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그렇고 3일간 연휴가 있었던 것은 회사가 좋아서가 아니다. 주5일제야 이미 한국에서도 실시되고 있다는 소식 들었다. 그리고 또 하루는 공휴일이다. 일요일과 공휴일이 겹치면 월요일이 공휴일이 되니까. 그런데 토요일이 공휴일과 겹치면.... 그냥 꽝이 된다. 즉 토요일은 법정 공휴일은 아니다. 그랬든 어쨌든 주 40시간 이상 근무하면 시간 외 수당을 주라는 게 원칙인데 우리 회사에서는 시간외 수당은 줄 수 없으니 빨리 집에 가라 주의다. 그러나 알다시피( ㅎㅎ 아니 아마 모를 거다) 내 성격이 완벽 주의자라 하던 일 내 팽개치고 집에 가는 일은 절대 못하구.... 그래서 내 목 내가 조이며 미치겠다니 죽겠느니 투덜투덜 살고 있다.
나 한국에 있을 때는 주 5일제란 택도 없는 얘기였다만, 어떨 땐 한달 동안 하루도 못 쉬기도 했다만... 하하 좋은 세상이다. 이게 다 미국 본떠서 생긴 제도이니, 미군 철수 절대 반대당 !! 어쨌든 근무시간을 줄여야 실업률이 낮아진다. 둘에게 줄 월급 셋에게 나누어주자... 일본의 길고 긴 불경기의 터널을 그나마 견디어 나갈 수 있는 힘은 나누는 정신이다. 일도 줄고 월급도 줄고.... 다 참을 테니 목은 치지 마라.... 그러고 들 사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매일 바쁘다.
이야기 2.
니 소개 시켜 줄 일본 여자 찾아보았다만.... 눈에 안 띤다. 제일 먼저 물어 보는 말이 돈 많은 사람이냐?.... 근데 대답을 못하겠다...ㅎㅎ 얼마 전 메일에 책 써도 별로 돈은 안 된다고 그랬잖냐..... 그냥 밥은 먹고산다고 그럴 수밖에..... 일본에 놀러 다닐 여유(시간적) 없잖아? ㅋㅋ 신문쟁이들은 바쁘다며. 그렇담 돈 많고 시간 억수로 많은 과부를 잡아야 하는데.... 할머니거나 뚱뚱하고 못생겼거나 마르고 신경질 적이거나 의심 많은 사람밖엔 없다. 너의 빈 가슴 채워 줄 만한 여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으랴....... 내가 질투??? 우하하 .... 지금 대답은 하지 말자. 사람의 속이 안 보이는 건 정말 위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로의 마음을 꽤 뚫어 보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그건 비극의 시작이리니. 너나 나나 그 속마음을 그 옛날에 다 꽤뚫었었더라면 그 옛날에 이미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파장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의 강을 건너 그리운 마음으로 이제 재회하는 것도 그때 서로의 마음이 보이지 않았던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에게
어제 저녁 너의 긴 글을 받고 프린트를 했다. 가방에 넣고 출퇴근길에 되풀이 읽었다. 인쇄물 세대라서 그런가, 화면의 글보다 종이 위의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웹사이트에서 너의 이름을 발견한 건.... 그것은 한 줄의 부음이었다.
▲○○○(△뉴스 국제부장)씨 모친상 = 20일 오후 7시 30분 XXX 병원, 발인 22일 오전 8시 ☎(053)959-4441 (서울=연합뉴스) (끝)
그걸 읽고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한참 동안 너를 찾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건 이게 처음이다. 그래도 너는 참 행복했구나. 어머니께 빚을 갚으려면 자결을 할 것이 아니라 행복 하려무나. 네가 어머니께 불효를 했다면 그것이 그 빚을 갚는 유일한 길일지니.
우리 어머니에게 나는 절망이었다. 내가 딸이라서 가 아니다. 아들이었던 딸이었던 임신 그 자체가 절망이었으리라. 우리 어머니는 날 임신 할 당시 여군 장교였다. 결혼은 했으나 아직 혼인 신고는 하지 않은 상태였고 근무하고 있던 육군 본부에서는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꿈도 많았으리라.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리라. 그런데 임신을 한 것이다. 퇴역을 결정하며 그녀는 절망하였으리라.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항상 히스테리였다. 아버지가 안 계신 날이면 나는 어머니의 폭력을 감내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계모인지 모른다고 늘 생각했다. 늘 가출을 꿈꾸었다. 마음속에서는 몇 번이나 존속살인이 일어났다. 어린 나는 지금 생각해도 참 잘 견디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당신으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스러웠었던가는 모르신다. 거의 30년 전에 아버지와 헤어지신 채 지금은 내가 보내 드리는 돈으로 생활을 꾸리신다.
우리 아버지에게 나는 꿈이자 희망이었다. 인민 해방군으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던 운명의 아버지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3년 반공 포로로 포로수용소를 나왔을 때 그는 아직 20을 갓 넘어섰던 청년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은 띠다. 즉 나는 아버지가 만24세에 보신 첫 자식이자 희망이었다. 그 뒤로 남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나도 아버지의 사랑은 내 것이었다. 옷도 사다 입히시고 신발도 직접 사다 신기셨다. 등에 업고 그리고 품고 주무셨다. 머리가 커지며 당신의 뜻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는 딸에게 절망 이상의 배신감 마저 느끼셨으리라. 지금도 나만 보시면 얼굴이 환해지시는 아버지.... 누구에게 하는 말씀이 "내가 제일 기대를 했던 건 큰 녀석이었는데... 그 녀석이라면 뭔가 되어 주리라 기대를 했는데..." 장남은 지금도 불만이다. 어려서 자기는 줄창 누나 그늘에서 찬밥 신세였다고. 그런데 그 넘이 제일 출세를 했다. 아버지도 그 넘이 모신다.
울 외할머니.... 나만 예뻐하셔서 ... 시어머니 무서워서 기를 못 피던 우리 외숙모 할머니 돌아가시고 이제야 하시는 말씀이 "어머님은 친손주 보다 외손녀를 더 예뻐하셨는데 그때는 그게 서운하더니만...." 아들을 낳아도 딱 한번 미역국 끓여 주고는 그만이었단다.
그런데 난 모두에게 사랑 받았던 기억보다 어머니께 학대받았던 기억이 더 진하게 남아 있다. 나는 절대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너처럼 슬퍼할가? ..... 네가 부럽다.
지금 우리 어머닌 날 너무 사랑했다고 하더라. 지금도 사랑한다고. 근데 난 어머니가 가없다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다행이다.
오늘은 바람이 차다. 이젠 집으로 가야지. 텅 빈 사무실에 남아서 너에게 답글을 한 시간 이상이나 쓰고 있다.
난 언제나 너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널 다시 찾아내는 건 언제나 내가 아니더냐? 이게 세번 째다... 넌 잊었겠지만..... ㅎㅎ 아... 아니다 내가 사라졌던 적도 두 번 정도 있나 부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