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다산초당
봄비가 대지를 적신다. 남풍이 불어 먼 산과 들에 새 생명들이 꿈틀댄다.
개울가의 버드나무는 벌써 파릇한 새싹이 터지기 시작한다.
매년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봄이면 늘 새롭다.
겨우내 눈 밑에서 꿈꾸던 생명들이 이제 기지개를 켜고 있다.
탄생은 아우성으로 시작한다. 제 혼을 덮고 있던 껍질을 깨고 터져 나오는
생명들은 가냘프지만 힘찬 울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꽃, 풀, 벌레들이 껍질을 깨는 아픔의 소리가 산과 들에 울려 퍼진다.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정말 잔인한 계절이 봄이다.
화사한 아름다움에는 죽음과 멸망의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
한 시절을 풍미하고 다시 사라져야 하는 운명이 거기 있다.
한 포기 풀, 한 송이 꽃, 한 마리의 벌레에게도 자신이 가야할 운명이 있다.
스스로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운명, 그렇기에 태어나는 생명들은 아름답지만 아프다.
꽃과 풀들은 한 철을 살고 나면 다시 아름다움을 거두어야 하고,
벌레들은 나뭇잎을 갉아먹거나 다른 생명들을 잡아먹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운명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인간들도 화사한 봄의 교향악을 즐기고 있지만,
저마다의 가슴에는 또 다른 한을 안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며,
삶 자체는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어쩔 수 없는 한을 안고 있다.
다른 생명들을 취해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인간은 '한'을 숙명처럼 안고 있다.
산사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세상에 내 던지는 화두 중에 '무소유'라는 말이 있다.
나는 젊은 시절 그 '무소유'에 심취하여 참으로 좋은 말이며, 인간이라면 이것을
실천해 봄직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에 가서 기도도 해보고 스님에게서
연비도 받았다. 내 팔뚝의 연비 자국은 내 마음이 지나온 고뇌의 흔적이다.
스님과 대담을 하는 중에 내 취미가 붕어 낚시라고 말하니, 살생을 하면 업을 쌓으니
낚시를 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낚아서 아침에 다시 놓아주고 온다고 해도 안 된다고 한다.
한참을 이야기 중에 내가 물었다. 그러면 에스키모 나 저 북쪽 지방의 툰트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짐승을 잡지 않으면 굶어 죽는데 그들은 그럼 어찌 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스님의 말이 '먹고살기 위해서(생계를 위해서) 하는 살생은 어쩔 수 없고 괜찮다'고 했다.
그 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살생이 허용되고 취미를
위해서는 업이 된다? 그것이 무슨 근거에 의해서 정당화 될 수 있는지 의아해 하며,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잡혀 죽는 생명들이 인간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아깝지 않고,
오락을 위해서는 아깝다는 말인가? 죽는 쪽에서 보면 이러나 저러나 억울한 것은
똑 같을 텐데... 모두다 인간의 잣대에서 만들어 낸, 주관적인 인간 편의주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진리는 한가지 일 텐데, 이렇듯 상대적으로 생명의 가치가 변한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낚시 대를 잡았다. 살생유택을 생각하면서
낚시 가방을 꾸렸다.
세월이 흘러 그 스님도 잊어버리고 세상에 묻혀서 살고 있다. 요즈음 다시
그 '무소유'라는 말에 대해서 그 진의를 깨닫지 못해 사색에 잠겨 있다. 사람들은
관념적인 말을 좋아한다. 가슴을 뭔가 푸근히 적셔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관념어
글에서는 알 수 없는 향기로운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 안개에 싸여 자신이 그 관념어를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아직 자신이 수양이 덜 됐거나, 마음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에 잠시 보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언젠가는 성취할 것으로 다짐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대개 선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어는 죽을 때까지도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무소유'라는 말은 관념어이다. 뜻 그대로 풀이하자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을 뜻한다.
마음도 비우고 가진 게 없는 완전히 비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소유의
참뜻을 모르고 하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말과 글이란 단순하고
그 뜻이 명료해야 한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적든 많든 자신의 육체를 보존할 물질들을 소유하도록 자연은 생명들에게 부여해 주었다.
진실로 살기 위해서는 소유해야만 한다. 자연의 먹이 사슬은 곧 소유의 차원에서
이해 할 수도 있겠다. '백수의 왕' 사자는 무소유와 소유 중에 어느 쪽일까.
한 마리 사자가 영양 한 마리를 잡아 메어 두고 있지 않다고 해서 무소유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제 어디서고 배가 고프면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은 곧 소유와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소유와 무소유는 인간만을 위한 명제인가. 먹이 사슬의 최정상에는
인간이 있다. 무소유는 먹이 사슬의 하부 구조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면, 우리는 무소유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 자연계의 어떠한 생명체도 먹이 사슬의 구조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며,
하부의 것을 취하는 순간, 그것은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무소유라는 화두를 내 던지는 스님들은 그들의 생이 그러한 것을 추구하도록 스스로
길을 선택했다. 산사의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세상의 살아가는 모든 인연과
법칙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신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부터 혼자이다.
그들에게는 무소유가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닐지라도 그 목표(해탈)에 이르는
한 방편일 수도 있다. 즉, 그들의 목표는 해탈이다.
그러나, 그들도 어떤 때는 무소유를 갈파하여 소유를 지향하는 우를 범하는 것을 가끔 본다.
