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글씨는 잘 모르지만 나는 미수 허목의 팬이다.

미수 허목의 서체를 안동여행에서 하회마을  예안이씨 충효당에서 만나고는

입이 헤~ 벌어지며 기분이 급 좋아졌다.

씩씩하게도 그를 찾아 군사분계선까지 군인을 하나 달고 찾아가지 않았던가?

 

충효당

예안이씨 충효당은 1971년 8월 30일 보물 제553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이준교이다.
예안이씨 충효당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이홍인의 충과 이홍인의 8세손
이한오의 효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소박하고 서민적인 민가 성격을 띤 유서 깊은 집이다.

 

 

대문이 어디있지?

집안으로 출입하는 기와 얹은 토담이 트여 있는 곳의 모양이 재미있는데,
왼편은 토담이 허물어진 듯 절개된 면이 가지런하지 않지만 오른편은 담장이 마당을 향하여 나선형으로 감겨 있다.

나선형으로 감겨 있는 담장 안은 화장실이다.

 

 

담장안을 들어오니 솟을 대문이 또 따로있다.

마주보이는 곳이 충효당 본채이다.

 ▼

 

눈에 띄이는 여러게의 소화기만 봐도

충효당 가치의 무게를 알 것만 같다.

보물 제553호

 

 

현재 후손이 충효당 왼켠의 또 다른 담너머 안채에 기거하면서

보존하고 있다.

 

 

분위기가 그윽하다.

 

 

장마철이라도

그렇게 (습기로)누지진 않겠다.

습기를 피해 전체 돌을 쌓아 지은 것이 꽤나 보기에도 좋고

실용성도 있어보인다.

 

 

 

충효당 현판은 정침의 사랑마루에 게첨되어 있다.

 

미수 허목의 전서체

 

미수의 전서체가 아주 재미있다.

충성충忠은 가운데 받들어 모시는 태양 즉 임금을 뜻하며

효는 孝 노인老을 공경하는 뜻을 나타내며

집당堂은 지붕아래 사람이 앉아있는 형상의 전서체가 볼수록 그림으로 다가오듯 재미있다.

 

미수를 꼭 만나보러

나는 2009년 2월에 연천군 왕징면 군사분계선

안에 있는 미수의 묘역을 찾았다.

 

미수 허목을 만나보다. http://blog.daum.net/yojo-lady/13745268
미수 허목'의 생애와 '척추 동해비' http://blog.daum.net/yojo-lady/12420754

 

 

예안이씨 충효당
종목 보물 553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고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문 바깥에 평행하게 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뒤에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간에 비하여 넓고 튼튼한 문틀을 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이 많아 흥미롭다.

 

안채

 

주소 경북 안동시 풍산읍 우렁길 73 (하리1리)
전화번호 054-858-4768

 

 

 

청암정

경북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에 걸린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

 

허목선생은 호가 미수여서일까?  우연일까?  8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보물 제592-1호 
 동해비첩(東海碑帖) 

 

조선시대 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수필원고본들 가운데 하나이다.

허목은 전서체에 뛰어난 유학자이며, 23세 때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퇴계 이황의 학문을 존중하였다. 이로 인해 스승 정구로부터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아

다시 그 학문이 이익에 의해 계승, 발전되는 매개체역할을 하였다.

동해비는 본래 ‘척주동해비’로 현재 삼척군에 있으며, 그 비의 탁본은 많이 유포되어 있다.

원래 동해비의 글씨는 현재의 비보다 더 컸는데 파도에 침몰되어

선생이 따로 작은 글씨로 써둔 것을 보고 다시 새겼다. 크기는 가로 32.7㎝, 세로 50㎝이다.

이것은 허목의 전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금석운부*

 

*고문운부*


 

 

경북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에 있는 청암수석(靑巖水石)

충재박물관에 있는 원본

 

 생전에 써 두신 전서체의 비문으로
일월석(日月石)이라는 귀한 흰 돌에 새겼다 한다.

 

6,25동란중 총탄을 맞은 흔적이 난무하다.


문인석은 연천에 있는 돌은 아니고 삼척에서 가져온 강원도 해안지방의 돌이다.
멀리 남해안을 돌아 임진강으로 실어서 이 곳까지 가져온 돌이라는 설이 있다.

