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나는 너를 열 달 동안 배속에서 품어내어  30년을 키웠지만 아직은 너를 아무에게도 내어주질 못하겠구나!

네 엄마는 모진 편이다. 네 동생 둘이나 군대에 보낼 때에도 현관문  멀리 배웅도 나가지 않았다.

물론 내다보지 않은 에미심정이야 오죽하겠냐마는......

느이 외할무이도 그러시더라 외삼촌들에게 "너만 군대가는 거 아니다. 가걸랑 잘 하고 오너라~" 엄마도 얼결에 외할머니를 고대로 닮아가나 보다.

그러나 옷이 돌아온 날 소포뭉치를 풀어 아들 체취를 어미개처럼 킁킁거려 맡아보곤 별수없이 그만 눈물이 핑-돌더라!

 

그랬던 내가 친구딸래미 결혼식에 갔다가 왈칵 솟구치는 설움에 그만  그곳을 뛰쳐 나와버렸다. 

얘야!  아무래도 엄마는 널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영 덜 된 모양이다.  아직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친구의 딸 결혼식에서 조차 여태 눈물바람인 나는 언제쯤이면 너를 웃으면서 선선히 보낼수 있을까?

 

어느날... 건강한 줄만 알았던 넌 내 앞에서 눈물 그렁거리며 <엄마! 나, 수술해야된대요>했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려앉더라~

혼자 아프고 혼자 검사하고 혼자 견디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꼬?

걸음을 걸을 때마다 고관절에 마치 꽃을 꽂는 침봉이 들어앉은 것처럼 무수히 찔리는 통증을 혼자 말없이 겪어내었다니,

내가 진정 잘못했구나!   쓰잘데 없이 무조건 엄하게 강하게만 키우려던 내 잘못이 크구나!

 

열 달, 배 아파  내 속에서 난 내 딸 아니더냐?

아프면 이 어미에게 응석도 부리고, 조잘조잘 이야기도 자주 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그랬을 것을,

<얘야 정말 미안쿠나~ 무지한 이 엄마를 부디 용서하려마~> 

어미는 오십이 넘어서야 이제 알았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정해진 공식이 없다는 사실을,

 

神이 아닌 우리 인간들은 인생의 산 모롱이를 돌아가며 보이지 않는 그 곳이 벼랑길인지  흙탕길인지

아니면 산 위에서 돌멩이가 굴러 떨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삶이란  것을 깨달았구나.

 

병원에서 카피한 사진 보퉁이를 끼고는  서울의 큰 병원이란 병원은 다 순회해 보았다.

병명도 뭐가 그런지 <고관절 골종양>불가피한 수술까지는 좋다만 약도 없는 병이 세상천지에 어딨냐?

 

별 도리없이 수술을 하고 의사선생님 말씀은 아가씨라 차마 고관절을 잘라내지 못하고 속을 긁어 의료용 골시멘트로 채워 넣었다더구나!

그런데 그 후로도 그넘의 병은 재발이다 감염이다  재수술하기를 무려 5차례~

수술 후 잘 나아지는가 싶어 지팡이를 버릴라치면 또 수술 들어가고,  힘든 회복기를 거쳐 출근할라치면 또 재수술 들어가야 하고

집에와서 회복중에 갑자기 온 몸이 경직되기를 손가락 하나 어쩌지 못해 119가 뜰채처럼 생긴 들것으로 너를 떠서 옮겼다.

 삐요~삐요~

 .....에에에엥 ~

러쉬아워에 막힌 길을 양보 해달라는 애절한 경보음을 내면서 응급실로 달려갈 때는

어미는 감전된 사람마냥 발끝에서 머리카락 끝까지 찌르르르~ 곤두선 오한과 공포에 질렸지만 엄마는 네 앞에서 애써

어금니만 앙다물었지  내색을 못했다.  그때사 깨달았구나!

어금니는 뭘 씹으라고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건 어금니에 깊이 깊이 숨기듯 묻어 둘 수 있었다.

