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최민식,045 : PUSAN, 1975




스승은혜 ....클릭





    1960 년대 가난했던 시절
    6. 25 이후 4년만에 태어나 소작농으로 살다가 근처 초등학교에 다녔다


    1년 농사는 쌀 5가마가 수확인 천수답 뿐...
    그 쌀을 가지고 5식구가 살림하고 밥을 먹어야 되니 점심은 다반사로 굶었다
    어쩌다 먹는다고 하면 찬밥 한 그릇에 물을 넣어 끓여서 양을 늘리고
    김치로 배를 채웠다.


    그 때 구세주가 있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옥수수와 탈지 분유
    지금 반미니 친미니 해도 그 당시 미국은 감사하기만 했다.
    한국사람들 굶어죽지 않은 것이...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배가 고프다.
    얼굴에 버짐이 생기고 아침도 제대로 못 먹으니 쓰러질 것 같다.
    점심 때 종이 울리기만을 학수고대한다


    드디어 점심 시간을 알리는 타종이 울리면
    집으로 빈 그릇을 가지러 간다.
    숟가락과 옥수수죽을 얻어먹을 밥 그릇
    그 때 얻어먹는 꿀꿀이죽, 옥수수죽은 진짜 꿀맛이다.
    아! 더 좀 먹었으면 불과 세 숟갈을 2분만에 먹고 나니 죽이 없다..


    양으로 치자면 옥수수 가루는
    정량의 3분의 1인 애들 손으로 한 움큼 정도밖에 안 된다.
    그 1학년을 맡은 송 ㅇㅇ 아줌마 선생이 눈치를 준다
    나가라는 눈치..

    "소사!"
    죽을 떠주는 소사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배고파 더 먹으려고 서 있는 거지 새끼 아이들.."
    그 앞에서 말한다.
    "한번 주고 더 주지 말란 말이야."
    "맨날 얻어먹으러 오는 거야 저 ㅇㅇ 들은."


    그 때 여선생의 치켜 뜬 눈초리
    그 눈초리가 나는 40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영양실조에 걸린 저 거지 새끼들에게는 무상으로 주는 꿀꿀이죽조차도
    더 주지 말라는 매서운 눈초리......


    30 년이 지난 나중에야 알았다.
    여자 동창으로부터.. "넌 그것도 몰랐니.?
    그 때 나온 옥수수가루, 탈지분유를 그 여선생이 횡령하여 팔았다는 사실을,
    자기가 아는 친척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그 것을 횡령하기 위해서 정량도 못 먹게 하였던 것이다
    '벼룩이 간을 떼어먹지 ..'


    그 때 이후 나는 다짐했다.
    나는 나중에 커서 가난한 자들 것을 절대 떼어먹지 말기로 하자.
    그러면 죄받는다는 것을 느끼며 현재까지 살아가고 있다.


    두 번째 선생님은 초교 4,5,6학년 담임이셨던 최광훈선생님이 나를 부르신다.
    못사는 학생 중에도 특히 다 떨어진 옷을 입은 나를 부르신다.
    아이들 다간 다음에 조용히 학교에 남으라고 하신다.


    둘이 앉아 있다.
    이 선생님 자기 웃옷을 벗는다, 그리고 상처를 보여주신다.
    "이 상처가 무엇인줄 아는가?
    내가 돈이 없어 학교 다닐 때 일하다 다친 상처다.
    너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잘살 수 있다.
    근검 절약하면 잘 산다.
    너도 희망이 있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나에게 옷 한 벌을 주신다
    이거 입으라고, 내가 얻어 온 것이라고,
    선생님 월급으로 샀으면서도 얻어 온 것이라고 스스로 낮추는 그 모습.


    그 때 나는 월남으로 가는 부대 앞
    아느냐 그 이름 백마부대 용사들하며 노래를 부르는 부대 근처에 살고 있었다.
    사격장에 가서 탄피를 주워 팔아서 그 때 돈 10원씩을 매일 저금했다.
    먹고 싶은 엿도 못 사먹고 아까워서 몽땅 저금했다.


    그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일부러 나에게 칭찬을 하신다.
    "저 학생 같이 열심히 일하고 저금하는 것을 본 받아라"고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 격려의 말씀이 지금도 나에게 교훈이 된다.


    그래, 나는 지금도 그 때 두 선생님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려서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의 말씀과 인품이 그 학생의 앞날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
    나는 그 선생님의 교훈으로 지금 그래도 중산층으로 살며
    나름대로 양심을 지키며 살고 있다.


    글/유정천리




          답글.......낭만


          봄은 부끄러움
          노란 현기증 자존심이었다.

          꽁보리밥 도시락
          아지랑이 때문이다
          쓰러지던 초등 4년 11살 소녀.

          배고픈 어린 자존심
          뜯고 뜯던 노란 민들레
          민들레 꽃 눈물.

          꽁보리밥 도시락
          가방 속에서
          꼬르륵 꼬르륵 보채던 봄.




        나에게 있어 봄은 현기증입니다.
        가난이 부끄러움으로
        아롱아롱 피어나던
        아지랑이에 쓰러지던 어지럼증입니다.

        유난히도 가난했던
        초등교 4학년 봄 소풍.
        춘궁기와 노란 어지러움과
        허연 버짐 피던 눈만 큰 소녀를
        떠올립니다.

        팔랑 팔랑 날던 노란나비 떼는
        꼬르륵거리던 허약한 다리로는
        절대로 잡을 수 없던 꿈이었습니다.

        애꿎은 잡초만 손에 풀물 들도록
        뽑고 또 뽑아대던 아픈 기억의 봄.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예쁘고
        앙징맞게 피어나던
        봄 언덕은
        다시는 가볼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남쪽의 낭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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