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04 14:39

요석공원

 

 

 

 

[테마가 있는 소요산 산행 ]

 ① 당일치기 기차여행 ②선녀를 찾아서 ③ 들머리 풍광

 

입구, 소요역에서 내려 5분 거리가 입구다.

아름드리 푸라타나스 나무가 등산객을 반기는 주차장이 오른편에 있고 거기서 등산 진입로까지

10여 분을 걸어가야 한다.

 

자재암 들어서기 전 세 갈래의 등산길이 나오는데 오늘 나는 자재암으로 들어서는 진입로를 택했다.

 

하백운대..상백운대...선녀탕 이렇게 가야하는데... 거꾸로 올라간 선녀탕....

과연 찾을 수 있을런지...

난 언제나 소요산은 겉만보고 지나쳐왔다.

이 번에는 소요산 봉우리들을 차례 차례 다 섭렵해 보리라...마음 먹으며.....

 

산행기는 ④ 선녀탕에서............../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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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고슨 원효와 요석공주]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617-686)의 부인이었던 요석공주(瑤石公主),

요석공주는 신라 제 29대 왕, 무열왕의 딸로서 일찌기 홀로된 몸으로 요석궁에 머물러 있었다.
이 때 약 30대 나이의 원효라는 스님이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니면서
"그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쥈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당신 임금이었던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이 스님이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하면서 요석궁에 홀로
있는 요석공주와 짝을 이루게 하여 훗 날~~
대유학자가 된 설총을 낳았다는 것이다.

 

 

 

[more]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원효대사의 속세의 성은 설씨로, 압량군 남쪽 불지촌의 율곡 사라수 밑에서 태어났다.
불지촌이란 마을 이름으로서 살지촌이라고도 하며, 사라수(娑羅樹)라는 나무에는 이런 유래가 있다.

원래 원효의 집은 율곡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마침 율곡의 밤나무 아래
를 지나던 길에 갑자기 진통이 와서 해산을 하게 됐다. 너무 급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좋고 거기서 해산 구완을 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나무는 열매가 보통 것과 달리 아주 특이해서
 지금도 그것을 사라율이라 부른다.

옛날 옛적에 어떤 절의 주지가 그 절의 노비들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한 사람 앞에 밤 두 톨씩을
나눠주곤 했다. 노비들은 불만이 쌓여서 마침내 관가에 주지를 고발했다.

관리는 이 말을 듣고, 주지스님이 그렇게 야박스럽게 굴 수가 있나 하고 밤을 가져다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밤하나가 그릇 하나에 꽉 찰 만큼 엄청나게 컸다. 관리는 이것을 보고 앞으로는 노비
한사람에게 밤 한 톨씩만 주라고 판결은 내렸다. 그때부터 그 밤나무가 있는 골짜기를 율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효는 출가하고 나서 자기 집을 절로 만들고 이름을 초개사라 했다. 또 자신이 태어난 그 밤나무
옆에도 절을 지어 사라사라 일컬었다.

원효의 어렸을 때 이름은 서당인데 집에서는 보통 신당이라고 불렀다.
그 어머니가 원효를 밸 때 별똥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그때가 바로 진평왕 39년(617)이었다.

그는 날 때부터 남달리 영리해서 스승이 없이 혼자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의 행적은 당나라
『승전』과『전기』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우리나라 전기에 실린 한 특이한 일만
기록하기로 한다.

원효의 이름이 이미 신라에 널리 알려졌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원효가 아침부터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니며 큰 소리로 이런 노래를 불러댔다.

누가 내게 자루빠진 도끼를 빌려주려나.

내가 하늘 받칠 기둥을 찍어내리라.

사람들은 원체 이상한 행동을 잘 하는 원효대사가 이번엔 또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나 하면서도
그 노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태종 무열왕이 대궐에서 이 노래를 듣고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스님이 쉬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런 분의 자식이라면 영특할 것은
 틀림없고, 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마땅한 여자가 없을까 궁리하던 무열왕은 마침 요석궁에서 혼자 살고 있는 공주를 떠올렸다.
무열왕은 됐다 싶어서, 즉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안내하게 했다.

