고 말한다. 부록 ‘맛질방문’은 장계향 선생의 외가댁 맛질마을(지금의 예천)의 맛을 기록한 것이다.
장계향 선생의 표현법 역시 재밌다. 그는 강한 불을 ‘매운 불’, 고명을 ‘교태’, 부패한 고기를 ‘독한 고기’라고 불렀다. <음식디미방>을 ‘규곤시의방’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책의 표지에 적힌 한자 때문이다. 후손들이 적은 것으로 추정한다. 본문의 첫머리에 있는 한글 ‘음식디미방’은 장계향 선생이 적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이름은 <음식디미방>이 맞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 맛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이 보물책을 보기 위해 누구든 ‘인디아나 존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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