배속에 넣어 키운 열 달과 품에서 키운 25년과 맞먹고도 남을 고군분투의 투병세월 , 그  5년 동안 너와 나는 다시 탯줄로 이어지듯 고통스런 출혈로 이어졌다.

잦은 수술끝에 설상가상 감염까지 찾아와선  고통의 나락으로 너가 빠지면 당연 탯줄로 이어진 엄마도  동반 추락했다.

너는 매번 자지러지다가 혼절했지만 평소엔 전혀 고통을 내색않는 기특한 효녀였다.

병원에서도 밝은 표정이 그럴수가 없다며  너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엄마는 내심 알고 있었다. 

나를 쓸데없이 빼다 닮아 ... 괜시리 모진 것을.....그나저나

신은 견딜 만큼의 고통만 주신다더니 고통도 순간도 잘 견뎌내고  재활 치료기간에  일그러진 무리에 우리도 동참했다.

 

멀쩡했던 사대육신들이 어쩌면 마구 구겨진 휴지처럼 망가진 채 멈춰진 삶의 늪에서 다들 허우적대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만,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성한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잘 자고나서... 온몸이 허물어졌다는 늙은어미의  허탈한 모습,
어느날 갑자기  문득  악귀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듯 탈진해 버린 사람들,
그들 눈에선 슬기롭게 반짝이던 영특함이 빠져 달아나고.. 그들의 건강과 지혜는 모두 걸귀가 먹어치워 버린 것같은
빈- 사발,....빈- 껍데기로...그마저 구겨져 버린... 군상들의 재활원이었다.

 

골종양(거대세포종) 수술밖에는 별 도리가 없는 병 앞에  풍전등화처럼  다시 재발할까봐 마음만 조릴 뿐......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차라리 악성이라면 방사선 치료라도 해볼 것을.... 

엄마인 내가 해 줄것은 확실히 알수 없는 건강식품 말고 최선책은 생활 습관과 식생활을  바뀌도록 도와주는 것 뿐이었다. 

 

넌, 유난히 육식을 좋아했고 기름진 음식을 탐닉했다.

공부하러 미국에 잠깐 나가있는 동안에도  한치의 불편함을 못 느끼는 그런 식습관의 아이였다.

그렇다고 애면글면 그런 습관을 고쳐주려 노력한 훌륭한 엄마도 아니었다.

<버섯이 몸에 좋대, 청국장이 좋대, > 그런 말을 듣는 몇 년 전만하여도 나는 그닥 버섯을 중히 여기지도 않았다.

지금이야 버섯은 물론 간장, 된장, 고추장까지 심지어 갖가지의 장아찌까지 손수 담아먹는 엄마로 변했다.

네가 아프기 시작하고 가슴이 답답해져 오면  나는 바람을 맞으러 달려나가  몸을 씻고 마음을 풀어놓을  웹상의 강을 하나 만들기 시작했다.

시퍼런 강물위에다  나의 시름을  몽땅 띄워 보내리라 작정하고  웹상에 강을 하나 그어놓고  마음이 울적할 마다 달려나가서는 

강물위에글을 쓰다가  아이에게 세상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하면서 차츰 그렇게 우리 두 모녀는 어두운 터널을 함께 절뚝이며 벗어 날 수 있었다.
마치 이인삼각 놀이처럼......

 

 어느정도 회복되어 유보해두었던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할 때 집에서 회사까지는 전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하는 먼-거리였고 

그러자면 지하도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할 건강상 불편에 매일 출퇴근을 시켜주던 나는 한겨울 빙판길에 미끄러진 사고 이후

(전철 자리에 앉아있을라치면 연세드신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노골적으로 자리를 내어주길 바라는  일도 생기고 자는 척 눈감고 있기에도 괴롭다기에)

궁여지책으로 그 당시 흔한 고시원에 한 두달만 버티기로 작정하고 얻었다.

