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청량사(淸凉山)답사
청량사 홈페이지 서두문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한국속에 가장 고귀한 터에 자리한 청정도량!
경북 봉화에는 이름 그대로 청량함과 고귀함을 간직한 청량사가 있다.
청량산을 들어서면서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알수 있었지만,
깊고 깊은 오지에 한 때 번성했던 천년고찰이 있을 줄이야....
위세를 떨치던 큰 절이었지만 조선의 억불 정책으로 피폐했다가 최근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다시금 사람들의 발길이 한결
수월해져 왕래가 잦아졌다 한다.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청량사는 가파른 돌산을 현재도 여느 차는 오르기도 버거운데 어떻게 이 곳에다
큰 사찰을 지으려 생각했는지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청량산은 준봉마다 바위덩어리였다. 열두봉오리 암봉은 연화같이 둘러쌌으며 그 한가운데 청량사가 마치 연심같이 앉았다 한다.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왼쪽으로 보이는 가파른 언덕에 청량사 일주문이 있는데....해설사님은 그 길은 무시하고 무조건 저만치 앞서 길을 재촉한다.
< 여기가 청량산데...청량사 간다더니...어디로 가세요?>
대화하기엔 좀 거리가 있는지라 무조건 따라오라는 손짓에 한참을 가다가 산으로 올라가는 좁은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좁은길로 가파르게 한참을 헉헉거리며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걷기좋은 산, 오솔길이다. 한 20여분 올랐나보다.
'청량사가 가파른 곳에 있는 줄 짐작이야 했지만, 이렇게 까지 멀리 빙-둘러야 하다니....'
숨 가쁘게 헥헥대느라...앞 사람 등만 보면서 오르다가 보니 어느새,
청량사가 저 멀리- 숲 사이로 보인다.
멀리서 바라보는 내 눈에도 명당자리로 보일만치 빼어난 절경이다!
이제 다왔구나 싶어 그제사 목도 마르고 잠낀 쉬었으면 하는데 오른편에 사람들이 왁자하다.
청량산 산꾼의 집이 가파른 길을 올라온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었다.
산꾼 이대실 명장은 도예와 신비의 숨맥차단 달마를 그리며 장승을 깎고 산악구조 및 구정약차를 무료로 대접하고 있었다.
얼마나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등산로는 비좁을 정도였고 청량사에는 온통 울굿불긋 등산복 행장의 사람들로 난데없는
파시를 이루고 있었다.
예까지 올라오느라 여행 전 삐끗한 아픈 허리 탓도 있지만.....복잡한 그 틈새를 비집고 올라가기를 선선히 포기해 버렸다.
이렇게 바라만보고 하산하자 마음먹으니 갑자기 여유가 생기고 생기가 돈다.
일행은 올 봄에 생긴 정상의 하늘다리까지 힘들게 올라갔다.
그 곳까지 얼마나 가파른지 네 발로 기어올라갔다는데....그 길을 다시 되짚어 내려오자면 또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되돌아 나오는 길은 입구에서 스쳐 지나간 일주문이 있는 그 길이다.
세멘트길에다가 위에서 내려다 보니 까마득하게 내리꽂을 정도의 내리막 길로, 처음 오는 차들은 그냥 오르라해도 겁먹어
아예 오르기를 도리질쳐질 그런 경사진 길이었다.
그 길로 진입을 하면 등산하는 재미도 없을 뿐더러 힘만 무지 쓰여서 일주문 길은 하산시에만 사용을 하는데 가파른 길이라 종종 뒷걸음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청량산 등산길은 그래서 일방통행길이다. 물론 하산시에도 그 좁은 오르는 산길을 이용하는 사람도 더러있긴한데 그 건 아마도 자기들에 주차시켜둔 승용차와 거리가 가까워서 일테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뒤로 걸으니 한결 수월했다.
워낙에 가파른 길이니...뒷걸음도 조심하지 않으면 아차 실수에 구르기 쉽상이다.
내려오는 길은 어찌나 가파른지 도저히 한 눈을 팔 수가 없었다.
절간 아랫마당에서 조금 내려서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이라 일컬어지는 안심당이라는 찻집을 만난다.
안심당은 사찰내의 전통 다원(茶園)으로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은 대중들이 스님을 만나는 곳이 된다.
여기서 얻어지는 수익금은 중생구제의 한 실천으로 포교사업과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여지고 있단다.
전통다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은 안팎 곳곳에서 은은한 전통의 멋과 향을 느낄 수 있는 모두에게 개방된 산사의 포근한
쉼터이다.
나는 잠시 잠깐...'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이라는 미당님의 시를 떠 올렸다.
어쨌거나 연꽃이거나 바람이거나...
내가 바람같은 길손이라면....연꽃만나고 가는 바람이 맞을레라~
하산하는 일행이 누구 없을까? 찻집 앞에서 한참을 기웃대며 기다리다가
나, 바람 한 줄기는 그냥 소리를 만나지도 듣지도 못한 채 하산했다.
