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가슴 설레게 만들고, 희망을 불러오고, 꼭 올 봄에는 내게 봄처녀가 와 줄 것만 같은 싱그러운 봄을 맞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내게는 마음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잔잔한 슬픔이 몰려온다.
1960년 4월의 봄. 별채에 올린 글-어느 소녀에 대한 추억-에서 약간은 언급이 되었지만, 내가 태어나 첫 번째로 맞게된 시련이 그 해에 시작되었다.
4월 혁명. 어린 나는 그게 어떤 불행을 가져오는지도 모른 채 '탱크를 몰고 온 군인아저씨들'이 나눠주는 별사탕과 건빵에 현혹되어 졸졸졸 뒤를 쫓기도 하고, 피투성이의 진명학교 누나들이 길가에 무참히 쓰러진걸 보고, 겁도 없이 옆에 붙어 앉아, '누나 왜 이래? 어디 아파?' 이런 말을 묻기도 했다.
그러길 몇 날. 어느 날 밤, 아버지의 손에 끌려, 멀고도 먼 어느 산골자기 초가집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쌀이 없는 게 엄청난 고생이란 걸 심각하게 체험한 것도 그 때의 일이다. '어느 소녀에 대한 추억'을 남겨놓고 그 잔인한 4월에 대한 기억은 내게서 멀어져갔다. 숱한 고비를 넘고 고향인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데는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다른 나라와의 인연도 이때부터 생겼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1973년 3월의 봄날. 국립중앙의료원-메디컬센터라는 말로 익숙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과과장님이 만나자고 한다. 며칠 전, 아버지가 그 곳에서 간세포조직검사를 받았는데, 그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얘기다. 이미 아버지에게는 '검사결과서-이상없음'이라는 형태로 전달된 상태라, 특별히 내가 의사를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만나자니까 일단은 찾아갔다.
의사:"환자(아버지)의 보호자가 특별히 없으니(어머니가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말하기 곤란하여), 자넬 오라고 한 걸세." 나: "특별히 중병은 아니라는 서류를 이미 주셨지 않아요?" 의사: "내 말 잘 듣게. 오늘부터 집에 가면, 이유불문 아버지께 온갖 효도를 다하게." 나:" ...... 얼마 남지 않으셨군요? 몇 년이나 사실 수 있을까요?"
순간 러브스토리의 주제곡, 비슷한 홍콩영화의 진추하가 부른 노래... 이런 것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의사:"오늘 가시건, 내일 가시건 이상할 게 없네. 의학적으론 이미 사망의 단계를 넘으셨네. 간암 말기 중에서도 중증이라네. 무조건 효도하게.'
그렇게 의사와 면담을 마치고,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어 눈물범벅으로 귀가했다.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동생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누운 상태에서 거동을 못하게 되었다. 의사가 매일 왕진을 오고..... 아버지는 심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픔을 참을 수 없어 내는 소리를 차마 옆에서 들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기를 몇 날 몇 일. 난 평택에서 의사생활을 하고 있던 친척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 분은 내 얘기를 듣자마자 '아~,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그렇게 착하게 살아온 M.S.이에게 이 무슨 청천벽력이냐'하시며, 한 동안 대성통곡을 하시더니 의료기구와 약품 몇 가지를 챙겨서 급히 나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3시간이 넘는 동안을 택시 안에서 의사할아버지와 나는 계속 울면서 왔다.
난 지금 눈물을 흘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진정시키며 진찰을 하기 시작하셨다. "얘, M.S.아! 크게 어려운 병은 아니니 시간이 좀 지나면 차도가 있을 게다. 요즘 스위스에서 좋은 약이 생산되고 있으니 조만간 내가 사 가지고 올 거다. 통증이 심한 것 같으니 모르핀을 좀 주마. 푹 자거라' 이런 얘길 여러 번 되풀이하시며....."
