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수동


한 때의 젊은 날을 같이 보냈던 친우,
이윤' 仁兄에게 보내는 부치지 못한 편지.



윤 仁兄!
仁兄과 소식이 끊긴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사회의 소금 같은 존재로 살고있을 仁兄에게,
이미 10년 전쯤에 보냈어야할 편지를
이제서나마 이런 공간을 빌려 보냅니다.


1973년 봄이었으니, 꼭 30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화창한 3월의 봄날.
그 해의 봄도 여느 해처럼 어김없이 화창했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어두웠던 어느 날의 얘기입니다.
仁兄이 알다시피,
그 해는 내가 아버지를 영영 잃었던 해이기도 하지요.
(그 땔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인형이 알다시피,
내게는 오누이처럼 지내던 S가 있었지요.
그 아이는 우리들보다는 한 살 아래.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이었건만,
양쪽 집안에서 자유스런 왕래를 별로 간섭하지 않는 사이였지요.
그 집은 딸 부잣집(8녀), 우리집은 딸이 생산이 잘 안 되는 집이었습니다.
(아버지 형제들이 얻은 자식들 총14명, 그 중에 딸은 단1명)


S의 식구들은 이상하리 만치 내게는 무조건 친절했고...
우리 부모들을 그 아이를 친딸같이 대했습니다.
이것저것을 사주시며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정말 한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지요.
그 아이와 나와의 이러한 관계는 仁兄을 포함한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이 세상을 하직하며 내게 여러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종가의 장손으로서의 기본책무, 어머니를 위로하라 등등.
거기에 덧붙여, 장성하면 "S를 너의 짝으로 맞아라." 하는 말로 유언을 마치셨습니다.
그 아이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칠 때까지, 줄곧 상복을 입었던 걸 기억하고 있나요?


워낙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살아오던 나'는
그때까지 아직 그 누구에게서도 "異性"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던,
아니 표현하지 못하고 지내던 시절이었지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후의 어느 봄날에,
그 아이와 나는 집에서 한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동산으로 봄소풍을 갔습니다..
봄나물을 뜯었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


한참을 이곳저곳 헤매다 둘은 양지바른 곳에 앉았습니다.
"오빠! 아버지 말대로 할거야?"
"뭘?"
"나 말이야, 나중에 오빠와 살게 되냐구?"
"글쎄에....., 어쩌면...., 그렇지만 난 우선 군대부터 가야 돼"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
"오빠! 나 오늘 좀 슬픈데, 나 좀 안아주면 안되나?"
"......."
난 그날 처음으로 그 아이를 이성으로 안아봤습니다.


仁兄이 기억하는 대로 그 애와 나는 많은 우여곡절 속에
결국은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지요.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하던 날.
"신랑입장!" 하는 소리를 들으며 식장 입구에서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오빠! 나 왔어."
갑자기 피가 역류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아! 주간지에 내 이름이 나겠구나.'하는 생각도 스치고......
발걸음이 앞으로 나가질 않더군요.


"걱정 마, 그냥 보낼 수 없어, 축하하러 온 거야."
이 말을 끝으로 그 아이를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열 일곱에 만난 그 아이를 스무 일곱에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 후에 나는 정말로 한 곳에 붙어있질 않고
아내도 자식도 아버지가 당부하던 장손의 길도 버린 채
이 나라를 떠나 수많은 곳을 헤매며 살아왔지요.


10년 전 귀국해서 仁兄의 집에서 仁兄과 소주를 한잔 기울이던 날이었습니다.
仁兄의 어머님이 내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지요.
"애, ㅅㄱ야! S가 시집을 안 가고 사는 건 너 때문이다."
넌 그 애를 그렇게 버릴 수가 있었더냐?
그 애가 가엾지도 않더냐?
그 애의 불행한 모습을 보고,
우리 윤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속상해 했는지 알기나 하냐?
그 앨 버린 네가 잘 살 수 있었을까?
버릴 거라면 더 일찍 버리든지!"


S가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걸 난 그날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후의 S에 관하여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仁兄이 그 애 때문에 오랜 기간을 고심했다는 사실입니다.


며칠 전 大阪을 거쳐 京都 그리고 岡山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되돌아오는 신간선 열차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며 술을 한 잔 했습니다.
왠지 예전의 그 삼십 년 전의 날들을 생각하며,
혼자 슬픔에 잠겨 맥주 캔을 여러 개 비웠습니다.
열차는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지요.
나도 그렇게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시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숙소에 도착해서도 내내 잠을 설치다 귀국했습니다..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게 있습니다.
그 아이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다는 것과
仁兄이 그 아이를 맘속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모든 게 내 잘못만은 아니겠지만,
맘속에 무언가가 남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십여 년 전에 마음속에 써두었던 편지를
오늘 이렇게 밖에 보낼 수가 없습니다.
예전의 자기중심적이었던 나를 부디 용서해주길 바랍니다.
仁兄에게서 또 S에게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빼앗고 말았다는
사실을 영영 잊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윤 仁兄!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仁兄과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주먹다짐하다 코피를 흘렸던 그 날로,
바둑 한 수 물리지 못해 막말을 뱉어내던 그 날로,
등산 갔다 호우를 만나 이틀 밤낮을 산 속에 갇혀있던 그 날로,
그 때의 그 날로 진정 우린 되돌아갈 수 없는 걸까요?


제발 어디선가 仁兄이 이 편질 꼭 읽어주길 바랍니다.
仁兄의 건투를 마음속으로나마 빌어봅니다.


2003년의 어느 봄날에, 예전의 仁兄을 그리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