우리들이 자주 가는 대 사찰이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는 넉넉한 소유로 재화가 넘친다.
햇살이 따사로운 선방에 앉아 한 잔의 녹차를 음미하며 산새소리와 바람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세속의 인간들을 바라본다. 불쌍한 중생들은 그것을 부러워하며, 무소유를 되뇌인다.
실로 세속에 사는 중생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재화를 주고받으며, 삶에 고통받는 인간들을 보고,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무소유'를 실천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해 지리라고 한다. 정말 말 그대로 내 것 다 버리고
식구들과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다 무소유를 실천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소유를 향하고 있다. 지구상의 거의 전 인류가 소유를 지향하고 있다.
산사의 곡간은 항상 그득 채워져 있으며, 그들이 마시는 녹차는 엄청 비싼 것이다.
100g 짜리 한 통 값이 거의 쌀 20kg 한 부대와 맞먹는 가격이다. 기차역이나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무소유'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겠는가?
위장을 비워 둔 채로 수행을 할 수는 없다. 수행하려면 기운을 차려야 한다. 다만,
아주 적게 먹는다. 그리고 농사지은 사람을 생각해서 깨끗이 먹는다. 그러나 먹는다는
그 자체는 우리와 다를 게 없다. 곡간에 먹을 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곡간의 먹거리들은 소유이다. 속세에는 스님들이 먹는 것보다 더 적게 먹으며 주린 배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삶을 선행으로 살아온 사람도 많다
도둑질하지 않고 남의 아픔을 보고 도움을 마다하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누더기를 걸치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심각하게 자문한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는가?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 불행한 사람들에게 무소유론은 어떤 답을 줄 수 있는가?
그들을 배고프지만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무소유론으로 가능한가?
속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고생을 하며 살기로 작정을 했다.
자손을 잇기 위해 결혼을 하고 낳은 자식들을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재화란 그리 쉽게 벌리지 않는다. 갖은 고생을 하며, 마음에도 없는 언행으로 후회를
하면서도 내일이면, 돈을 벌어야 한다. 그 삶이 아프다고 해서 처자식을 내 팽개치고
혼자 산사로 들어가 인연을 끊을 수는 없다. 우리 인류가 전부가 서로의 인연을 끊고
산사에 들어가 수행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무소유) 세상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는 하나의 관념어일 뿐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마음 편히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자신도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극락이며 천당일 것이다.
극락과 천당은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이며, 우리는 현재 숨쉬고 있다
이 세상에서 거지가 행복하다는 말은 못 들었다. 다만 조금 가진 것에 만족하면
그것이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말 행복일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마음의 느낌이니까.
속세에 사는 중생들에게는 중생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소유가 아니고, 소유이다. 다만 소유함에 있어 정도를 걷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어머니 젖을 탐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며, 동생이 태어나서 동생에
대해서 잠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다 자연스런 일이다. 위장을 가진 인간이나 동물이나
심지어 나무와 풀과 꽃들도 필요한 물질들을 자신의 몸 속으로 받아 들여야 생명을
부지 할 수가 있다. 받아들이려고 하는 욕구, 그것이 욕심이며 또한 삶에 대한 의지이다.
자라면서 자신과 남을 위해 재화를 얻으려는 것은 당연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다.
즉, 속세에 사는 사람들의 목표는 '행복한 삶'이다.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행복의 첫걸음이라고 한다.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은 정말 아름답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소유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혹자는 마음으로라도 도와 주는 것도
아름답다고 한다. 물론 헐뜯는 것보다는 아름답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진짜 어려운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구두선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스님들의 목표는 차원 높은 '해탈'이며, 속세인의 목표는 '행복한 삶'이다.
이 양자의 목표가 다르다. 해탈을 성취하는 데는 무소유가 필수이지만, 행복한 삶을 얻는 데는
소유가 필수이다.
누군가가 '부자라고 다 행복하고, 가난뱅이라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니지'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이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을 수 있고,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로 대신 할 수 있다. 그것은 행복론이라는 별개의 문제이다. 같은 마음이면
재물이 많은 것이 좋지 않겠는가?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밧줄 던져줄
생각은 하지 않고, 무소유를 외친다면 말이 되겠는가. 밧줄은 재화이며 곧 소유이다.
그때 밧줄이 없으면 무소유이며 구두선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눈에 보이는 사물은 다 공한 것이고, 공한 것은 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공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공이다. 불공은 공하지 않는 것이다.
공하지 않다는 말은 텅 빈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반야심경은
이 불공처가 부처가 머무는 곳이며, 보살과 여래가 본래부터 앉을 곳이라고 한다.
공하지 않고 뭔가가 있는 불공처는 이 세상이다. 우주이며 우리의 지구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본래 부처이며 보살이며, 여래이다.
다만 먹어야 살 수 있는 부처들이다. 부처가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이 아니다.
그 곳에 가려면 선행을 하며 때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스스로 삶의 의지를 기각하면 이루어질지,
그것은 알 수 없다.
눈물 젖은 빵도 겨우 먹는 사람에게 무소유를 갈파하여 그 사람이 수긍을 하고
실천 할 수 있다면 나도 무소유를 행해 보고 싶다.
그러나 오랜 세월 새겨가며 생각해 왔지만, 그게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다 본래 선하므로 나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 갈 뿐이다.
봄비가 대지를 적시는 날, 녹차 향을 즐기며 무소유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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