또 하루가 지났다. 아버지는 기어코 장내출혈을 일으키셨다. 호흡을 할 때마다, 입에서 코에서 범벅이 된 피가 올라온다. 온 방안이 피투성이다. 고통의 신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무려 1리터 이상의 출혈이 있은 후, 아버지는 탈진상태로 빠져들고... 또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약간의 의식이 돌아온 아버지는 내게 속이 시원해지는 걸 달란다. 사이다를 한 컵 따라서 한 모금 한 모금씩 흘려 넣어 드렸다.
희미하나마 잠시 의식을 찾은 아버지의 유언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와 동생과 S의 흐느낌. 끝내 어머니는 유언을 다 듣지 못하고 방을 박차고 나가고... "S.K.야! 어머니를 위로하거라. 네 동생 잘 보살피거라. S는 심성이 고운 아이고 행동거지가 바른 아이다. 장성하거든 꼭 그 아이를 너의 배필로 맞아, 아버지의 며느리로 삼아다오. 고해성사를 못 하고 가는구나......" (아버지가 카톨릭 신자인 것을 난 그 때 처음 알았다)
다시 아버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고. 의사할아버지와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걸 무언중에 알고 있었다. 의사할아버지는 모르핀을 여러 대 주사하였다. (라이언일병 구하기란 영화를 보면, 총에 맞은 위생병이 자신의 상태를 알고 모르핀처방을 요구하는 장면이 있다) 잠이 든 아버지 옆에서 몇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게서 떠났다.
3일 후, 할미꽃이 피어오르는 동산에 아버지를 묻었다. 관이 놓여지고 내가 한 삽의 흙을 뿌리는 순간, 청천하늘에선 갑자기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아이고, 이 분이 가시는 걸 하늘도 서러워하나 보군' 모두가 이런 말들을 되뇌는 속에 아버지는 그렇게 차디찬 땅 속에 육신을 눕히셨다.
내게 두 나라의 말을 가르쳐주시고, 천자문을 가르쳐주시고, 양반철학을 새겨주시던 아버지. 나의 스승이었던 아버지를 잃은 그 해의 봄은 내겐 잔인한 달이었다.
오윤/할머니
베리굿맨의 자전적 소설 그2
"베리굿맨의 봄은 잔인했다."
봄은 잔인했다
1974년의 봄. 그 해의 봄날을 나는 진해훈련소에서 맞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자 나는 한 사람의 해병대원의 길을 가고 있었다. 66킬로그램의 몸무게가 훈련소를 수료할 때는 56킬로그램으로 변해 있었다. 눈에서는 광채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해병대 제267기 군번9390878'이라는 영광의 표식이 내게 주어졌다. 「누구나 될 수 있는 해병대원이라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택하지 않았다」는, 멋들어진 말 한 마디로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해군행정학교에 위탁교육을 받으러 갔던 나는, 해병대창군이래 최고점수(600점만점, 598점수료)로 그 곳을 수료했다. 注:해병대는 오로지 상륙전이나 기습공격을 전제로 한 '공격전문군대'이기에 행정교육부서나 의료부서가 없다.(물론 '후퇴전술'이라는 개념도 없다. 뒤쪽으로는 바다만 있을 뿐인데 어디로 후퇴하나? 옥쇄작전 뿐이다.
그러니까, 용감무쌍한 거다. 끌려가지 않고 스스로 택했으니 더욱 용감하다.) 해병대복장을 하고 있는 군의관이나 위생병은 모두 해군에서 온 사람들이다. 위화감을 없애려 그들에게도 해병대원복장을 입힌다. 따라서, '펜대 굴리는 공부시키는 행정학교'가 해병대에 있을 리 없다. 해군이나 육군에 필요한 인원만큼의 해병대원을 보내서 교육을 받게 한 후 되돌려 받는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작대기 하나 짜리 이등병'이, 타군이 운용하는 교육 부서에 가서 최고점수로 수료하자, 해군교육기관의 장(長)이었던 해군교육단장(장군)은 감사하게도 내게 10일의 휴가명령을 내렸다. 나는 어느 새, 최고의 전투력(기습특공대원1기, 특등사수, 태권도 5단 등)과 행정능력을 겸비한 한 사람의 해병대원으로 변해 있었다.
