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님의 詩 한편으로 줄거운 민족명절, 추석인사를 대신합니다.

 

*남신의주, 유동에 사는  박시봉, 방에 세들어 사는....이라는 뜻입니다.

편지로 치면 발신인 주소인 셈이지요.  백석, 화자가 사는.../이요조

 

 

 

 

 

 

출처: 백석 홈페이지
http://limaho.hiho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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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백 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학풍, 1948. 10>

 

백석(白石 ; 1912∼?) 시인. 본명은 기행.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35년 시 '정주성'을 조선 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고, 1936년 시집 <사슴>을 출판하였다. 1947년을 전후하여 '적막 강산' 등을 발표하였으나 이후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백석의 시는 평북 지방의 방언을 통해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백석의 시 세계 백석의 시 세계의 주인공은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잠겨 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세계에 잠겨 있는 만큼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현실의 자신과 모순되어 있는 상태를 심화시킨다. 바로 이 모순이야말로 백석의 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창조적 힘인 것이다.

'고향'은 타관에서 떠도는 자의 절절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백석의 향수는 단지 고향의 풍물이나 인정 세태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적 소재들은 보다 깊고도 지속적인 고향의 삶의 역사와 관련을 맺으려 할 때에만 선택된다. 풍속이나 이야기로서의 설화가 시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풍속과 이야기야말로 유랑자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바로 그에게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유랑자에게 있어서 가장 그리워지는 대상은 가족공동체인데, 백석은 유랑의 여로 속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고 있다. <신범순, '백석의 공동체적 신화와 유랑의 의미'에서>

< 이 시의 제목은 편지봉투에 적힌 발신인의 주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남신의주 유동에 살고 있는 박시봉이라는 사람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이 (시인;시적자아)가 보낸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편지형식의 시는, 자신의 근황과 내면을 표현하기에 적당하기때문에 일찍이 1920년대 말 임화의 '우리 옵바와 화로 '같은 작품에서도 시도된 이래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 채택되었던 것으로 결코 낯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시의 문맥으로 미루어 볼때, 시적 자아는 '박시봉'이라는 목수의 집에 임시로 세들어 살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객지에 나와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슬픔과 어리석음으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회한(悔恨)에 젖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운명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운명론적, 수동적인 세계관에 빠져드는 기미를 보여 주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 행에 이르면 시적 자아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굳세고 깨끗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남신의주 유동에 사는 박시봉씨네'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시에는 곤궁하고 난처한 시절을 만나,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깃들일 터전을 잃은 사람의 심사와 그와 같은 난국을 벗어나려는 정신적 노력이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아마도 어느 겨울을, 아는 사람의 집에 얹혀 산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삿자리를 깐 방에서 시의 화자는 자신의 우울한 형편을 돌아보며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한다. 그것은 먼저, 공간이 비좁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겠지만,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여 공간이 갑갑하게 느껴진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이 시의 중반부는 회한과 비탄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화자의 내면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와 같은 바닥에 이른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내면의 정돈, 상승과정이 이 시의 전개에서 백미를 이룬다. 스스로의 삶에 대해 불가항력인 운명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그 어떤 초월적인 힘을 인정함으로써 일단 안정을 기하게 된다. 그것은 추락의 마지막 단계로서 체념이 아니라, 새로운 일어섬의 전 단계로서의 방법적 체념, 곧 침잠인 것이다. 속마음을 가라앉히면 바깥풍경이 제대로 보인다. 화자는 눈 덮인 자연을 바라보면서 눈 맞는 나무, 눈 맞는 잎새를 새롭게 주시한다. 혹독한 계절을 맞아 잎들은 시들고 앙상한 가지가 하염없이 눈을 맞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는 화자가 꿈꾸는 강한 삶의 태도, 스스로 기대하는 미래의 또다른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보아 맥없는 말을 끝없이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 시는, 조용히 음미하며 읽을 때 도약을 꿈꾸는 서정적 내면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해설: 이희중]

 

백석의 시에 나타난 '고향'의 이미지

백석의 시에서 '고향'의 모습은 그 자신의 유년 시절 체험을 통해서 풍부하고 다양하게 그려진다. 그는 어린 소년을 시적 자아로 내세우고, 시적 자아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고향과 고향 사람들과 풍습(민속)을 다양하게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재현된 백석의 '고향'은 '여우난 곬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친족 간의 우애와 정이 넘치는 공동체적인 제의(祭儀)의 공간으로 나 타난다. 뿐만아니라 그 '고향'은 인간과 자연, 귀신과 사람들까지도 화해롭게 공존하고 있는 동화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화해와 공존의 세계를 그려 내기 위해서 그가 흔히 제시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적인 제의인 것이다. 따라서 백석의 시에는 이러한 제의와 관련된 풍성한 음식, 놀이, 민속 등 현대화의 과정에서 상실된 민중들의 민족적인 생활 세계의 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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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나무 이미지* 헛개나무(호깨나무)도 갈매나무과라네요. 그럼 잘 아시겠지요. 산 뽕나무 비슷하기도 한..

 

 

 

白石 [1912.7.1~1995. 1. (83세)]


시인
본명 기행.
평안북도 정주 출생.
오산중학,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 졸업.
조선일보사 출판부 근무.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 《고향》 《북방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 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광복 후 고향에 머물렀다가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북방정서를 통해 시화(詩化)했다.
본명은 기행(夔行).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시집으로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시전집〉과 1989년 고려원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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