관리들이 원효를 찾아나섰을 때, 원효는 이미 일이 그렇게 될 줄 알고 먼저 문천교 다리로 나가
기다렸다.

저 편에서 관리들의 모습이 보이자 원효는 모르는 척하고 다리를 건너오다가 일부러 발을 헛딛고
물에 빠졌다. 관리들은 허겁지겁 원효를 건져내서 요석궁으로 데려갔다. 원효는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계를 대고 옷을 벗고 궁에서 머물렀다. 요석공주는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스님답지
 않은 자유분방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둘은 함께 밤을 보냈다.

열 달 만에 요석공주가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설총(薛聰)이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어찌나
총명하던지 어릴 때 이미 유학과 역사에 통달했다. 그는 이두문자(吏讀文字)를 만들어서 그때까지
중국어로만 통하던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우리 식으로 표현할수 있게끔 했다. 이런 공적 때문에
 설총은 흔히 신라를 대표하는 열 사람의 현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원효대사는 파계해서 설총을 낳은 후로는 가사장삼을 벗고 속세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다니며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했다.

어느 날 우연히 그는 광대들이 춤출 때 쓰는 커다란 뒤웅박을 얻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그 모양을 본따서 기구를 만들고 화엄경의 '일체 막힌 데가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의 길에서
벗어난다.'는 구절을 따라 그 악기의 이름을 '무애(無碍)'라고 지었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무애가」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원효는 이 기구를 들고 방방곡곡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와 춤으로 사람들을 교화했다.
쉬운 노래와 춤으로 어려운 교리를 설명하는 원효의 독특한 방법 때문에 승려들 가운데는 눈살을
찌푸리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실상 산골 오두막의 목동들까지도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된 것은 그가 아니었으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가 붙인 원효(元曉)라는 법명은 부처님의 세상을 처음으로 빛나게 한다는 뜻으로,
원래 우리 말의 '해가 돋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효가 이룬 업적을 생각할 때 참으로
그 이름대로 임을 알 수 있다.

원효는 이처럼 대중들에게 널리 부처의 가르침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화엄경』과『금강삼매경』
에 대한 해설을 써서 후세에 길이 도움이 되게 했다.

원효대사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은 유해를 화장한 뒤 그 가루로 살아계실 때의 모습을 조각하여
분황사에 모셔 놓고 일생 동안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런데 하루는 설총이 아버지의 소상(塑像)옆에서 절을 하는데 그 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다.
그때부터 소상은 돌아본 채로 있다고 한다.

 


[원효]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도중, 밤중에 목이 말라 바가지
에 괸 물을 달게 마셨는데, 이튿날 아침에 그것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한바탕 법석을 피우고서는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으며 사물 자체
에는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음을 크게 깨닫고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왔다.
그 후 태종의 딸 요석 공주와 맺은 인연으로 설총을 낳게 되었는데 스스로
계율을 어긴 것을 뉘우치며 불교의 대중화를 위하여 전국을 돌며 불도를
전하고,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에게 강론하여 신
라 최대의 승려로 존경을 받았다. 또한 여러 파로 나누어진 불교를 통일시켜,
우리 나라 고유의 불교로 발전시켰다. 저서에는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
<법화경종요> 등이 있다.


[설총]설총은 향찰을 집대성, 정리하였는데,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 신문왕 때의 국학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설총의 문적으로는 우화적 단편산문인 《화왕계》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풍자해서 말하는 일)
하였다는 일화로서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있다.

고려 현종 때 홍유후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문묘 동무에 최치원과 함께 종향되었고,
경주 서악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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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요석 궁지앞  계곡 물

..

