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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색조를 좋아하고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는 나에게

고흐가 마지막 머물렀던 곳, 프랑스  ‘오베흐-쉬흐-와즈’ 에서 사 온(선물받은)

머리 핀은 무척이나 좋아하는 귀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여성들에게 머리 핀~하면 당연 블란서製가 최고의 브랜드가 되어버렸지만.... 

 

'고흐'의 침실이 그려져 있는 붉은 색조의 머리핀은 소중하게 여기는 액서서리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는 광선으로 흠집이 난 듯 보이지만...아무리 내 굴려도 흠하나 나지 않는

늘..갓 사온 듯한  반짝 반짝 윤이 나는 헤어-핀, 

그 하나에도 고흐의 침실 그림을 넣어서 만든....그래서 작은 시골임에도

관광객의 발길이 연일 끊이질 않는다 한다,

프랑스 사람들의 멋을 파는 ....그 안목에...나는 도취한다.

고흐의 침실 그림이 있는 핀을...가끔 꺼내어 머리를 빙빙돌려 핀으로 꽂으면....

붉은 색조가 있어 헤어-핀 하나로도 나는 충분히 호사스럽다............../이 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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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를의 침실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에 그린 <<고흐의 방>>입니다.
동생에게 자기의 방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려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방이 휴식의 장소이고 따뜻하고 밝은 느낌의 색으로 칠해졌습니다.
정신질환으로 요양원생활을 할때도 이방을 몇번이나 다시 그렸다고 전해집니다.
침대옆에 벽에는 그림 두점, 방문도 두개, 침대에 베개도 두개, 빨간이불,,,
방에 안정감을 주려고 두개를 그렸을수도 있지만 혼자가 아닌 둘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서 두개를 그렸을수도 있습니다. 늘 떠돌이 생활을 했던
나무바닥과 파랑에 연보라빛이 나는 벽,



  고흐는 폴 고갱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고갱의 정렬과 해박한 지식들은 고흐를 매료시키고도 남았습니다.
몽마르뜨의 생활을 접고 아를에 정착한 고흐는 고갱에 대한 수없이 많은 구원을 합니다.
아름다운 아를에 와서 같이 살자고.
 
  결국 고갱은 고흐와 3개월 남짓 함께 살지만,
고흐의 광기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나 봅니다. 고흐가 귀를 자른 건 이맘 때 쯤이었나 봅니다.
 위의 그림은 고흐가 고갱을 초대하기 전, 고갱의 마음을 사기 위해 집을 예쁘게 단장하던 무렵
자신의 침실을 그린 것입니다. 사선의 구도는 역시 불안정하고, 오른쪽의 파란 색 문은
고흐의 무의식에 숨어있는 불안감을 내포하는 듯 합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88년은 아를르에 와서 고갱이 함께 생활하며 제작 활동을 하던 해였습니다.
공동 생활은 이윽고 정신병의 발작, 귀를 자르는 사건등 비극적인 종말로 끝나지만,
그런 것을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고흐에게는 기대에 부푼 나날이었습니다.

침실 그림에 대해서는, 이 시기에 고갱에게 보낸 편지속에서 새로 실내 장식을 하기 위해
침실을 데생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침실 데생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평탄한 면을 만들면서 두텁게 칠한 붓을 크게 움직여갈 뿐...
나는 이들 여러 가지 색으로 여기에 절대적인 평화를 표현하고 싶다.]

점묘나 선묘를 억제한 평평한 칠의 시도, 이것은 같은 해 여름에 그려진 <아를르의 햇볕>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고흐에게는 저적으로 실험적인 것입니다.
침실 그림은 그 후에도 고흐의 마음을 끈 것 같습니다.
생 레미의 정신 병원에서도 침실의 그림을 두 장 더 그렸다 합니다. .........../검색참조

 

 
   

고흐의 마지막 생가와 무덤.

Aubers-sur-Oise

 

파리의 북쪽으로 한시간 거리의 ‘오베흐-쉬흐-와즈’ 는 인상파 화가 '고흐'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있는 곳이다. '고흐'의 작품 속에서 더욱 사랑 받고 있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 '오베흐-쉬흐-와즈'. 이곳은 천재화가 '고흐'가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며, 많은 작품을 완성시킨 곳으로, 세계적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고흐'의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 오베흐의 계단 >, < 오베흐의 골목길 > 등도 한번쯤 거닐며 100년 전 마을 주변의 보리밭과 시청, 교회 등 '고흐'의 그림 속에 나타난 ‘오베흐-쉬흐-와즈’의 풍경을 떠올리며 천재 화가의 인생을 돌이켜 보자.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30세에 이르러 화가가 되었다.
파리에서 활동했던 그는 도시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프로방스' 지역의 '아를르'로 옮기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고흐'에게 왕성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모티브를 준 반면 점점 심해지는 광기로 인해 자신의 귀를 면도날로 자르는 광기를 보이게 된다.

 

 

 

그 후 '고흐'는, 그의 영원한 친구이자 보호자 였던 동생 '테오' 의 권유로 '오베흐'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고흐'는 신경과 전문인이면서 미술 애호가였던 '가셰' 박사의 보살핌으로 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고, 이 기간동안 70 여 점의 작품을 남긴다.
< 오베흐의 교회 >, < 오베흐의 길과 계단 >, < 가셰의 초상 >, < 까마귀 나는 밀밭 >, < 최후의 자화상 >같은 많은 유명 작품들이 이곳 '오베흐'를 배경으로 탄생하여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림도구를 챙겨 마을을 나서서, 저녁이면 동생 '테오' 에게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를 편지로 쓰면서 외로움을 달랬던 '고흐'는 자신의 천재적인 정신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으로, 1890년 5월 20일 정착하여 70일 후인 7월 27일 자살을 하게 된다.

