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량포 역사기행   

  

  

  고량포를 찾아서  


황포돛배를 타고  임진강물 적벽을  흘러돌아  절경을 바라보다가  아쉽게도  고량포 여울목 가차이 가서는 그만 되돌아 나온다.

민통선에 가로막힌 것도 사실이지만  고량포 여울목에는 수심이 얕아  사람이 그 저 건너가게도 생겼단다.

멀리서 고량포를 바라보자니 흐끄므레한 그 모습이 바로 이 자갈마당이었나 보다.

이런 자연적인 자갈마당이 질편히 드러누웠으니 물턱이 생기고  낮고 좁아진 턱으로 통과하는 물살은 드쎄어서 여울목이라....

여울이란 이름은 그저 듣기에 어감은  예쁘지만  아서라~  당찬 물살이다.

사진에서도 그 여차없는 물길의 맥이 짚어진다.

 

 

그러나 어이없는 일은 며칠 전, 황포돛배안에서   마주 바라다보이는 고량포가  어드멘지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렸다.

북쪽이라는 것만 알 뿐....바로 코앞이 민통선이고....경순왕릉이 있단다. 그제서야.....아!! 내가 가봤던 곳임을 알아차렸다.

블로그를 쓰기도 전에 경순왕릉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군 초소가 있었고  아직 해가 걸린 당낮인데도 출입이 허용된 시간을

지났노라는 말에 애써 달려간 길을 되돌린 적이 있었다.  그랬던 경순왕릉을 지난 여름에야 찾아갈 수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라니~~

각종전파기기의 장애로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한 마리 벌처럼 귓속이 이명감으로 앵앵거려왔다.

<아 거기가 거기였구나~~~>  민통선안에 위치한 미수허목의 묘역도 주저치않고 통과시켜달라며 홀로 찾아 갔지 않은가?

 정 그렇다면 고량포를 당연 찾아가봐야지~~  생각한  곧  나흘 뒤 고량포를 다시 찾아들었다.

 

 

아는 것 만큼만 보인다고 했던가?  알고 난 뒤의 고량포는 새삼 느낌이 다르게 닿아온다.

개성이 가까우므로 개성에서 쓸 물자를 서울 마포나루를 위시 경기북부지역의 농산물을 이 곳 고량포까지 배로 실어 교역을 했던

곳이라 한다. 개성으로 보내는 물자가 부려지는 규모가 큰 나루로 전쟁 전 경기도 장단군이었고 그 당시 화신백화점이 있었으며

문산 인구의 3배가 넘는 번화한  곳으로 장단군 사람들은 개성으로 걸어다니거나 자건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개성에서도 자건거를 타고 고랑포로 놀러왔는데 1시간 가량 걸렸다고 한다.


 

물이 얕아서 고랑포 여울목으로 한국전쟁 때 인민군 탱크부대가 건넜고 1968년 북한 124군 소속 김신조 외 30명이 건너왔던 곳이다.

더 정확하게는 고량포에서 1km더 가면 북한공비들이 침투한 장소라고 이정표를 보고 더 깊숙히 들어갔으나....

이런~ 정말 민간인 출입금지의 바리케이트가 민통선임을 실감케했다.

차를 되돌려 나오는 길에 보이는 팻말이 <지뢰조심> 이란다,  머리끝이 쭈뼛서는 살벌함....아직 이 곳은 전쟁터다.

그리고 보니 여기저기 강둑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길은 바리케이트가 쳐져있고 계속 <지뢰> 표시가 되어있다.

 

 

개성이 가차운고로 학자들과 문사들이 즐겨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는 곳,

황진이가 부운거사 김경원이를 눈물지으며 그리워했다는 ........바로 이 곳! 임진강!

개성 송악산이 눈앞에 바로 보이는데, 민통선에 가로막혀 물길 타고 흘러보지 못하는.....연결될 수 없는 두지나루와  임진나루~~

언제쯤이면 임진강은  철조망에서 풀려나 적벽루 아래를 거침없이 오가며 풍류를 즐기는 묵객들이 노닐까?

그래 ...단 두마디의 말, 자유!! 

묵묵히 서있는 저, 적벽도  침묵의 강물도  시퍼런  자유의 염원을 恨으로 품고  흐르고 있을 터!

아~ 애달퍼라~~


 

5월의 임진강은 너무 화창한날이어선지 되레 뿌우옇다.

 

마음같아서는 바지가랑이 듬성듬성 걷어붙인 남편 등을 떠다밀어 투망이라도 던지라고 해볼까? 

 

남쪽으로 내려오던 강물이 북쪽으로 휘어져 흐른다. 자유로를 지나 다시 남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고 서해로 흘러든다.

 

영화를 찍어도 좋을 장소같은 곳....