등산로 길,,우 편의 계곡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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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선사의 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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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교(俗離橋)를 지나 세심교(洗心橋)....그 뜻이 어찌 심오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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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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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암 올라가는 길...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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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동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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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을 걷어내고 다가서서~~

 

 

[ 소요산 ]

위 치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높 이 585.7 m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수이북 최고의 명산이다.
규모는 작지만 산세가 특이하고 봄철 진달래와 철쭉이 장관을 이루며 가을 단풍 또한 유별나서 예부터 경기의 소금강이라 일컬어진다.
이곳은 원효대사가 고행 수도 하여 큰 도를 깨친곳이어서 불교 유적지로도 이름이 높다
자재암, 원효폭포등의 관광명소가 소재하고 있으며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어 수도권지역의 일일관광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세가 그다지 장쾌하고 웅대하지는 않지만 형상미의 극치를 보이듯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어 놓아 만물상을 연상케하고,
심연의 계곡은 오묘한 정취를 발산한다.
산정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소담스러우면서도 앙증맞은 청량폭포가 있으며 폭포위로 조금만 더 오르면 높이가 10m나 되는 원효폭포가 우렁찬 낙하의 절규를 토하며 시원한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다.
자재암의 일주문 안쪽과 주차장 뒤쪽으로 항시 솟아나는 약수가 있어 물통을 한두개쯤 준비해가도 좋다.
동두천시가 직접관리를 맡아 주변이 청결하고 질서가 있어 보기에 좋다.
국내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소요산은 경기의 소금강이라 불리 울만큼 아름다운 명산이다.
소요산의 유래는 서화담(서경덕), 양봉래(양사언)와 매월당(김시습) 이 자주 소요하였다 하여 "소요산" 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하여 대자연의 많은 수림과 자연경관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이 즐겨찾고 있다.

산행기점 찾기
산행기점은 소요산역을 나와 우측으로 200m쯤가면 좌측으로 소요산 들어가는 집입로가 있다.
주차장, 관리사무소,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을 넘어가면 속리교 다리를 건너게 된다.
여기까지는 외길이고
속리교를 넘엄서자마자 길이 3군데로 갈리운다.
좌측 계단을 올라가면 자재암방향으로 하백운대로 가려면 이곳으로
가운데 직진은 구절터로 하여 능선에 올라 좌측은 의상대 우측은 공주봉 방향이고
바로 우측 능선으로 가면 공주봉으로 올라갈수 있다.

등산코스
관리사무소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선녀탕 → 관리사무소 : 1시간30분
관리사무소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샘 → 관리사무소 : 2시간30분
관리사무소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나한대 → 금송골 → 관리사무소 : 3시간
관리사무소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나한대 → 의상대 → 관리사무소 : 3시간30분
관리사무소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나한대 → 의상대 → 공주봉 → 관리사무소 : 4시간

교 통
전철 - 의정부역 - 경원선- 소요산역 통일호 이용(요금 1,110원)
의정부역(875-7788)에서 06:20분부터 22:20까지 매시 20분에 출발하는 경원선 열차(통일호)를 타고 소요산역(865-7788)에 내린다.
반대로 소요산역에서 의정부역까지는 매시 40분에 출발한다.(주차장 입구까지는 도보로 10분정도 소요)
버스 보다는 기차를 이용하는것이 교통 혼잡을 피하여 좋다.


전철 의정부 북부역 - 버스이용
전철을타고 의정부 북부역에서 왼쪽 출구로 나가 도로를 건너 반대편에서 39번, 136번 36번 버스를 이용한다. (40분 소요)

수유리, 쌍문동 -소요산
서울 수유동에서 136번 36번, 쌍문동에서 139번 버스가 20분마다 출발한다. 의정부역, 의정부 북부역, 동두천 버스터미널을 경유한다.
성남, 인천, 원당, 능곡에서 의정부와 동두천을 왕복하는 직행버스가 있다.

동두천 버스터미널 - 소요산(15분)
39번, 136번 36번 버스를 이용한다.

주변볼거리
자재암
1977년 관광지로 지정된 소요산에 위치한 자재암은 신라 무열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기거했다는 전설 때문인지 무수한 승려들이 수도차 거쳐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자재암은 거대한 바위산 협곡 위에 외롭게 위치하고 있어 수도처로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자재암이 유명한 것은 이 곳에 귀중한 보물인 <반야바라밀다심경> 언해본이 전하기 때문이다.
1994년 암자의 서책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반야심경은 현재 보물 1211호로 지정돼 있으며, 낙장 하나 없는 완벽한 언해본이다.

 


 
 
출 처 : [인터넷] http://www.sansan.pe.kr/ 

 

소요산

music : Naoyuki onda - Heart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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