청량산 입구 주막에 앉아 묵 한 접시와 동동주 한 사발만 만났다.
어디선가 바람에 낙엽하나 팔랑이며 떨어졌다.
이요조
*청량사 약사여래 부처님은 종이재질을 이용한 지불(紙佛)로 유명하다는데 그 지불위에 금장칠을 하였다 한다.
문화해설사님 말씀에 의하면 얼마전에 지불을 살펴 볼 계기가 있었는데...지불인줄로만 알고 있었던 부처의 재질은
종이가 아니라 마(麻)로 짠 천, 베 종류였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청량이라는 지명은 삼각산(옛 북한산이름)에서 볼 때 남쪽을 이름이란다.
정동진이 서울에서 동쪽이라더니...
청량리도 삼각산에서 볼 때 남쪽,
청량산도 남쪽이라는데 맥락을 같이한다고 한다.
제가 하늘다리까지는 못올라갔더니 일행인 '강경원'님이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포스팅에 쓰라고....감사한 일입니다.
퇴계 이황과 청량산
해발 870m의 청량산은 외형상 그리 높지는 않으나 선비의 기품을 지닌 산으로 이 아담하고 단정한 모양을 선비들은 사랑했었다.
일찍이 신재 주세붕도 이 청량산을 보고 "줄지어 선 봉우리는 물고기의 비늘과 같고 층층이 늘어선 벼랑은 꼿꼿하기만 하여
정녕 단아하고 곧은 선비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청량산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라면 선비 같은 산, 선비의 산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것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퇴계 이황보다 청량산을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청량산은 옛 퇴계 가문의 산으로 그의 5대 고조부 이자수(李子修)가 송안군(松安君)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封山)이다.
안동 예안의 온혜에서 청량산까지는 불과 40여 리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명승지이다.
퇴계는 평생을 이 산에 올라 학문을 탐구했으며 꿈에서도 이 산을 잊지 못했다. 이렇듯 청량산은 퇴계 삶의 동반자이자 스승이었다.
퇴계와 청량산의 인연은 1513년 2월에 13세의 나이에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偶, 1469~1517)가
조카와 사위 조효연(曺孝淵)"오언의(吳彦毅)와 함께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숙부 송재는 이들에게 11편의 시(詩)를 지어 주었다.
학문하는 사람의 길 산 오르기와 같나니
깊고 얕음 잘 해내면 가고 옴도 미더우리
하물며 저 청량은 경치가 좋고 그윽하여
내 일찍 십 년간을 거기서 공부했지
내 놀던 발자취 눈에 삼삼 아른거려
너희들 보내면서 괜히 십절 시를 읊었네
이번에 가 수학하면 좋은 기록 갖고 오라
상자 속 옛 기록 찾아 전후 비교하리라
송재는 이렇듯 시(詩)를 주면서 퇴계 등에게 독서에 전념 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학습장이었고 자신들의 수련장이었던 청량산과 퇴계와의 관계는 이때부터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후 퇴계는 1515년(15세) 되던 해 봄에 사형(四兄) 온계 해(瀣)와 함께 숙부 송재 선생을 모시고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했다.
1525년 25세에는 봄에 청량산에 입산하였는데 열흘 동안 눈바람이 세차 서울에 올라간 3째형을 그리며
2년 전 한강을 건널 때 눈보라를 맞으며 읊은 시 '풍설(風雪)'에 이어 시를 읊었다.
또한 이때 퇴계는 청량산 보문암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주자(朱子)의 '마상설(馬上雪)'에 운(韻)을 붙여 시를 읊었는데
지금 그 시(詩)는 전하지 않는다. 1528년 28세에는 '청량산 백운암기'를 지었다.
' 백운암기(白雲庵記)'는 절의 승려 도청(道淸)이 찾아와서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하기에 간략하게 절의 승경을 기록해 보냈다.
이후 청량산 백운암에다 선생의 '백운암기'를 새겨서 절간 벽에 걸어 두었다.
이때 퇴계는 주자가 사액(寺額)을 써 주지 않는 의리를 생각해서 이를 지켰다.
1552년 (52세) 9월에는 주세붕의 '청량산록발(淸凉山錄跋)'을 지었으며 1553년 (53세) 9월에는 주세붕의 '청량산록후발(淸凉山錄後跋)'의 제시(題詩)를 지었다.
'청량취소도(淸凉吹簫圖)'와 단원 김홍도
청량산은 '화선(畵仙) 김홍도'와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1784년 정월에 안동부의 안기찰방으로 부임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 ? )는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시와 풍류를 즐겼다.
이 사실은 성대중의 《청성집(靑城集)》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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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도'속의 김홍도 △김홍도의 '단원도'(좌측 첫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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