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쓰는 엄마의 편지


*사랑은



지난 겨울 김장을 하다만 남은 재료,(힘에 부쳐서) 대파를 엄만  그냥 큰 화분에다 두 군데

나눠 심었다가 무거워서 옮기지도 못한 채 그냥 죽을 테면 죽으라지 하고 바깥에 버려둔 것이

한겨울 필요할 때는 흙도, 파도 꽁꽁 얼어서 뺄 엄두도 못 냈다.
그랬더니..봄이 완연해지자 얼었던 잎새가 파릇해오면서 며칠 전에. 마침 파가 떨어져서
뽑아보니...
세상에나 모진추위를 잘 견뎌내고 하얀 뿌리 가닥이 새생명을 안고 싱싱하게 올라와 있더구나

얘야,
넌 엄마에게 그랬지?
"엄만, 도대체 감흥이 없어~ 이제 함께 구경 안 다닐래요" 라고 말이다.
엄마가 왜 감흥을 모르겠니?
파 한 뿌리에도 이렇게 즐겨 카메라를 들이대는 엄만데....

네가 어렵사리 마련한 오페라유령 로얄석, 그것도 끝나 가는 6월 마지막 어느 날,
바로 그 날이...우리가 월드컵 4강까지 진출할 줄은 우린 아무도 몰랐다.
예측이나 했던 일이냐?
스포츠 관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에미도 그 날만은 온통 바깥으로 마음이 쏠리던걸~

그 날, 하필이면 바로 그 시간에  관객들 거의가 여자였지 않더냐? 어느 남자가 이렇게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하는

신나는 스포츠 경기관전을 팽개치고 어두운 실내,  오페라 유령을 보러 오겠더냐?

막간에 모두들...우르르 쏟아지듯 죄다 나오면서 이구동성으로 "몇 대 몇이예요?"

그 날 오페라 감상은 완전 '꽝'이었다.  마음은 콩밭에 있고, 거금을 들인 넌 억울하고(너 역시 그랬을 테니까)

그 날 나오면서 넌 투덜댔다. "엄마랑 이제 다시는 안 와~"

ㅎㅎ 그리고 다시 [색채의 마술사 샤걀전]
역시 엄마는 담담했다.
역시 넌 똑 같은 소릴 하고...

엄마가 엄마가 말이다.
글을 즐겨 쓰던  엄마 스스로도 눌러버린 채,

초등 때부터 글짓기 상을 휩쓸던 너의 싹마저 여지없이 가위로 전지 하듯 해버린 내가 아니더냐?

여자가 글을 쓴다고 자기를 앓는 짓을 그런 자해스런 짓을 서슴없이 네가 선택한다면 상상만 해도 엄마에겐 너무나 끔찍한 일이라서 말이다.

자기가 아파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글로써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겠느냐?
엄마는 희미하게나마 여자들에게 있어 "글팔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黃眞伊, 허난설헌이 그래왔고...그 외...외로이 홀로 숨져간 이들,  이름을 날리는 여류문사들도 그 마음만은 그리 속속들이 행복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혹한 현실 앞에, 이상은 더없이 높기만 하고...그 gap을 극복하기가 좀 어려운 일이겠느냐?

엄마의 유일한 학창시절 친구 영숙이 아줌마 알지?
지금은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비구니스님이 되었잖니?

그 아줌마가 그랬다.
들에 나가면 나비 한 마리에도 기뻐 놀라고...새싹 하나에도 자지러지던,
그런 넘치는 감성을 주체할 수 없어 꾸준히 글을 쓴 탓에 수필가로 시인으로 바쁘더니만 정작 아내로써 엄마로써... 그만 자리를 내어놓고 말았던...

거의 25년 만에 처음 나를 찾아와 변함없이 수선?스럽던 친구를 충고로 나무라고 영숙아줌마는 그렇게 떠나갔다.  한 달포를 함께 지나면서...나는 눈치도 없이 그녀가 늘그막에 홀로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온 것인 줄만 알고 있었다.
혼자가 된 것을 진즉 알았다면 잘 감싸 안아주고 토닥여 주었을 텐데...아직도 미안함이...아마도 평생을 갈 죄책감중에 하나일 것 같다.