1975년의 봄. 내게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작대기 짜리 사병이지만 '비밀취급인가자'의 위치에 있던 난,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해병대와의 합동훈련을 위하여 어떤 함정에 배치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어느 날, 암호(알파, 브라보, 호텔, 로미오 등으로 사용하기도 함)로 수신된 한 장의 전보를 받았다. 자식을 앞세웠다는 쓰라린 심정으로 살아가시던 할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는. 내게 전보가 도착한 때는 이미 장례가 끝난 후. 나를 지극히도 아껴주던 또 한 분을 그렇게 잃었다.
내겐 할머니가 여덟 분이 있었다. 57세까지도 아들을 얻지 못한 할아버지의 집념의 결과다. 그분은 아버지를 낳아주시고, 그래서 나를 세상에 나오게 해준 할머니였다. 족보에 오른 세분의 할머니 중, 한 분이다.
봄은 또 하나의 상처를 내게 남긴 채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해병대의 시계도 그냥 돌아가고 있었다.
1976년 8월 18일에 일어났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미군 장교, 사병 수명이 목숨을 잃었다. 즉각 '데포쿤 투'가 발령되고, 그 시각부터 우리 해병대원들은 하루 온종일 24시간을 완전무장한 채로 대기했다. 화장실조차도 배낭 메고, 총 들고, 수류탄차고, 착검하고, 철모 쓰고 갔다.
물론, 잠도 완전무장 그 상태대로 잘 수뿐이 없었다. 해병대사령관의 명령이 내려지면, 우린 구룡포 앞 바다에 떠 있던 미7함대의 항공모함에 타기로 되어 있었다. '아아~, 낼모레가 제대인데.... 난 원산이나 해주 앞 바다에 뼈를 묻는구나, 아~~!' 북쪽의 사과와 책임자처벌, 문제의 미루나무벌목을 조건으로 그들의 행위는 용서되고, '데포쿤 쓰리'로 비상태세는 한 등급 하강. 1976년 9월 14일. 드디어, 난 예비군복 한 벌로 전역을 했다.
내게는, 고령으로 세상 떠날 날만 기다리던 또 한 분의 할머니가 동쪽바다건너 이국 땅에 있었다. '조선'이 해방되어 어쩔 수없이 이 땅을 떠났던 그 분은 나를 불러드려 자신의 곁에 두고자 했지만(할아버지는 4월 혁명 후에 사망), 난 그분과 만나, '한국에서 한국의 가족 곁에 살아남기'로 했다는 뜻을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분은 나를 끌어안고 몇 일 몇 날을 통곡을 하셨다. 내게 피를 나눠준 분은 아니지만, 오직 나 하나만을 자손으로 알고 한 평생을 살아오던, 그분의 임종도 결국은 못했다.
우리의 부모들에겐 해방된 조국이었지만, 그분은 갑자기 여기가 '남편의 조국에서 낯선 땅'이 돼버리고... 눈물로 귀국했던 그분은,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킨 손자를 한 평생 기다리다, 그 손자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곳, 동경의 어느 병원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
어떤 남자가 외국생활 수십년만에 귀국했습니다. 외국마눌도 같이. 제법 큰 기업에 간부로 불려온 거지요. 그런데, 살다보니 여간해서 적응이 안되드랍니다. 정신적인 괴로움을 주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였지요.
1.운전할 때 외국 : 엉금엉금 기어가도 누가 뭐라 안함. 여기 : 야! 이 똘아이빙신아! 운전도 못하는게시리..뒈질라고..퉤퉤.
2.직장 외국 : 가만히 있어도 일한 만큼 돈줌. 여기 : 일보다는 눈도장을 잘 찍는 넘이 무조건 출세.
3.핵교 외국 : 명문 비명문은 있지만, 일단 회사 들어가면 같은 조건으로 승부. 여기 : 외국핵꾜는 소용없음. 동창 힘을 못 빌림.
4.술집 외국 : 혼자 가도 됨. 여기 : 혼자가면... 오빠! 실연 당했어? 마눌 도망갔어?