 

 

미수 허목과 우암송시열의 일화

 

또 한 예화로는

선생과 가장 무서운 정적으로 지목되었던 우암 송시열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라 명재경각(命在頃刻)인 때에, 최후의 기대감에서 아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너는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내 병의 증세를 말하고 약의 화제를 지어 달라고 하여 그대로 약을 지어오거라.”하니, 아들은
“아버지, 그것은 절대로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에게 가서 화제를 지어달라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거절하니, 송시열이
“너는 아비가 시키는 대로하라. 이제는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의 화제를 써서 죽는다면 그것이야 내 명이 다한 것일 뿐이니라.”
하고 엄히 꾸짖어 빨리 다녀올 것을 재촉하였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허목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화제를 받아 와서 보니, 과연 독극물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송시열의 아들은 또 아버지께 말하기를, “이 화제대로 약을 지어 드시면, 아버지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제발 이 화제의 약을 드시지 마십시오.”
라면서 간절히 간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전히
“아무 말을 말고 그 화제대로 약을 빨리 지어 오라.”고 호령을 하였다. 아들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과연 그 약을 먹고 금방 쾌차하였다는 것이다.


송시열 아들이 후에 허목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화제에 극약인 비상을 넣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허목이 대답하기를, “자네가 증상을 말하면서 대감께서 어린 손자 아이의 오줌을 드셨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어르신네의 병환은 바로 그 요독(尿毒) 때문이었으니,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허목과 송시열의 정치적 적대 관계를 초월한 깊은 인도주의적 생명관과 인간적 신뢰감을 깨닫게 하는 교훈으로 삼아 전설처럼 전하여 오고 있다.

 

 

 연천군 홈페이지 http://www.iyc21.net/_yc/tour/a06_b05_c03.asp?

 

 

 씨 풀리자 근질거려서 방안에만 있을 수가 없다.

감기기운이 지끈지끈 오는 것 같아 누웠느니 ...차라리 바깥으로 나가 산뜻한 바람이나  운동삼아 쐬고오자고 나선 길이다.

사실인즉슨 겨우내 참고 살았던...절절히 만나고싶은 인물이 꼭 있었다. 300여년전에 돌아가신 대학자 '미수허목'과 기생 '홍랑'이다.

영암에 갔을 때 홍랑과 최경창(崔慶昌)이 머물었던 곳도 사진을 찍고 시비도 보고,,,홍랑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400여년전 고운 사람이  파주에 누워있단다. 난, 홍랑도 무척 만나보고 싶어졌다.

홍랑은 <묏버들 꺽어~~>란 시조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저 황진이에 버금가는 기생정도로만 알았는데 기막힌 러브스토리라니~

또 하나, 경북 봉화 여행길에서는 문화해설사님을 통하여 귀동냥으로 처음 만나본 '미수허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만치 캄캄했었다.

우의정까지 오르고 시 서화에 능하며 특히 전서체로는 동양의 제 1인자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는 그가 계신 곳!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만 외우고는 무작정 찾아나선 길이었다.

이상하게 왕징면에만 오면 네비게이션이 기를 못피고 정신줄을 놓는다. 나중에사 알고보니 군사지역이 가까워서 그런 모양인데..

주소만 겨우 적어 온 군남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를 내 무슨 재주로 찾는단 말인가?

겨울 산골에는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개들만 빈집을 지키고 있는 듯 했다.

군남면, 화이트교를 건느려는 찰나, 도로에서 지나치며 이정표를 보고는 반가움에 무조건 우회를 하고는 그 동네 부근에 비슷한 묘역이 있나싶어

낮으막한 동산을 오르내렸다. 헛수고였다. 동네라고는 한결같이 빈집같은 적막감 뿐~어쩌다 마주친 사람도 전혀 모른다는 도리질 뿐~

이대로 돌아 가야하나 싶었을 때, 복덕방이 눈에 들어오고...다행히 너무 자세히 가르쳐주긴 했지만...혼자선 갈 수 없는 곳이란다.

뭔말인고 하니 민통선 안에 묘역이 있다는 것이다.

북삼교를 지나 직진하면 초소가 있단다. 이...그랬어~ 이제사 기억이 난다.

전두환씨의 아들이 만들어 놓은 허브빌리지를 찾아왔을 때, 그 때도 네비게이션이 허브빌리지를 눈 앞에 두고도 빙빙돌려서

골탕을 먹이던..그래서 초소까지 갔다가 물어보고 되돌아나갔던 적이있었다.

징파 나루가 있다는 북삼교, 나루의 기능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민간에서는 미수나루라고도 불린단다.

허목이 나들이를 하려면 당시에는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나루에 당도하여 술막에 앉아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공에게 “미수 왔다!”라고 고함을 질러 나룻배가 건너왔다고 전해지는 ....이야기~~

맑은 물이 파도치는 나루, 징파(澄波)나루.

얼었던 강물이 슬슬 풀려나는 정월대보름날 나는 길을 나섰다. 그랬는데......어허...낭패로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겨울 철새떼가 하늘을 가득 덮고있었다.

