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남댁 ! 힘들지?
오늘 보훈병원에 어제왔다 내려 가는 길이야
또 전화 할께."
지방에 사시는 고모부 께서는 볼일을 보시고 내려 가실때만 꼭 전화를 주셨다.
그리 넉넉치 못한 처남 살림살이에 조금이라도 짐이 될까봐 그러시는걸 뻔이 알면서도 들어 오셔서 하룻밤 묵고 가시라는 인사치레 한마듸 못한 나였다.
늘 건강하시고 즐겁게 사시기에 늘 그럴줄 알았는데..
그런 고모부가 어떻게 손 쓸새도 없이 돌아 가신게 벌써 3년전 이었다.
병원에 계실때 잠간 얼굴을 내민게 전부였고 장례식에도 못 가 뵈었다.
늘, 죄송한 마음으로 살았는데..오늘 3주기를 맞아 묘소에서 생일 참배를 한다고 고모 한테서 연락이와서
남편과 같이 대전 현충원으로 참배를 갔다.
남편 한테 시집올때 아마 지방의 모 기관장으로 계시던 고모부는 근엄하기 짝이 없었는데, 유독 나한테는 자상 하셨었다.
군인 출신이신 고모부는 육 이오 참전 용사로서 대령과 장군의 차이를 군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앉여놓고 긴 시간을 보내며 설명을 하였는데..아마 당신이 장군이 못된 한(恨) 풀이 였으리라 생각 된다.
造花의 형형 색색의 꽃 송이로 물결치는 대전 현충원 장교 묘역 한구석 에서 한평이 될까 말까한 작은 집을갖고 육군 대령 이 XX 라는 문패를 달고 고모부는 우리를 맞았다.
포로에서 감시병을 때려 죽이고 묘향산에서 허리까지 차는 낙엽을 덮고 남으로 남으로 탈줄을 하였다고 무용담을 전설같이 들려 주든 고모부도 이제 이승의 모든걸 접고 한평의 돌 비석을 머리에 이고 영면에 드셨으니 바둥대는 내 인생도 자꾸만 물거품같이 스러지는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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