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존재








    2000.11.13 밤에 대전 누이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시골 노모가 개한테 물려 병원을 다녀오셨다는 데 그후 전화를 영 안
    받는다는 전갈이었다. 깜짝 놀라 내가 시골에 전화를 걸어도 수신되지
    않았다.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은 방정맞은 생각조차 들었다.
    몇 차례의 시도는 실패. 한 삼십 분쯤 기다리니 오히려 노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월요일(11.13일) 아침 여덟 시경에 이웃집 개가 또 왔기에 개를
    붙잡아서 주인에게 '제발 개 좀 묶어 두라'고 하면서 건네다 줄
    요량이었단다. 작은 개도 늙은 노파를 얏 보았는지 손가락과
    손바닥을 세차게 물었다는 것이며, 노파 역시 '너한테 질소냐'하면서
    한번 움켜진 개를 악착같이 붙잡아 자루에 넣었단다.
    이 과정에서 물렸다는 것이다.


    무모한 행동. 피를 흘리는 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병원에 급히
    가야 한다기에, 차멀미를 심하게 하는 체질이라 버스를 타지 아니하고,
    십리 길을 걸어서 읍내에 나가 치료를 받았단다. 열 한시간이 지난
    일곱 시경의 밤인데도 노모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겁에 질린 목소리, 당혹감과 낭패감 그리고 분노에 떤 목소리였다.
    흥분한 노모의 목소리를 가라 앉혀야 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에 개를 묶어 두지 아니하고 놓아먹이는 개가 너무 많다며 바로
    이웃집인 뽀족집의 황씨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었단다.
    그게 마음이 걸려 하나뿐인 우리집 개를 묶어 집안에 가두었다는 소식
    일전에 들었다. 문제는 한 지붕 아래 두 집 살림을 하는 사람들이 개를
    열댓 마리나 키우는데 본집에서는 여덟 마리의 개중 큰 개 한 마리만
    묶어 두고 나머지는 놓아먹이며, 사랑채에 사는 사람 네는 여섯 마리를
    키우는데 다섯 마리를 놓아먹이는 바람에 이들이 온통 동네를 싸질러
    다니며 말썽을 피운다는 것이다. 그 집과 우리집의 거리는 불과 일 백 발자국.


    이웃집의 개들이 우리집 울안 뒤꼍까지 들어 와 糞尿를 퍼 지르는 바람에
    汚物로 집 안팎이 지저분하여 성가시다고 누차 말씀을 하셨다.
    심지어 한산 세모시의 재료인 모시를 햇볕에 바래는데 이 위에 똥을 싸고
    뭉갰단다. 또 노모는 한 마리뿐인 이쁜이 개밥을 끓이기에도 힘이 벅찬데도
    불구하고, 우리집 개는 입이 고급이라 먹이를 잘 먹지 않고, 대신 이웃집
    개들이 항상 울안으로 몰래 들어와 개밥을 훔쳐먹는 것을 못마땅했단다.
    더욱이 개 때문에 피해가 있다며 항의하는 이웃집 뽀족집(지붕이 뾰족함)
    으로부터 애매한 소리를 두어 차례 들었다는 억울함이 내재되어 있던
    차였단다. 그래서 우선 먼저 우리집 개를 묶어 두었으며, 그 후에 개구멍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케도 뻔질나게 울안에 파고 들어오는 얄미운 개를
    붙잡겠다는 옹심으로 그 기회를 노리고 계셨단다.


    결국 붙잡았으나, 남의 집 개한테 물린 분함과 狂犬病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아들한테 꾸중을 들을 일이 걱정이 되었던 모양 이였다. 다행히도
    의사가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며 노모를 위로한 모양이고 또 이틀 후에
    병원에 다시 한 번 오라고 했단다.



    포획하여 포대 자루에 가둔 개를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마을會館의 마이크로
    방송하였어도 개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단다. 정작 개 주인이라고 짐작되는
    아랫집의 여편네는 "자기네 개가 아니다"라고 발뺌을 하였으나 그의 姻戚은
    의뭉스럽게도 "개를 어서 풀어 주라. 그렇지 않으면 벌받는다"고 했단다.
    그러나 동네의 多數意見은 당연히 주인이 나타나야 개를 인도해 주는 것이지
    개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개를 풀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더욱이 사람을 물은 개는 죽여도 된다는 것이다. 이웃집의 한 노파는
    그런 벌이라면 당신이 대신 받겠다며 노모를 감쌌다 한다.