나룻배를 타고 님을 떠나보내는 눈물바람의  별리의 장소로도 어울릴 것 같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풍광이다. 

이 곳이 철조망으로 묶인지 어느덧 56년이 흘렀다니....왜 아니 그럴까......

이 곳은 56년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음이다. 

 

 

나도 치마끝 뱅뱅 싸잡아 돌려 속옷에 질러넣고 강물에 들어가면  여기저기 꼬물거리는 다슬기가 연신 잡힐 것만 같다.

 

고량포구에 다다랐다.

 

고량포구는 철책으로 굳게 닫겨있었다.
민간인 출입을 금한다는 빨간 글씨의 경고판이 터억 가로막는다.

 

 

황포돛배안에 걸린 번성했던 고량포구의 옛사진

 

대신 아쉬운 맘 달래라고 고량포구를 조망할 수있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詩碑가 서있고... 

 

시비의 전문을 읽자니....(성원경詩)

'내 고향은 장단 고량포외다. 달밝은 밤일랑 징개미 춤추었고 비에젖은 날이면 자라 덩실 노닐었소

봄이면 장구채, 삘기,찔레, 싱아먹고....~~~어이타 인가없는 휴전선이 웬말이오!

 

오른쪽  고량포, 적벽이 보인다.

 

와글와글...지금이라도 옛사람들의 자취가 눈에 밟히는 듯.....환청이라도 들려 올 듯 한 이 곳!
왁자지껄 분산했을 고량포구의 죽은 듯....고즈넉함이 웬 말인지.....

 

고량포구의 옛모습

 예전 고량포구에는

학교가 있고  문방구가 있고 우체국지소, 화신백화점,변전소,금융조합, 곡물검사소, 우전시장, 여관, 시계포 등이 있어서 번화하던 곳~

 

가까이 다가가니....더 보이질 않는다.

 

바로 이 곳이 어림잡아 시계포가 있던 저잣거리일테다. 그 오른쪽이 화신백화점이 있던 장소일테고.

오른쪽 2~3시 방향으로 들어가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능'이 있다.

신라의 왕이 왜 이 곳에 ? 라는 질문이 생기지만 다음글로 미루기로 하고~~

 

북한공비가 바로 침투했다는 곳....

고량포에서 1km를 더 들어가자니 바리케이트가 앞을 처억가로막네요.
 차를 돌리려는데....그제사 눈에 보이는 <지뢰>란 글자들~~

 

산나물,지뢰....지뢰...산나물....산나물이 생명보다 귀할 수는 없다는...지뢰, 지뢰밭이란다......

지금 이곳은 전쟁중!!!

돌아 나오다가 먼-눈으로 홀깃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운 강!  우리나라 7대강중의 하나인 임진강~~

 

고량포, 묻혀버린 역사속으로....다가가보니

철조망에 갇혀버린 고량포  적벽만이  임진강 여울목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다음글/경순왕릉

 

 

 

에도 봄은 왔다.

얼었던 강이 풀리고 완연한 봄이 왔다.  강물에 봄빛이 한껏 녹아난 듯,  물빛은 푸르고 점잖은 듯 잔잔하다.

물은 원래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어서 양쪽의 강둑이 낮은 곳으로 쏠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여름우기에 접어들면 자칫 범람하기 쉬운 강이기도 하다.

다리 너머 낮은 곳, 기다란 밭뙤기엔 모종을 심었는지 낮은 비닐을 씌우고  참외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의 바쁜 일손이 보인다.

하늘에 그 운을 맡기고 다 앗기더라도....어쩔 수 없는 농사를 짓고 있다.

 

연천군으로 들어서는 곳은 북한지역인 중면 여척리로 중면 횡산리와 왕징면 강내리에서  누인 ‘S'자형으로 멋지게 굽어 흐른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오는 듯 하다가 다시 분단된 국토의 한계선을 가로질러 흐르다가  다시 내려왔는가 싶으면 어느새 한강과 합류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발원 254㎞를 달려 한강과 만나는 임진강 줄기는 56㎞가 파주시와 접하고 있으며 30㎞가 개발 가능지역이라고 했다.


 

분단된 탓에 자연경관이야 제대로지만....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던 곳에 임진강 두지나루 황포돛배가 떴다.

60만년전 지각변화로  한탄강과 임진강은 현무암 바위와 주상절리가 형성된 적벽이 아름다운 강들이다.

민통선안에 위치하였다가 지금은 풀려난 장남면 고랑포리 그 부근이야 아직 철책으로 막아져 있지만......