 

오베흐 교회 Eglise de l`Assomption

 

'고흐'의 유명한 그림인 '오베흐의 교회'의 모델은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그림과 똑 같은 모습으로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루이 6세'의 미망인 ‘아델라이드-드-모리앤느’가 '오베흐'에 정착하면서 기도실로 이용되었고, 이중 경사를 갖는 사각형 종탑의 지붕 모습이 독특하다. 구불구불한 선들이 뒤엉킨 '고흐'의 그림과는 달리 엄숙한 분위기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교회는, 작품의 대상으로의 역할만을 충실히 끝내고, '고흐'의 느낌이나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그림과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조용히 서있다.

 

'고흐'의 집 Auberge Ravoux

 

'고흐'가 살았던 여인숙이자 카페인 ‘고흐 기념박물관'으로 개조된 여인숙에서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고흐'의 초라하고 외로운 방을 볼 수 있는데, 작은 방에는 침대와 책상, 의자가 있을 뿐이다. 1890년 5월 20일 ‘라부 여인숙 Auberge Ravoux’에 도착한 '고흐'는 아침부터 밤늦도록 활발한 작업으로 70 여일 의 생의 마지막 기간 동안에 무려 70 여 점의 유화와 수 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화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때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좁은 지붕 아래 작은방에는 침대와 작은 책상, 의자밖에 없어서 당시 화가의 쓸쓸한  삶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고흐'는 그린 그림을 침대 밑에 보관하였단다.
식당에서 커피한잔을 마시며 화가의 숨결을 느껴보자!

전원에서의 한가로운 산책

 

묘지에서 좀더 언덕을 오르면 넓은 밀밭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고흐'가 왜 이 밀밭을 자신의 화폭에 담게 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흰색, 분홍색, 보라 빛으로 어우러진 푸른 하늘 아래에, 감자꽂이 드문 드문 피어있고, 갈아 부친 땅과 함께 온화한 연보라 빛과 아주 부드러운 노란색과 연한 녹색의, 바다처럼 넓은 구릉을 배경으로 거대하게 펼쳐진 보리밭 초원에 저는 완전히 빨려 들어 갔습니다." 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고흐'가 '오베흐'에 정착하면서 건강이 호전되었다고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생 ‘테오’ 에게 "극도의 고독함과 슬픔을 표현하는데 구속 당하지 않으면서, 혼란스러운 하늘아래 거대하게 펼쳐진 보리밭을 그리고 있다." 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테오’는 1890년 7월 27일 미완성의 답장에서 "그래서 무었을 원하는지요?" 라고 '고흐'에게 묻고 있다. 바로 그 순간에 '고흐'는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쏘고 신음한다.

 

묘지 Cimetiere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고도 바로 죽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서 이틀이나 고통을 겪은 다음에야 숨을 거둘 수 있었던 불운 했던 화가가 안식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언제나 '고흐'의 열렬한 팬이면서,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동생 '테오' 가 형의 자살에 충격을 받았는지 6개월 간의 정신질환을 앓고 사망하여 네덜란드에 묻히었다가, 1914년 '테오'의 미망인 ‘요안나’의 뜻으로, 형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고 담쟁이 넝쿨이 이들의 불멸의 우애를 상징하는 듯이 무덤을 덮고 있다.


‘슬픔은 끝이 없단다.’라는 말을 남기고………..

 

내용출처 : 알고가자 프랑스 http:www.algogaj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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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적으로 생각해 보는 우리의 미술관 관광객 유치~~
우리의 화가 이중섭이 머물렀던 곳, 제주 서귀포 그의 미술관에서 나는 폭풍우의 화가
'변 시지' 님을 황망히 찾아가느라 언뜻 본 기억으론

이중섭님의 '아이들' 그림을 드로잉, 판화로  해서 넣은 수공예품을 좀 호가로 판매하고 있었다.

 

막연히 아무나 스스럼없이 접할 수 있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가격과 사용도에 한해,

작은 물건이지만 큰 느낌으로..예술인들의  긍지를 느끼게 해 줄,,,,,,

 우리 화가들을  기리고...그에 따른 문화산업들,...문화 관광객 유치,

진정 기념이 될 만한 작지만 아름다운 소품들은 진정..요원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듦은 혼자만의 생각일까?............./이 요조

 

 

☆2004년 8월 어느 무더운 날, 자월도에서 드뎌....내 손을 벗어나다.

선물로 흔쾌히....

무겁고, 검고, 윤기나는 머리위에 붉은 핀이 어울릴 것 같아서

내 머칼은 이제..이 핀을 감당하기엔...탄력도 힘도....빛깔도 잃었버렸으므로,

참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기분으로....

 

집으로 오는 船上에서 그녀의 머리에 꽃힌 핀을 보았다.

부.럽.다.

 

 

 


 

 




Sojiro / 사랑의 숲



결국 그 헤어핀은 8월 31일 블로그 모모양에게 전달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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