5.식사 외국 : 한식, 양식, 일식 이런 게 값이 대개 같음. 여기 : 일식, 이거 정말 뒈지게 비쌈.
좌우지간, 살아가기가 여러모로 힘들었답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결국 노이로제에 걸렸지요. 사람 만나기가 싫어지더랍니다. 만사 의욕상실-이렇게 되었답니다.
서른 몇 살 먹은 그, 스물 세 살 먹은 그의 마눌. 그 : 밤이 무서버! 그녀 : 날 좀 어케해봐! 이런 결과가 되었답니다.
직장에 휴직원내고, 다시 그녀의 나라로 갔답니다. 요양을 간 거지요. 가족소유의 어느 별장에 처박혔답니다. 신(辛)라면 몇 개, 술 왕창, 쌀 쬐끔... 이런 걸 가지고 그 별장에 진을 쳤답니다. 그 곳은 별장촌이라 별장만 5백 채 정도 있는 곳이랍니다. 우리나라에는 비슷한 데가 없다지요, 아마. 중국 따롄에 가면 대만사람들 별장촌이 있는 데, 그 곳과 거의 흡사하다고 합디다.
그런데, 계절이 아닌 때(한겨울)에 갔기에, 오로지 이 사람네 부부만 그 별장촌에 원시인처럼 남은 거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야산에 오르고, 내려와서는 온천욕하고-욕탕물이 온천수-, 아무 때나 밥 먹고, 아무 때나 술 먹고, 티브이 안보고, 신문 안보고, 전화조차 떼어버리고..... 그렇게 살았답니다.
오후가 되면, 어슬렁어슬렁 한 십 킬로쯤 걸어가 '시골 파칭코'에서 하루에 10만원정도 벌기도 하고... 반경 5키로 이내에 사람이라곤 개미새끼하나 없는 데서, 이런 모습으로 두 달여 간을 살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흰 눈이 엄청나게 내렸답니다(해발1500m정도의 곳). 오고 또 오고... 내리고 또 내리고, 펑펑 내리고....... 무릎까지 덮일 정도였답니다.
이 때, 이 분이 마눌을 끌고 밖에 나왔답니다. 별조차 꺼진 밤에 오로지 불켜진 집 딱하나. 온세상이 눈밭.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한참을 마당에 내려서서 죽은 듯이 눈 내리는 하늘을 보았답니다. 그렇게 한시간도 더 지나고... 추워오기 시작했답니다. 오돌오돌 떨었답니다.
마눌이 그에게 다가가서 가슴을 부비며 몸을 녹여주었답니다. 그리고 위로도 해주었답니다. 이런 말로.
아나타! 이마노 마마노 안타오, 에에엔니 아이스루요. 제히 간밧테요. 아타시와 안타노 타메니 이키테루와. 하나시타구나이카라 스테나이데 네. (번역) 여보! 지금이대로의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제발 힘 좀 내세요. 저는 당신 때문에 살아가고 있어요. 헤어지는 건 싫으니까 버리면 안돼요.
이 친구, 빠져나갔던 용기가 한순간에 되돌아오더랍니다.
"그래! 나에겐 적어도 응원군이 한사람은 있구나. 내가 살아야하는 이유가, 이 여자에게는 삶의 전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참아왔던 눈물과 용기와 욕망과... 이런 것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답니다. 하얀 눈 위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뒹굴고, 뒹굴고 또 뒹굴었답니다.
실로 일년이 넘도록 참아왔던 모든 응어리를 한번에 털어 내듯 두 사람은 오열과 눈물로 눈밭을 녹였답니다. 십분 이십 분....시간이 또 흐르고, 눈이 녹아내려 눈(雪)물과 눈물이 같이 흐르고, 두 사람의 눈물이 한껏 흘러내리고......
그들은, 그 이튿날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답니다. 두 손을 꼬옥 잡은 채....
(그 후의 그의 마늘의 전언) 내게 있어서 '최고의 밤'이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이었습니다. 눈을 내려준 하늘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