 

 

고량포구는 옛문헌에는 ‘皐浪渡’로도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임진강 일대에서 가장 번창했던 포구의 하나였다.
특히 서해안에서 조류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 새우젓, 소금배 들이 장단의 대표적 특산물이었던 장단백태, 땔감, 곡물 등을 교역하였고,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경기북부 지역 농특산물의 집하장 역할을 하여 주요 상권형성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고량포구에 다다르면 강물빛이 하얗게 보이는데 그 곳이 바로 고량포 여울목이란다.

이 여울목은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 31명의 일당이 바로 이 여울목을 걸어서 지나온 그곳이다.

수심이 깊은 임진강인데도 이 여울목에 오면 갑자기 수심이 무릎정도로 얕아져서 강을 건널수 있다한다.  

고량포 여울목을 바라보고 뱃머리는 오던 방향을 선회하여 다시 돌아 나오는데 총 45분이 소요된다.

 

 

 

역광이라 강물이 검푸르게 보인다.

 

 

황포돛배를 운전하던 선장이 가르키는 곳, 강의 정 중앙 한가운데...저 너머 보이는 희미한 산이 바로 30k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개성의 송악산이란다.

 

  

 

 

 

선장님의 배려로 뱃전에 편안히 앉아서 사진 찍으며....

음악소리가 들려오는지 조차도 잊고 나는 강물과 적벽을 흠씬 느끼며 교감을 시작했다.

 

  

칼로 잘라 깎아지른 듯한 절벽

좌측은 문산지역 장좌리적벽,.오른쪽은 연천 원당리 적벽이다.

마주 바라보이는 곳이 고량포 여울목,  왼편이 군사한계선인 고량포구다.

 

 

내 눈에는 마치 토끼가 엎드린 듯 보이기도...

 

 

주상절리의 적벽모습

용암인 마그마가 바닷물이나 강물의 냉각 응고함에 따라 부피가 수축하여 생기는, 다각형 기둥 모양의 금.

임진강 적벽의 주상절리는 모양이 상부는 바늘침 같게 생겼고 하부는 떡시루처럼 이중으로 생긴게 특이하다.

가로 세로, 이 두가지로 된 주상절리는 어디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형태라 전한다.

 

 

 

 

 

이래서 돌단풍인가보다. 흙하나 없는 수직 석벽에 꽃을 피운 '돌단풍,

 

 

임진강의 어부들인가보다. 강에서 물고기 잡는 어부들의 모습은 차라리 편화롭게 보이기까지 하는데.

 

 

적벽에는 동굴들이 군데군데 있어서 육이오 동란에는 방공호가 되어주기도 했단다.

이 동굴모양은 이름이 떠 오르지 않지만 덩치에 비해 머리가 아주 작은 갑각류(?) 작은 그런 동물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라다보이는 곳이 민통선 안에 있는 예전 고량포구,

이 부근에는 미수 허목의 묘역과 지금은 출입이 풀린 경순왕릉이 있다.

 

 

  예전 고량포구

왼쪽 아래엔 학교가 있고,문방구가 있고 우체국지소,화신백화점,변전소,금융조합,곡물검사소, 우전시장, 여관, 시계포 등이 있다.

 

 

아마도 예전부터 난 길인 듯, 길이 고불고불 정겹다.

화려했던 옛 정취는 어디로 사라지고....그나마 기억하던 사람들 조차 떠나고 나면

아마도 이런 자료뿐이리라~

 

 

정말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어보인다.

선장님이 알아서 가르쳐주신다. 문산으로 가다가 장좌리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3km가량 들어오면 이 곳이란다.

 

 

 

 

 

 

절벽에 흰꽃, 요즘 피는 흰꽃이 무에 있던가? 조팝나무? 배룽나무? 야광나무?

푸른 적벽에 등 기대어 하이얗게 무리져 피었다.

 

 

 

 

 

 

 

 

군데군데 산철쭉도 피어있는 적벽의 풍경,

임진강은 우기시 저 다리를 넘어 범람하기가 예사란다.

파주 문산,연천의 물난리가...바로  이 임진강?

왼편 강둑을 보니...잘 흘러내리던 강줄기가 질펀한 연천평야를 덮치게도 생겼다.

 

 

 

파주,문산쪽의 장좌리적벽은 그런대로 높이가 있어서 적벽위엔 그나마 수림이 울창한 편인데

지대가 좀 낮은 연천쪽 원당리적벽은 민둥머리 강둑이다.

 

 

우리 분단의 비극을 대표하는 임진강,

그 강물은 유유히 북에서 남으로 침묵속에 흐르건만 분단 60년의 아픔은

60만년의 역사를 가진 적벽을 휘감아 돌아 흐르는 강물이..........시니컬하게 웃으며 흘러내리는 것만 같다. 

 

글:사진/이 요조

 

다음글은  고량포, 묻혀버린 역사속으로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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