날씨 풀리자 날아갈 일이 걱정이 되는 움직임 같아 보인다.

 

 

먼-길 떠나기 위한 도약인지 무리지어  날아다닌다. 

 

북삼교에서 바라본 허브빌리지 뒷배경

 

 

254킬로미터에 달하는 임진강 중에서 우리가 만나고 보는 구간은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단다.

임진강의 상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한강과 만나는 하류지역도 절반은 모르고 산다.

한강을 만나기 위해 남으로 흐르는 오후 임진강은 햇살을 수직으로 받으며 꽂꽂이 흘렀다.

군데군데 얼음이 눈치를 보듯 슬슬 풀려 녹아났다.

 

난데없이 다리위까지 들려오는 징소리...멀리 좌측 강가에 바짝 세워둔 차가 한 대 보였다.

 

 

부쩍궁금해보여서 줌인으로 당겨보니 굿을 하고 있나? 생각했는데, 마침 오늘이 음력 정월 대보름!

용왕신에게 기원하는 중인가보다. 그래선지 여기저기 다리 아래에 무려 3군데나....말없이 흐르는 강물에

기원을 새기는 걸까?

 

 

줌인으로 당겨보니 돼지머리와,  떡 과일, 쌀푸대등이 보인다. 거창하다.

 

 

바다에서는 만날볼 수 없는 그 무엇...강은 의연하게 침묵한다.  

 

 

얼었던 산골짜기 물들이 흘러흘러 이념따위는 상관없는 철새떼처럼 돌아 흐른다.

 

옛전설에 이 곳  절벽바위에 부엉이가 살아서 부엉이 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부엉바위로 부르다가 벙바위로 불려지기도 한다는....옛날에 어느 스님이 이 바위를 보니 고양이 형국이고

강 건너 마을은 쥐형상이더란다. 그래서 그 마을을 찾아가봤더니...쇠미해지고 있는 마을이 되었더란다.

그래서 저 벙바위,,아니지 고양이 바위의 눈에 해당되는 부분을 거적으로 가려주라고 말했단다.

그리고 났더니....마을이 기가돌고 살아나서 한 사람은 높은 관직에 올랐는데, 왕의 신임을 받게되자

안하무인이 되었고 고양이 눈을 가리는 일도 잊어버렸다한다.

끝내는 그 행적이 드러나 죽임을 당하게 되고 마을이 다시 피폐해지더라는 ....

<실제 이야기로 검색글에서 그 시대와 왕과 그 사람의 관직까지 알았는데...재차 검색이 되지 않는 애석함>

이 곳 사람들은 붉은 벙바위에게 절을 하고 지나다녔다 한다.

지금은 전두환씨의 아들 전재국이  그 곳에다가 허브빌리지란 이름으로 꽃동산을 만들어 놓았다.

 

 

봄오자 녹아 흐를 것을 물은 얼어서 빛깔마저 달리하고.... 

모질게도 강물을 다 얼구어버린 한겨울의 江, 그 위로 흰눈이 소복히 내려 쌓인 겨울 임진강을 보고싶다.

 

 

징파나루쪽(右) 

 물그림자 도도하고...

 

징파나루란 이름이 걸맞을 정도로 맑고 잔잔한 여울이 감미로와 보인다.

물이 맑아 징파라 했다지만 본래 이름은 둠밭이다. 두메에 있는 밭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둠밭을 한자로 옮긴 것이 둔전이고 이를 소리 나는 대로 이두식으로 옮긴 것이 징파다.

사람들은 임진강 맑은 물을 사랑해서 맑은 파도 징파를 선호했지만, 내지는 그런 상상을 촉발하도록 한자를 골라 붙였지만

둠밭도 충분히 정감어린 이름이다.

 

 

임진강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이 곳이 '군남댐'인 모양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임진강은 홍수로 몸살을 앓고 들판이며 민가까지 질편하게 누워버리는 통에 아예 몸풀 곳을

마련해주느라 댐을 건축중인 모양이다.

 

 

이 곳은 기원을 막 끝내고 돌아가는 모양새다. 

 

'미수허목'의 묘역을 찾아가는 길.....민통선 안에 모셔져 있다는데, 나는 과연 들어 갈 수가 있을까?

임진강 최북단의 다리 북삼교위에서 지금은 흔적뿐인  그가 드나들었다는 다리 북쪽의 나루를 바라본다.

지난해, 경북봉화를 두 번이나 거푸 방문을 했었다.  늦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조선제일의 아름다운 정자

'청암정'에 올라보고 점점 미수허목의  절필인<청암수석> 을 마지막으로 영면하셨다는 그 분이 궁금해졌다.