    불과 일 백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야랫집(아랫집의 사투리)의
    개라고 여겨지는데도 병원비를 부담할까 싶어서 '자기네 개가 아니다'라고
    짐짓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노모는 개 주인이 개한테 사람을 물으라고
    시킨바 가 아니므로 개 물림에 대해서는 당신의 불찰이라고 분명히 알고
    계셨다.


    문제는 개 임자가 묶어 두지 아니하고 많은 개를 놓아먹인 것
    (그것도 일곱 마리)에 대한 사과와 앞으로 어떻게 많은 개를 단속할
    것인지를 약속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제 어머니의 또래에 달한
    이웃집 노파에게 악살을 부린 이웃 아낙에 대한 응징이 될 모양이다.
    제 시어머니도 때려 주었다는 고약한 여편네에 대한 미움이 숨겨져 있었다.


    아내는 화요일에 급히 시골로 내려갔다. 서울 사는 며느리가 읍내에 와
    있음을 먼저 발견한 동네 사람이 노모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려 드렸단다.
    이에 노모는 서울의 아들에게 전화를 거셨다.
    "너희가 그렇게 걱정을 하면 自盡해서 더 못 살겠다"는 투의 가벼운 꾸지람
    속에는 은근히 며느리가 대견하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며느리가 익일 수요일 아침에 노모를 모시고 읍내의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할머니. 요것 때문에 서울시는 며느리 내려오라고 했어요?'라면서
    우스개 소리를 했단다. 면구스러워 狂犬病 때문에 걱정하였다는 노모를
    의사는 따스한 말로 부담을 덜어 주었단다. 아내는 수요일 오후 차로 귀경했다.


    문제는 포획한 개를 어찌할 것인가 하는 難題다. 서울시는 아들은 단호히
    그 개를 餓死시키라고 말씀 드렸다. 평소에는 사소한 생명조차 소중히 여기는
    성미였으나 사람을 문 행위는 응징을 해야 하므로 포획한 개에게 먹을 것을
    일체 주지 말라고 일렀다. 作爲가 아닌 不作僞로도 너끈히 개를 처단하는
    방안이었다. 개가 죽거든 나무뿌리 아래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死體를 묻어
    버리라고 말씀을 드린 터였다. 이는 개 주인에 대한 無言의 示威였다.


    우리집의 개 발발이(이뿐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영리하여
    평소에 주인인 노모가 먹이를 주려고 접근을 시도해도 動物의 警戒心을
    발동하여 항상 이삼 메타의 거리를 두어서 노모의 접근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금번에는 노모에게 붙잡히는 수모를 당했으나 결코 주인을 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웃집 개는 이웃집 노파에게 붙잡히는 과정에서 손가락 손바닥 및
    팔뚝을 물었다는 罪名으로 조만간 생명을 빼앗기게 될 처지에 놓여 있다.
    평소에 동. 식물을 사랑하는 나도 이번 일에는 어쩔 수 없다.
    사나운 것은 淘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해서 동정을 베풀어야 할 하등의 이유 없다.


    아내는 포대 자루를 들어보았더니 가벼운 무게였다며 안쓰러워 했으나 단호한
    시어머니의 결심에 감히 제 의견을 제시하지 못 하였다고 했다. 개를 가둔지
    나흘째 밤 목요일에 아내는 '가벼운 존재'인 개를 풀어 주라고 나에게 간청하였다.
    아내의 말을 좇아 노모에게 풀어 주라고 전화를 하였건만 노모의 대답은 단
    하나였다. 오히려 가슴이 멕힌다는 것이었다. 가슴 멕힌 것이 개 물림의 후유증과
    직접 연관되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노모가 '아프다'는 이유라면 '가벼운 존재'는
    어쩔 수 없는 죽음뿐이다(제 어미의 말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불효이므로 노모의 말을 믿어야 하는 아들의 입장임을 해량하기 바란다).


    노쇠하여 파리해진 노모의 건강이 점점 얇아진다. 하나의 생채기가 되어 客地에서
    사는 아들의 마음을 찢는다.


    2000.11.17(금)바람의 아들 최윤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