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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누실명
이요조
2004. 11. 19. 17:51
2004. 11. 19. 17:51
허균의'누실명'
"문학계의 이단아들 교산 허균(許筠)"
★누실(陋室.누추한 집)명
심홀쯤되는 방에
남으로 지게 문 둘을 내니
한낮볕 밝고도 다사롭네 짐이라야 벽뿐이지만
책은 고루 갖추었네
쇠코잠방이 입은 이 몸
탁문군의 짝이라네 반 사발 차 마시고 향 하나 사르며
천지고금을 생각하노라 사람들은 좁은 방이라
누추해서 어찌 사노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신선의 경지구나
마음과 몸이 편하거늘 그 뉘라서 누추하다 하리
내가 생각하는 누추함은 몸과 명성이
함께 썩는 것 원헌은 봉호에 살았고
도연명은 띠집에 살았다네
군자가 산다면 어찌 누추하리오
[현대에 맞게끔 조금 새롭게 번안한 것]
방넓이는 스므자 가웃인데
남쪽으로 두 문이 열려서
낮 해가 들어와 비치면
밝고도 따뜻해라
집이래야 겨우 바람벽이나 둘렀을 뿐이지만
책만은 4부서(四部書)를 갖춰 놓았네
남은거라고는 쇠코잠방이 하나에다
사랑하는 문군(文君)이 함께 있을 뿐
차를 반 사발 따라 놓고
향도 한 자루 피웠어라
하늘과 땅, 옛일과 요즘의 일을
벼슬에서 물러난김에 생각해 보네
남들은 누추한 방이라고
누추해 살지 못하리라 하지만
내가 보기엔
하늘위의 신선세계만 같아라
마음이 편하고 몸도 따라 편하니
누추한 곳이라고 어찌 말하리요
내가 누추하게 여기는 건
몸과 이름이 함께 썩는 것
원헌(原憲)은 쑥대로 엮은 지게문에 살았고
도연명도 울타리만 휑한 집에 살았다네
군자가 이 곳에 머물러 사니
어찌 누추하다 말 할 수 있으리요
사천에 있는 허균(호:교산)시비
☆활빈당(活貧黨)을 만들어 교묘한 꾀와 도술로써 팔도 지방 수령들이 불의로 거둬들인
재물을 백성에게 나눠 주는 내용을 그린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 교산(蛟山) 허균(許筠)이 작품이다.☆
지족지락(知足可樂)이요 무탐즉우(務貪卽憂)니라 하는 글귀가 생각이 난다.
만족할 줄을 알면 즐거울 수 있는 것이요 욕심을 부리면 근심이 따르기 마련인 것이니라.
이 말은 『명심보감』에 있는 글귀다. 이 평범한 말을 삭이지 못해 욕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던 재주꾼이 있었다. 이름하여 허균(許筠)이다.
허균(1569년∼1618년)은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였던
허엽( 선조 2년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애일당에서 부제학까지 오른 경상 감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허엽에게는 아들 셋, 딸 둘(육남매라는 설도 있음)이 있었는데
봉(둘째 아들)과 난설헌(막내딸). 균(막내아들)은 후처 김씨 소생이었다.
허균의 집안은 당대의 명문으로 형 성과 봉, 그리고 누나 난설헌 등
모두가 학문이나 문장에 뛰어났다. 이러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허균은 누이인 난설헌과 함께
5세 때 형들의 어깨 너머로 글자를 익히고, 9세 때 시를 지을 만큼 뛰어나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12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자 허균은 어머니와 난설헌,
봉과 함께 서울에 살면서 누이와 함께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혔던 이달에게 글을 배웠다.
하지만 스승 이달은 어머니가 천한 종이었으므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허균은 이 때 스승으로부터 당시 사회의 잘못된 제도 등에 대해 자세히 배웠다.
그가 사회 개혁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한 것과 뒷날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서자 출신들의 편을 많이 들어준 것은,
같은 처지에 놓인 자신과 스승의 불행을 보고 느낀 바가 커서였다.
17세 때 결혼한 허균은, 20세 때 형을 잃는 아픔을 겪는다.
슬픔을 가라 앉힐 사이도 없이 2년 후에 사랑하는 누이와 헤어져야 했던 허균은,
그 외로움을 시문과 성리학 연구로 달랬다. 하지만 고난은 잇따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25년,
허균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피난 길에 나서야 했다.
그 해 7월 부인이 함경도 단천에서 첫 아들을 낳았으나 산후 조리를 잘못해 죽고
자식도 잇달아 죽는 참사를 겪는다.
계속되는 불행을 이기지 못한 허균은 26세 되던 선조 27년 강릉으로 내려가 애일당에서 지냈다.
그의 첫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학산초담(鶴山樵談)'을 지은 것이 1593년 10월이었다.
허균은 그 해 다시 상경, 정시 문과에 급제한 후 29세때 문시 중과에 장원 급제하며
이듬해 황해도 도지사가 된다.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친 허균은, 명나라 사신들과 외교 활동도 활발히 했다.
1606년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을 맞이할 때, 종사관으로 나가 중국 학자들 앞에서
조금도 막히지 않고 달변을 토해 중국 명사들을 놀라게 했다.
그와 반대당이었던 신흠도 이를 보며
"허균은 분명 사람인데 그의 재주는 도저히 사람의 것이 아니다."고 감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균은 세상을 알게 될수록 회의와 사회에 대한 환멸, 그리고 자기 갈등에 빠졌다.
풍월이나 읊고 거드름을 떠는 양반의 행태가 그의 눈에는 아니꼽게만 보였고,
그들의 근엄한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거짓.권위.부패에 항거하여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고 결심한다.
이러한 허균의 반항아적 기질과 언행에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스승이 냉대받는 쓰라린 현실,
어린시절 친구인 시인 권필 등의 인재가 가난과 운명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을
참다못한 허균은 마침내 부패한 정치와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혁명'의 길에 나선다.
하지만 비밀 누설로 첫번째 혁명은 실패하고 만다.
그 뒤 전라도 부안으로 낙향, '누실(陋室.누추한 집)을 짓고 숨어 살며
민중 소설인 '홍길동전'을 쓴다. 소설 '홍길동전'은 이렇듯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허균의 혁명 구상이며 원대한 이상의 나래 이기도 했다.
그 후 서울로 상경, 다시 꾀를 내어 실력자인 이이첨과 의도적으로 손잡고
한때 형조판서 등 요직을 차지하기도 한다.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데 이이첨과 협조한 허균은,
하지만 위장 행적이 밝혀져 도리어 이중 역적의 누명을 쓰고 1618년 8월 24일 참형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150여 편의 시를 남긴 그의 나이 50세 때의 일이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구하며....
★"또한 허균이 『홍길동전』을 썼다고 하는 것도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를 잘했다"김진세 인문대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
이런 일설도 있다는 걸 밝힙니다.저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만
어디까지나.추정일 뿐 올바른 가늠은 지난 역사만이 할 일입니다.
이 요조
첨부/許筠은 부안에 낙향하여 누실명을 짓고 살 제에 기생(梨化雨 흩날릴 제....) 매창과
돈독한 우정을 맺고 서로 詩文으로 마음을 트고 지내왔음이 지금도 문헌에 전합니다.
정말 오래전 글을 가져왔습니다.
카페글에서 찾아,
제글에서는 검색이 안 되기에...
2005년 6월 마지막날...비오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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