아니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고는 점점 만나고싶은 간절함에 솔직히 안달이 났었다.

나는 강서리 산 48번지를 찾아 삼북교를 건너 민통선 검문소, 징파리 초소를 향해 곧장 직진했다.

(다음글로 계속........./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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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이 글을 써 두신 후 15일만인가 운명하셨 전한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충재박물관에 가시면 유서깊고 흥미로운 다양한 옛 문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문화해설사님의 도움으로 '미수허목'을 알게되다.

청암수석(靑巖水石) 

전서의 대가였던 미수허목이 보내 온 청암정에 걸린 편액(篇額)

 다양한 옛 문서가 비치된 충재박물관

 

충재권벌은 마치 거북이처럼 생긴 큰 수석의 등위에 정자를 세우고  정자 둘레에는 물길을 끌어들여

거북이가 물 가운데 정자를 업고있는 형상으로 건축을 했다고 한다.

 

충재권벌이 독서를 하는 곳으로 겨울에는 청암정 바로 앞의 건물에서는 겨울을 나고 바람을 쐬고(下사진 左) 

여름에는 즐겨 독서를 하거나 시문을 지었다는 정자로  닭실마을 황금들판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풍경~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했다.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된  조선 중종 문신인 충재권벌(1474~1548) 선생의 유적지이다.


냇물을 끌어들여 그 물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에 세워진 청암정을 돌아나가게

만들고 亭內에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篇額)이

걸려있어 옛날 시골 연못의 모습을 지금껏 보여주고 있다.

 

 

 

과거시험 답안지

 

경상북도 봉화 닭실마을 충재박물관에서 문과 과거시험 답안지를 보았다.

문과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시험의 답안지가 유뮬관, '충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완전한 논술형 답안지다. 여태 상상으로는 웬만한 크기인 걸로 짐작을 했는데, 무려 답안지의 크기가  전지 한 장 크기 세필로 빼곡히 채워나간 방대한 서식에 놀랐다. 

그리고 부정행위 방지에 대한 일목요연함에도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문화해설가님 말씀을 녹음을 해오면 무척 유용했을텐데, 다녀온지 시간이 흐르고 나는 늦게야  답안? 작성에 이 빠진 듯 건성 쓰고 있나니....완전 낙방이다.

화제가 주어지면 전지 한장을 다 메꾸도록 답안지 작성을 논리정연하게 써내야 하는데....이렇게 대처방안이 있는 걸로보아 그 옛날 과거시험에도

커닝은 여전히 존재했었고 부당채점관도 있었나보다,  물론 현재처럼 쪽집게 과외도 있었다는 재밌고도 놀라운 사실이다.

 

 

1/답안지 머릿부분이 잘라진 것은 응시자의 이름을 쓰는 곳이라 한다.

채점자는 누구의 답안지인지 모르게 찢어 따로 보관을 하는데 그 때 검수관의 사인과 일치해야한다. (찢어진 가운데 글씨)

응시자의 이름은 물론 친부의 성명과 조부의 성명, 외조부의 성명까지도 써야한단다.

 

2/답안지 중간 중간에 도장이 찍힌 것은 현장에서 틀린 글자를 바로잡을 때 즉시 현장에서 오자를 정정했다는 도장을 받아두어야 한단다.

아니면 채점할 당시에 고쳐진 것일지도 모르므로,

 

3/三之二...의 뜻은 들었는데 까맣게 잊었다. (맹꽁!)

                    이제와 추측컨대 갈지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  응시장 좌석 배열이 아닐까도 싶다. 지금으로 치자면 수험번호?

삼지이(三之二)라는 뜻은 병과의 이등을 나타낸 것이라 합니다.

 

 

사진도 없었던 옛날인데 인물대조는 어떻게 했으며  부정행위를 막는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대처했을지  그 것도 무척 궁금했었다.

 

이야기를 조금 인용하자면, 조선시대 최고 지배층은 관료였고 관료가 되려면 과거를 통해야 했으며 양반 구실을 하기 위해 유생들은 과거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과거시험장에서는 시험감독관이 열 개의 도장을 갖고 다니면서 컨닝이나 예비컨닝 행위를 발견하면 그 수법에 따라 각기 다른 도장을 대호지(시험지)에 찍음으로써 급락 판정에 참작토록 했다는 것이다.

 

그 옛날  과거시험에도  커닝은 있었다.

