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 외국으로 떠나신 부모님. 마흔을 조금 넘긴 나이에 부모님과 헤어진 여배기. 엄마의 서랍을 정리하다 발견한 분홍보자기에 쌓인 작은 보따리.
풀어보니 나의 첫 직장생활부터 모아둔 월급봉투며 각 종 요리법을 정리해둔 대여섯권 분량의 요리노트 가족 앨범이 있었슴에도 별도 보관해 두신 누렇게 변해버린 까까머리 색동저고리 헤벌죽한 웃음의 여배기 사진 몇 장.
아버지의 일본출장시에 사오셨음직한 책 한권.. <딸에게 주는 신혼초기의 교육용 거시기 뭐시기한 책>... 제목과 몇 장 정도 번역해 놓으신 작은 책 한 권. 내게서 받은 각 종 기념카드와 편지묶음. 용이 새겨진 은 쌍가락지등등....하여 몇 가지의 소품들.
엄마 나름대로 기념이 될 만한 나의 물건들을 보관해 두신 듯. 엄마는 이 작은보따리를 언제 나에게 주실려고 했는지.. 직접 전달 받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딸은 자라면서, 철들면서 엄마의 친구가 된다고 하는데 친구는 아예 접어 두고라도 자식노릇 변변치 못한데 멀리 헤어져 있으니 별 일도 아닌 일에 목에 힘줄 세워가며 대들던 기억만 새록새록 난다.
한 밤중에 자다말고 일어나 앉으니 더욱 그리운 엄마 생각.. 옆구리에 품고 자던 녀석.. 부스럭거리며 낑낑대니 엄마도 예전에 나를 품고 잘 때 이랬을까?
아마도 엊저녁에 보고 잠든 드라마 <인어아가씨> 때문인가? 딸들이여.. 지금 님들은...엄마의 친구가 되고 있나요?
아버지 일기장
아주 오래 전, 케케묵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중학교 다닐 적이라 기억되는데 한창 사춘기라는 고지를 향해 달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지하실에 들어가 이것저것 들춰보다가 누런 공책에 파란잉크가 점점이 번진 요상한 것을 발견했던 것이었습니다. 호기심 발동하여 들춰보니, 아하하... 아버지가 군대시절 쓰던 일기장이었습니다.
한 장한 장 넘길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한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습니다. 그 동안 들어오고 보았던 엄마랑 어쩌고저쩌고.. 예전엔 엄마랑 만날 땐 이랬고 저랬고.... 아버지가 들려주던 이야기와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 행복했던 시간 뒤에 아버지가 엄마 몰래 딴 여자랑 "또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기장 구석구석에 낱낱이 고백되어 있었습니다. 이뿐 소녀그림도...잉크로 번지게 그리는 대나무 그림사이로 우리 사랑 변치 말자...뭐 이래가면서..에구..그 지하실에서의 한나절은 다시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도록 하는 나와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나기를 며칠... 그 일기장에 적혀있는 여자의 이름을 머리 속에 콕 처박아놓고 내 평생 안 잊고 살다가 언젠가 내 앞에 나타나면 그땐 울 엄마 가슴에 생채기 냈을 그 여자를 쥐어뜯어 놔야지 이를 앙 다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그런데.... 사람이 평생 배우고 산다는 그 말이 또 한번 증명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할 일없이 이것저것 뒤적이는 것이 이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취미생활의 한 부분인지라...또 어느 날 무엇인가를 뒤적이다가 그 의문이 풀리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일기장에 적혀진 그 이름이... 아버지를 사랑의 열병으로 앓게 했던 그 이름이 바로 <안해>였습니다. <안해> 는 바로 아내였던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바로 울 엄마였던 것이었습니다.
군대생활의 얽매임 속에서 그리워 부르던 이름 <안해>여!! 집에 돌아오면 어른들 눈이 어려워 미리 마중 나와 동네 어귀에서 만나면 수줍어 고개 못 들던 <안해>여!! 이렇게 이어지던 아버지의 일기장 속의 여인...안해..
울 엄마 이름은 분명 <영화>인데 도대체 <안해>는 또 누구란 말인고? 별 것이 다 절절 끓어오르던 사춘기 접어들 시기의 얼빵이 여백의 모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