얘야,
언젠가 내가 그랬지? 옛말에 "턱턱 사랑 영이별이요 실뚱머룩 장래수"라고, 너무 좋아 어쩔줄 모르게 자지러지다가... 어느 날 그 놀음에 지쳐 사랑이 떠난 양,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제각기 갈길을 가듯  바삐 헤어지는 거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이별이 잦다.

요컨대 엄마가 네게 전해주는 사랑의 정의는 사랑은 애틋하게 잔잔히 강물 흐르듯 하라는 거다.

엄마는 네 외할머니께...이런 말씀을 듣고 자랐다.

어느 남자가 본처와 애첩을 두었는데, 그 둘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하루종일 신다가 튿어진 버선을 던져주니...애첩은 꿰맨 후 남은 실밥을 가위로 싹둑 자르는 반면
본처는 더럽다 않고 입으로 가져가 이빨로 끊더라는 구나.

또 한가지 더 실험을 하려 약첩을 사다 나눠주었는데...
애첩은 약이 졸아서 양이 적으면 물을 더 타고,  많으면 부어 내버려  언제나 마시기 적당한 양으로 만들어 올리더란다.
물론 본처는 약물이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대로 그대로 올리더란다.

"사랑은 그렇게 '멋'을 내지 않아도 사랑 그 자체로도 빛이 난다."

우리네 한국식 사랑은 먼-길 떠났던 남편이 돌아오면 그 모습.. 먼 빛으로 확인만 한 후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빵긋~~/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가사처럼)
부뚜막으로 내닫는다. 얼른 따뜻한 밥상을 차리기 위해, 물론 부뚜막에는 항상 집 떠난 식구를 위한 밥그릇에 밥을 떠 담아 두는 것도 잊지 않는 풍습을 지닌, 우리 민족만의 사랑 법이자 고귀한 사랑의 표현이다.

집 떠나 혹여 끼니라도 제 때에 맞춰 잘 챙기는지...사랑으로 기도하듯 염려하는,

요즘 너희들이 선호하는 사랑은 서구식이다.
오랜만에 만나면 시선의식 않고 부둥켜안고 뽀뽀하고...
그런...그 사랑...물론 기름지고 맛나다.  그러나  항상 기름진 음식은 이내 식상하게 만든다.

늘 먹는 밥맛처럼 달지도 기름지지도 않은 밥맛 같은 사랑~~

까르르...쏟아내는 웃음보다
삼키는 웃음(미소)이 더 우아하고 아름답듯이~~ 

 

이 봄에는 부디 볕바른 사랑의 텃밭 하나,  충실히 가꾸려무나 알았쟈??


파 한 뿌리를 들고 네 생각에 잠긴....엄마가, 

꽃이 피기시작하는 어느 봄 날,

글/이요조

*추신

 

요즘 봄철에 나오는 파는 값이 싸서.... 거저 주듯 해도 먹기에 제일 망할(마땅찮을) 때다.

겨우내 자란 파(아랫녘)가  이제사 꽃을 피우고 씨앗을 품을 때가 되어서 늙어 거세어지기

때문이다. 대궁은 딱딱해지고 맛은 떨어진다.

 

엄마가 깊이 묻어둔 파는 흰 뿌리가 거의 다 묻히도록 모래를 덮어주었더니...

아주 연하고 부드러운 파로 다시 나는구나

 

그래...그 뿌리가 깊게 심어져 있으니...억세지 않단 말이다.

파의 속대궁으로 말하자면 꼬갱이,,,깡아리...즉 우리들의 자존심으로 생각해 보자,

뿌리가 깊으면 깊을수록 꼬갱이가 (자존심)안 생기는 것을,

 

사랑은 모름지기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그래야만...추운 한파에도 잘 견뎌내고....못쓰게 될, 꼬갱이도 없는 부드러운 파로 남게 되는구나

알겠느냐?

 

사랑의 뿌리가 깊어질수록 '자존심' 따위는 세우지 않는다는 것을...덧붙여 적어본다.

자존심을 앞 세우는 건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愛' 일 따름이다.

 


 


'요리편지 > 딸에게 쓰는 엄마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딸에게.../엄마가 전하는 말  (0) 2005.08.12
꿈길  (0) 2005.04.19
,..오우, 딸! 진정 내 딸 맞느냐?  (0) 2004.12.02
전생  (0) 2004.09.04
딸에게 편지를 쓰며,  (0) 2004.07.2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