금요일 밤에  데려오고 월요일에 데려다 주면 네가 나흘만 견디면 일주일이 후딱 지나가니 그러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랬던 게  절반은 내 품을 자연스레 벗어나는 계기가 될 줄이야~~ 너와 나....본의아닌 고생 후 얻은 결론은

제대로 된 오피스텔을 얻어 독립된 생활을 하면서 엄마의 분주한 이중생활이 시작되었구나 그렇지?

참, 아니다. 아빠도 그 당시 지방근무를 하셨으니 3중 생활이였구나!

다행히 바쁜 엄마를 위함인지 기특하게도 네가 건강을 점차 회복하고 믿기지 않게끔 완전해졌다.

 

 한숨을 돌린 엄마는 뭔가 떨어져 사는 네게 가르쳐야 할 많은 것들이 그제사 생각났고,

너를 품안에 늘 끼고 산다면 과일을 하나 깎아도 가르칠 것을...뭔가 모녀간에 소통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그래, 우리가 잠깐 메신저로 서로의 궁금한 소식을 주고 받았듯이   블로그에다 네게 요리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짬을 내어 엄마글을 읽게 된다면 넌...엄마의 당부를  알게 될 테이고 콩나물 시루에 물 내리듯...흘려 보내어도

콩나물은 그 물을 먹고 자라는 것 처럼 아마도 네가 내 가름침대로 잘 따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시 건강해진  너의 사회생활은  늘 회식이다 매식이다  바깥 식사가 다반사였지만 좋아하는 고기대신 생선을 가까이하고

밀가루를 좋아하는 널 잡곡밥으로 먹게 유도하고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즐겨먹게 하고.

가능하면 유기농식품으로 대체했다. 초코렛같은 당분을 즐겨먹는 것을 금하고 패스트 푸드를 근절시켰다.

운동을 하게 만들고, 될수 있으면 평안한 마음과 긍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여 치료에 도움이 가게끔 했다.

 

나는 네가 언젠가는 네 가족들에게 맛난 음식을 잘 만들 줄 아는 멋진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처음에는 네게 요리편지를 시작하여 쓰다보니 그 편지는 어느새 나 자신에게 쓰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나 스스로가 많이 개선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 둘  편지가 쌓이다 보니 음식에 대한 나의 관념이 바뀌고 내가 먼저 달라져갔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낮은 곳으로 물 흐르듯 너도 나를  닮아가지 않겠느냐?

 

 사랑은 위(胃)를 통과한다 는 영국속담이 있다. 음식이란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의미가 담긴 것이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가족들에게 사랑의 물을 주는 일이다.

정성껏 마련한 음식은  남편과 자녀들에게 늘 사랑으로 충만한 가정을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딸아!

네게 띄우는 요리편지가 하나, 둘 쌓이다보면  아픈 기억은 모두 잊고 눈부시도록 환한 그  날이 조만간 올게다.

암.....오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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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엄마, 쬐끔만 더 울께~ (너무 기뻐서)

 

 

 

 

몸과 마음이 유리된...저들에게도

반듯한 얼굴로, 웃으며 말하고,  양 어깨를 힘주어 펴고
반듯하게 설 수 있는 곧은 허리와  반듯하게 걸을 수 있는 건각을 주시고, 세상 속으로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반듯해진 걸음걸이로 뚜벅 뚜벅 그렇게 세상속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반듯한 몸을 가진 세상 밖 사람들은,   반듯한 직장과 반듯한 그 모든 것을 가졌을지라도
반듯한 생각을 하지 못하면 생을 반듯하게 살아내지 못하는 자들도 더러 많을 줄 압니다.
반듯한 우주만물의...절대자님이시여~~
반듯한 ..저울질로 저들과 함께 잘 살아 갈 수 있는 반듯한 세상 만들어 주시옵소서~
반듯한 뜻이 계셨다면 이제 사랑의 매는 그만 거두시고  삶을 다시 살도록  재활의 기회를 한 번만 더 허락 하옵소서.
반듯하고 당당한 자신감을 잉태할 힘찬 건강을 한 번만 더 허락하시옵소서.

한 번 더 허락하옵소서!

 

 

재활치료중에 글/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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