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과 잔치국수 ......................... 이슬비


끝 간 데 없던 지난 겨울의 추위.
그 추위도 남녘의 화신에 밀려나고,
골짜기의 잔설도 따사로운 햇살에 점점이 사라지고 있다.

뜰에 화초삼아 심어 놓은 몇 그루 약초에
거름으로 덮어 두었던 낙엽들을 걷어 내니,
그새 새 살을 봉긋이 부풀리고 있는 생명들에서
선뜻 다가 온 새봄을 맞는다.

이렇듯 작은 뜰을 어루만지는 일로
아직 여린 봄 향기를 곱게 감싸 안아 본다.


아침저녁 상위에 오르는 묵은 김치에
차츰 입맛을 잃어가는 즈음,
입맛을 돋우는 음식이 뭐 없을까?...
이것저것 생각 하다가
오늘 점심에는 추억도 아련한 잔치국수를 준비했다.


오랫만에 남편과 맛깔스런 점심을 먹고 차 한 잔을 나눌 때,
문득 가녀리고 앳된 지난 날의 새댁의 모습이 스쳐왔다.

노랑색의 에이프런을 두르고,
새댁이란 호칭이 낯설게만 느껴지던 신혼 초의 어느 봄날이었지.


그새 20여 년이 지났다.
수줍은 듯 미소를 머금은 채
남편 옆에 다소곳이 앉았던 모습이 어제인 양 아련히 떠오른다.
참 곱기만 했던 순간들이었다.

신혼 여행지에서 돌아온 5일 째 되는 날,
새댁은 비둘기 집 같은 신접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친정에서 아기자기하게 마련해 간 살림살이는
시댁의 사랑방에 고이 모셔 두고
둘이 덮을 수 있는 이부자리와 수저 두벌과 그릇 두벌로...

신랑의 근무처 가까이에 단칸방을 마련하였기에
신랑은 점심식사를 집으로 와서 해결하고
다시 근무처로 돌아가곤 했다.
아마 나도 볼 겸해서가 아니었으랴 싶다.


그 때 그 일들이 한 단막극의 대사인 양 떠오른다.

어느 봄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신랑이 출근을 서두르면서 나에게 말했다.

"점심때는 국수 좀 삶아 줘. 잔치국수 말야..."
"알았어요. 잘 다녀와요..."

혼자 남은 난 점심 준비에 분주했다.
멸치, 양파, 다시마 등을 넣고 국물을 우려내고,
아껴둔 깨소금과 참기름을 조금 넉넉히 넣어 양념간장을 만들고,
파란색이 감도는 김을 구워서 잘게 부수고...
그리고는 몇 번 먹어 본 잔치국수에
계란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용케도 기억해 냈다.

멸치국물이 끓고 있는 동안
큼직한 계란 하나를 골라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계란후라이를 아주 그럴듯하게 준비해 놓고선
연신 대문을 들락거리며 신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에
신랑이 휘파람을 불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다가 왔다.
맛있는 국수를 먹을 수 있다는 작은 사실에 행복해 하면서.

준비해 둔 국수 사리를 넓은 대접에 담고
두어 가지의 고명 옆에 계란후라이를 곁들인 뒤
부셔놓은 김을 살짝 얹어 알뜰히 마무리를 했다.
몇 번씩 조물거려 간을 맞춘 새콤달콤한 오이무침과
햇김치가 구미를 당기게 했다.

마치 우리의 사랑이
한 그릇의 국수에 다 담겨 있기라도 한 듯 흐뭇하기까지 했다.
물끄러미 상위의 국수를 바라보다가
한 그릇을 비운 신랑이 나의 손을 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 바보야, 국수 위에 얹는 계란은 후라이를 하는 게 아니고
계란을 풀어 얇게 지단을 부쳐서 채 썰어 얹는 거야.
다음부터는 알았지?...."


아, 이 수모...
나의 밑천이 다 드러난 양 싶은 순간이었다.
일찍이 뉘 앞에 이렇게 부끄러워 본적이 없었거늘...

졸업하고 곧 바로 직장 다니네 하고
친정 엄마를 도와
밥 한 끼 제대로 해 본 일이 없었던 새댁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였으랴.

신랑이 근무처로 돌아간 후에야
그 심각성을 알았고
그 날부터 몰래 요리책을 끼고 살다시피 했다.


생각해 보니
그날 이후 나는 잔치국수 알레르기가 생긴 듯 싶었다.

여름, 겨울 없이 정말 무던히도 국수를 삶아 내지만
그 일 이후 내가 먹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국수만 보면
행복해 하는 신랑의 모습에
철없던 이 새댁의 행복 지수도 높아만 갔다.


바람처럼 거침없는 세월은
곱기만 했던 새댁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느새 중년고개의 지천명을 바라보는 즈음에
헛되이 보낸 세월은 아니었는지 때로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 세월은 성년의 두 아이를 둔 중년의 부인으로 나를키워 놓았다.
세월을 벗하여 눈가에 자리한 주름에
신경줄이 당기는 날도 더러는 있어 서글픔이 들 때도 있다.


무심한 세월에 변한 것이 있다면,
외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조금 느긋해진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봐 줄 수 있다는 것.

혹여, 변치 않은 것 하나 있다면
아직껏 시들지 않는 느낌표로 기억된
그 때 그 향기롭던 사랑...

밝고 환한 모습으로 한 송이 들꽃처럼 웃던,
노랑색의 에이프런이 썩 잘 어울렸던 그 새댁이
오늘 문득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 때 그 사랑의 향기를 안고
내일도 그 내일에도 잔치국수를 더욱 맛깔스럽게 말아 내리라.


그 풋풋했던 사랑을 오래토록 긷고 싶은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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