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이 요조
◎ 2001/12/19(수) 22:05 (MSIE5.0,Windows98;DigExt) 211.222.169.39 1024x768
| 그녀는
그녀는 언제나 몸을 앞 뒤로 흔들며 까르르 웃어대곤 했다.
..................................................중략
(나의 무심함으로 20여년만에 만난 둘도 없는 친구/그 것도 그녀가 전국 조회를 거쳐서야)
나는 마음이 아픈 그녀를 당분간 우리 집에(빈집) 있으라 데려다 놓고는
늘 행동을 같이하며 기거했으나 채, 한 달도 못 가
많은 세월의 틈새는 결국 우리 둘을 갈라 놓았다,
서리가 눈꽃보다 아름다운 어느날
가 본 집은 대문만 굳게 잠겨있었다
남겨진 편지만 덩그라니 놓여 있을 뿐
그러고 한 2년~~
소문에 그녀가 절로 들어갔다는 풍문을 들었다.
그럴리가 또 괴벽이 도져서 책 낼, 글이나 쓰러 들어갔겠지.....
..................................중략
그런데 바로 엊저녁에 전화가 왔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녀는 잔잔히 웃고만 있었다. 마음이 급한 내가 다그쳐 물었다.
“너, 절로 들어 갔다는 게 사실이야?” “그래, 나, 스님 됐어~”
“ 어- 아니, 야,~ 너 그런 법이 어딨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는 내게 그냥 이야기는 핵심을 잃고 허공을 빙~빙~ 돌고 있었다.
"여기 전화세 많이 나와” "그럼 내가 할께, 몇 번이니?”
"지금, 글은 쓰고 있니?” "다 버린 마당에 글은 무슨...글.....”
그녀의 말이 계속해서 환청으로 귓가에 맴돈다. 그나마 그녀의 전부였는데,
................... 아, 전화가 잠잠하다.
봄날 언제쯤 날 잡아 그녀가 있는 절을 찾아봐야겠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로 몸을 앞뒤로 흔들며 웃을 그녀를 만나보러,
"언제나 널 사랑해" 라는 그 말을 전해주러, 2001년 1월 10일 아침에 j.
L. 영숙~~
가슴 한켠이 알싸해오는 이름이다 지난 1월 난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무슨 이유에선지 出家를 해 버렸다 한다.
물론 첫째 이유가 마음의 교류가 없는 부부 탓도 있지만...
자식 잘 되고 있고... 부자 친정을 두고, 괜찮은 시가에다 저만 마음 하나 모질게 다잡으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조금만 더 견뎌내면 될 것 같았는데......
누가 그랬다 "글팔자라고.."
이번에 내가 부산을 갑자기 내려온다니(실은 始家婚事)
형제들은 그녀를 만나러 오는가보다 지레 짐작들 하고있었다.
그랬다. 형제간 못잖게 사랑했던 내 친구였다.
그 말을 듣고나니 내가 부산을 내려 온 이유가 바로 그 것인 것처럼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시간을 보니 축(丑)시가 가까워 오지만 114에다 물었다
청도 운문사... (운문사가 청도에 있다는 것 동생을 통해서 들었다)
갑자기 보고싶다는 생각에 불붙은 마음은 까짓 체면 따위를 무너뜨리기에...아무것도 아니었다.
새벽 불공을 올려야 할 스님은 혼몽중에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속명을 대고 나이를대니 아~~ 있단다. 당장 오늘 찾아갔으면 싶다고 말했다.
저쪽에서 말했다.
"그 분은 이제 불교 대학 1년입니다." "4년 졸업 후에나 만나보시지요."
지금은 규율에 얽매어 한참을 기다리셔도 잠시 잠간 얼굴만 볼 뿐.......
"아니 출가한지 두어해 될텐데요?" 동안은 행자승 시절이란다.
"만나면 잠간은 반갑겠지요.그러면 뭐하나요? 본인 마음만 흔들리지요."
"어떻게 여기 있는 건 아셨는지요?" "예 전화가 왔었어요." "아니... 여기서요?"
뭔지 모르지만 가시 섞인 질문이다. 아마 엄한 계율에 어긋나나보다
나는 얼른 말 꼬리를 돌렸다.
