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소녀/박수근
며칠 전 강남역에서 용인으로 버스를 타고 오는데 발 밑에서 무언가 걸리는 게 있어 집어보니 빨간색의 두툼한 여자용 지갑이었다.
앞, 뒤에 아무도 없어서 주워들고 '이걸 어떻게 하지?' 하다가 집에 가서 지갑에 연락처가 있을 테니 돌려주면 되겠다 싶어 가져오게 되었다.
집에 와서 지갑을 열어보니 주민등록증, 학생증이 2개(각기 다른 학교), 신용카드, 직불카드 등 5개, 전화카드 5매, 교통카드, 사진 몇 장, 극장 공연티켓 지난 것, 만원 짜리 상품권 그리고 현금 오 천 원 등 가득 차 있는데, 어디에도 연락 전화번호가 없어 그냥 있다가 다음날 아들에게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더니 하는 말이,
"아빠, 요즘은 잘못하면 소매치기로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 우체통에 넣거나, 버리는 게 나아요." 라고 하기에 그도 그럴 것 같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아침, 또다시 그 문제의 빨간 지갑이 눈에 뜨이는 게 아닌가? "아! 저걸 잃어버린 아가씨는 얼마나 속을 썩일 것인가?" 나도 얼마 전에 지갑을 잃어버리고, 다시 발급 받으려고 읍사무소, 면허시험장 등을 몇 번씩 다니고 카드회사에 전화해서 일일이 대답하면서 잃어버린 자신을 원망했던 일이 생각나서 그래도 본인한테 알려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지갑의 학생증에 있는 용인의 Y대 학생처, 국악과 사무실 등을 수소문해 겨우 연락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01x-xxxx-xxxx로 전화하니 받을 수 없습니다. 하기에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하는 문자로 "황x주씨 지갑을 잃어 버렸으면 연락바람.01x-xxx-xxxx."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후 전화가 와서 내가 "지갑을 잃어버린 황x주씨 맞습니까?" "네" "이거 내가 보관하고 있는데, 지금 어디입니까?" "서울인데요, '여긴 용인 신갈인데 지갑을 전해 주려고 서울에 갈 수는 없고, 내가 오전에 밖에 시간이 없으니 학교 갈 때 신갈에서 전화하면 줄 수 있으니 그렇게 하지요" "네" 하고 끊었다.
그런데 문제는 몇 분 후 내 전화로 문자가 들어 왔다. "나 안 갈 거야 지갑 샀어 " 그래서 허, 참. 요즘 애들은 그런가 하면서 내가 문자를 괜히 보냈나봐 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황x주 지갑가지고 계신 분 맞지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맞는데 황x주가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누구지요?" "저는 황x주의 오빠입니다." "그래서요" "그 지갑을 우편으로 보내줄 수 있습니까?"
"우편이고 뭐고 본인하고 통화해서 준다고 했는데 온다고 했다가, 다시 안 온다고 하더니 이번엔 웬 오빠라는 사람이 전화해서 보내 달라니 우편으로는 보내지 않겠습니다." 사실 우리 집에서 우편취급소는 약 1km정도 떨어져 있다.
"꼭 본인이어야 하나요?" "네, 본인 확인을 해야 되겠네요" "그럼, 그만 두지요" 라는 대답.....
우리 같은 노인들에겐 지갑 속에 용인과 청주에 있는 두개의 대학의 학생증이 있는 것도(동일인이)이상하고, 또 대학생 정도면 자기가 잃어버린 지갑을 보관하고 있으면 고마움을 표시 할 수 있을 텐데, 반말로 문자를 받으면 기분이 좋겠는가?
그래서 내가 소매치기로 오해받고는 절대 돌려주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서랍 속에 던져 넣고 한 시간쯤 지났는데, 전화가 울렸다.
"아, 거기 황x주씨 지갑 습득하신 분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지갑을 습득하시면 규정에 파출소에 가져다주게 돼 있습니다" "대체, 당신은 또 누구시요? 내가 주운 건 여자 지갑인데 왜 남자들이 전화해서 난리요?" "예, 여기 수서 파출소입니다."
"규정이 어떻게 된지는 몰라도 난 지갑에 카드도 있고 해서 본인한테 주려고 하는데 웬 경찰이 나타나 전화하고 그러슈. 난 그렇게 못 하겠으니 본인이 직접 연락하든지 하시요."
"물건을 주웠으면 당연히 파출소에 가져다줄 일이지 이거 질이 나쁜 사람이구먼," "뭐 질이 나빠? 당신 말 다했어? 파출소건 뭐건 난 그렇게 못하겠다" "이거 안 되겠구먼" 하면서 찰깍 끊는 게 아닌가?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 발신전화번호로 전화했다. "수서 파출소 xix경사입니다." "방금 전 지갑 때문에 전화 받은 사람인데 통화한 사람 바꿔 주쇼. 아니 지갑을 주워서 돌려주려고 연락했더니 이젠 소매치기로 의심하는 지 그 놈 좀 바꿔 보시오."
"지금 나가고 없습니다. 신고한 본인을 바꾸어 드릴까요?" "난 내가 통화료 내고 통화하기 싫으니 잃어버린 당사자보고 당장 전화하라고 하시요"라고 하며 끊고 나니 내가 너무 흥분해서 그 전화 건 경찰관의 이름을 묻는 걸 잊은 것이 너무 후회가 되었다.
또다시 문제의 그 오빠라는 작자의 전화가 왔다. 하도 화가 치밀어서 "니가 황x주의 오빠인지 어떻게 아냐 이 나쁜 놈들아, 잃어버린 본인이 직접 전화하지 않으면 이 지갑 버릴 테다. 나도 너만 한 아들이 있는데 무슨 전화를 이따위로 하고 그러냐, 이놈아."
"아저씨, 제가 말을 잘 못한 것 같네요, 그냥 그거 갖으세요." 아!
이때 옆에서 내가하는 말만 듣던 아내가 "무슨 전화를 그렇게 흥분해서 막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젊은애들을 차분히 타일러야지 싸울 듯이 큰소리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에요." 라며 나서는 게 아닌가?
결국 이 문제로 우리 부부는 작은 말다툼까지 있었다. 여러분 내가 정말 잘못한 건가요? 50대와 20대의 대화가 이렇게 잘 안 되는 건 내가 잘못 풀어서 일까? 그놈의 빨간 지갑이 버스에 없었다면, 또 아들 말대로 우체통에 넣었더라면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고, 이런 꼴을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 빨간 지갑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부딪치는 내가 어처구니가 없다. 그리고 화가 치민다.
야옹이 오라버니, 우리랑 함께 놀래요 ^^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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