 

①남의 글을 빌려 쓰는 일(차술차작)

②책을 과장에 가지고 들어가기(수종협책)

③과장에 아무나 들어가기(입문유린)

④답안지 바꾸기(정권분답)

⑤과장 밖에서 답안 작성(외장서입)

⑥문제지 사전 유출(혁제공행)

⑦시험관리요원 바꾸어 출입하는 일(이졸환면출입)

⑧답안지에 장난치는 일(자축자의환롱) 등등

 

과거시험장에서는 시험감독관이 열 개의 도장을 갖고 다니면서 컨닝이나 예비컨닝 행위를 발견하면 그 수법에 따라 각기 다른 도장을 대호지(시험지)에 찍음으로써 급락 판정에 참작토록 했다는 것이다.

① 의영고 : 콧속에 커닝종이를 숨기는 것

② 협서 : 작은 커닝종이를 붓대 끝에 숨기는 것

③ 혁제 : 시험관과 응시자가 결탁하는 행위. 이것을 막기 위해 암송시험때는 응시자와 시험관을 분리시키는 장막을 쳤다. 
             또한 역서라고 하여 시험관이 과거 응시자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서리가 붉은 글씨로 다시 쓰기도 했다.

④ 절과 : 합격자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바꾸어 붙이는 행위로, 학력있는 사람과 미리 공모하든지 매수하여 저질렀다.

             또 옆사람과 답안지를 바꾸는 것은 환권이라 한다.

⑤ 차술 : 남의 답안을 베끼거나 대리 시험을 보는 것

⑥ 이석 : 과거 응시자는 시험보는 도중 차를 마시거나 소변을 보기 위해 딱 한번 자리를 뜰 수 있는데, 이것을 이용한다.

⑦ 낙지 : 답안지와 초고지를 땅에 떨어뜨려 답안을 보게 하는 것

⑧ 설화 : 옆사람과 은밀히 말을 나누는 것

⑨ 고반 : 눈동자를 사방팔방으로 돌려 남의 답안지를 훔쳐 보는 것

⑩ 음아 : 입속에서 중얼거리는 행위로, 특히 시문을 지을때 많은 암시를 줄 수 있고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커닝 수법이 다양해지면서 그 벌도 엄했는데, 과거장에 책이나 문서를 가지고 들어갔을때는 3~6년동안 과거 시험 자격을 박탈했고, 다른 부정행위때는 곤장 100대와 징역 3년에 처했다.

 

조선시대 <쪽집게과외>

  조선시대 양반들은 원래 4대 이상 과거에 급제하는 이가 나오지 않으면 평민의 지위로 떨어 지게 되어 있었다.

혼례 등을 통해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무엇 보다도 과거에 합격 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조선시대 과거에 쪽집게 문제가 횡횡 했다.  이런 책자를 일러 초집(秒集)이라고 하였다.

초집에는 이미 출제된 문제와 모범답안, 그리고 앞으로 출제가 에상되는 예상 문제가 있었다.

마음 급한 선비들은 이 초집을 이용해 시험에 임박 했을때 벼락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007년 6월에 완공된 충재박물관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 곁에 건립되었다.

 

 

 원본을 보시려면 click~하세요!

 

 

충재권벌의 연표를 보다가 또 하나 깜짝 놀랄 일이... 

 

 

연산군 10년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내시 '김처선'1의 '처'자가 글 속에 있다하여 취소되다.

 라는 글이다. 아마 이 때가 '김처선'이 내처졌을 때 일이었나보다.

 

수정한 곳은 반드시 정정했다는 도장을 즉석에서 이렇게 받아야 한단다.  

 

 

 

근래에 재연한 과거시험장 모습 

충재박물관에 가시면 유서깊고 흥미로운

다양한 옛 문서들을 직접 보실 수가 있습니다. 

가시기 전에 문화해설사님을 요청하세요(봉화군청 문화체육과)

 

이요조

 

 

 

  

김처선 

?~1505(연산군 11).
조선 전기의 환관.

본관은 전의.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왕을 시종했다. 몇 차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정2품인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궁중에서 자신이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베풀고 음란한 거동을 벌이자 "이 늙은 신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다"고 직간하다가, 연산군에게 직접 다리와 혀를 잘리고 죽임을 당했다. 죽은 뒤 부모의 묘가 파헤쳐지고 처(處)와 선(善) 두 글자의 사용이 엄금되었으며, 본관인 전의도 없어지는 등 수난을 당했다. 연산군이 폐위된 뒤 1506년(중종 1) 고향에 공적을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각주를 사용했으나 text가 길어서 잘린고로 다시 올립니다.

 

 

  1. '?~1505(연산군 11). 조선 전기의 환관. 본관은 전의.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왕을 시종했다. 몇 차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정2품인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궁중에서 자신이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베풀고 음란한 거동을 벌이자 \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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