"아니요 그냥 절에 있다고만 하고 끊겼어요 그런데..수소문 했지요"
그 것은 사실이다. 자기 거주지를 입에 담지 않고 끊어 버렸다.
오늘 그렇게 물어 본 내가 잘 못한 것이다. 혹여 영숙에게 누가 되진 않을까?
단순한 생각에, 그저 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내가 실수를 했나보다.
저쪽에서 비구니 스님의 음성이 다시 낭랑히 들려온다.
"늦게 출가하셔서 더 힘이 들거든요.
4년 졸업 후 친구분하고 마주 앉아 부처님 이야기라도 바로 전할 수 있어야지요"
그렇게.....전화는 끊어졌다.
올라오는 날
난 중요한 약속이 하나 있었다.
그 약속을 포기 하더라도 만나러 쫓아 갈 생각이었는데,
난, 상경하는 차 안에서 내내.....
영숙이 생각으로만 눈에나...가슴에나...머리에나...꽉 찼다.
그 때 그 아픈 마음을,
난 왜 끌러 보지도 못하고 보냈을까? 왜 들어주지도 못했을까?
언제쯤 그 보따리를 끌러낼까...주저하다가...그냥 그 업의 보퉁이를 도로 안고는
인고의 길로 휘적 휘적 미련없이 걸어 들어간 그녀,
거의 20여년만에 만나...
우린,
서로의 깊은 강을 건너 볼 생각도 않고 난 그녀를 그렇게 떠나 보내놓고...
평생을 그리워 해놓고도... 채 한달도 함께 못 지낼 것을,
올라오는 차창으로
그녀와 나 사이에 흐르고 있는
깊고도, 푸른, 시린강을.....보았다.
2001년 12월 19일 늦은 밤에 lee y j.
◈ 운문사의 사진들과 그 설명
고산 자락에 자리잡은 운문사의 새벽은 비구니들의 수도에 정진하는 소리만이 살을 베는 듯한 추위를 가르고 있었지요. *******************************************************************
대웅보전 앞에 배치된 쌍탑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형식으로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경의 화강석제. 높이 5.4m의 3층 석탑입니다.(류희수)
영숙아 보고있니? 넌 늘 보며 지나치겠구나...... 동백이 참으로 곱구나(요조)
아침 저녁 예불을 모시는 대웅보전에 저녁예불을 드리기 위한 스님들의 발길이 분주합니다. 대웅보전에는 삼세불인 연등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모셨고 양쪽의 협시보살로는 4대보살인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었습니다(류희수)
운문사에서 가장 작은 건물은 작갑전이라는 건물이다. 작은 까치 작, 갑은 곶 갑 즉 까치곶이다. 운문사의 유래를 말할 때 작갑사는 운문사의 첫 번째 이름으로 운위된다. 초창자가 오늘의 운문사에 대작갑사를 세운 것이 운문사의 효시이다. 운문사의 두 번째 중창자인 보양국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용왕이 용궁에 그를 청하여 작갑에 절을 창건하라고 한다. 보양국사는 고려의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여 왕건이 작갑사에 밭 500결을 부치게 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왕건은 밭 500결을 내리면서 운문선사라는 절 이름도 내려 작갑사는 오늘 운문사가 된 것이다. 그러한 유래를 가진 작갑전은 측면, 정면 각 한 칸의 작은 건물로 이 안에 전탑의 돌기둥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보물 제318호 4천왕석주 2기와 보물 제317호인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4천왕석주는 일반적으로 4천왕상이 주는 과장된 위협의 분위기는 전혀 없는 선비적인 분위기의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류희수)
2001년 12월 20일 목요일 (사진작가 류희수)
**운문사 경내** 가지가 밑으로 늘어지는 점이 보통 소나무와 달라 처진 소나무라고 부른답니다. 나무의 높이는 6 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2.9 m이고 , 나무의 나이는 약 400년이나 된다고 하네요. 어떻습니까? 400년 넘게 사시사철 저 푸른솔을 유지하고 있는 저 모습 장하지 않습니까?
사진/Ivan
사진/Iv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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