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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아린 추억속에서.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해
그 당시 학생들에게 널리 읽히던 國英文 혼용
Student Times 란 신문에서 예쁜 이름을 보았다.
역시 그때 유행하던 펜팔란의 주소록에서-.
첫 편지를 보낸 며칠 뒤에 답장이 왔다.
이름만큼이나 예쁜 봉투에
정성껏 한자 한자 그리듯이 새겨넣은 글씨는 예술 그 자체였다.
1962년은 우리나라가 먹고 살기 어려운 때였고
요즘같이 문구류가 다양한 시절이 아니었다
편지지는 약간 흰 16절지에 가로로 붉은 줄이 쳐있는
괘지가 주종을 이루는 때 였지만
우리는 항상 예쁜 편지지와
직접 정성들여 만든 봉투를 사용하며
졸업하고
진학하고
군대가고
제대한 뒤까지 아름다운 사귐을 계속했다.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10 ~ 20대의 고뇌와 방황 그리고 희망과 결단 등
인간으로 성숙되어 가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있는 꾸밈없는 역사였고,
한편으로는 순수했던 마음에 조금씩 때가 묻어가는 변화의 과정이 그대로 담긴 기록들이었다.
받으면 곧 바로 답장하고
보낸 뒤 4일이면 거의 어기지않고 답장이 왔으니
근 10년간 주고받은 사연은
나보다 너를 더 잘 알게하는 敍事詩였다.
우리의 가슴저린 기억들을(나만 아픈지도 모르지만)
어찌 몇자의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이등병 겨우 면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육군 일병이던 나를 그 먼곳에서 면회를 왔었지.
그때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과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금도 낯설지않은 만남은
역시 많은 세월 주고받은 대화의 편지 덕이었을거야
그때는 왜 그렇게 주변머리가 없었을까?
멀리서 찾아온 너를 꼭 일등병답게 대하다 보냈으니~
헤어진뒤 얼마나 미안하고 후회했는지---.
제대를 앞두고 나의 주변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해갔다.
제대 후의 거취가 입대 전의 상황과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변화해 갔고
계속되어야할 학업의 지속도 불투명해지는 암울한 시간의 파노라마였지,
그런데 그때의 나의 처신 중에
지금까지 가슴아리게 아픈 실수가 있었다.
왜?
나는 그 고통과 번민을 너에게 털어놓고 나누지 못했을까,
나의 형편과 처지를 왜 너에게 고백하지 못했을까.
방향타를 잃고 표류하던 그 방황하던 내모습을
어째서 너에게 사실 그대로 알리고 도움을 청하지 못했을까?
너에게 고통을 주지않으려고?
너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물론 당시 내 행위의 명분은 그랬었지만,
어눌하고 가식된 미소로 일관하다가
끝내 잠적하고만 나의 행위는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아니었으면,
수십년이 지난 세월의 뒤안길에서
남모르게 아파하고 저려하는 일은 없었을 것을----.
너와의 소식이 끊어지고
편지 쓸 일이 없어진 뒤로
나는 하루도 쉬지않던 일기도 접었고
틈틈히 만들어 나가던 글모음도 단념했었다.
한참 뒤,
정말로 한참 뒤,
다시 학업을 계속하고
지금의 이 길을 찾기까지 많은 세월동안을
펜대신 마음으로
종이대신 이 한 맺힌 가슴속에 차곡차곡 새겨두었지.
그리움과
갖가지 밀려오는 회한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지금도 나는
네가 없는 너의 고향을
가끔 버릇처럼 들려보곤하지,
옛 모습은 찾아볼수 없지만 역시 너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