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나무 메뚜기>

월드컵 준결승하는 날이다.
드물게 좋은 날씨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편안하고
먼 데 경치는 씻은 듯이 또렷하게 보이고
가로수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얼마만에 걸어보는 인사동길인가.
어렸을 때는 거의 매일 다니던 길인데...
아마 20년은 족히 됐지?

깨끗하고 멋지게 변했다.
둘레둘레 구경하며 여유롭게 걸어간다.
화랑도 많고 표구점, 필방, 도예점, 공방,
골동품점, 민예품점, 자수점, 개량한복점,
그리고, 여기저기 내걸린 음식점 간판.

점심을 먹어야지.
만두 잘하는 집이 있다던데...

사동면옥을 찾았다.
실내장식을 요란하게 한 집이다.
뭘 이렇게 정신없이 만들어 놓았나...
만두국물맛이 독특하다.
산초, 황기 맛인가?
해초맛은 확실하다.
만두는 그냥 담백하고 부드럽다.
밑반찬으로 나온 호박새우젓조림 맛이 좋다.

안국로터리 쪽으로 스적스적 걷는다.
건물들은 깨끗하고
찻집들은 개성이 있다.
보도와 차도 사이에는
가로수와 꽃과 큼직한 직육면체 석물들이
줄지어 있다.

사람도 많다.
붉은 티셔츠 차림이 여기저기 보이고,
옛날신사 티가 나는 분들도 이따금 보인다.
친구분들과 나들이를 나오셨나?
외국인 관광객도 꽤 있다.
키가 육척에 가까운 사십대 서양여자,
그 여자가 입은 스카프처럼 하늘하늘한 치마,
어쩐지 경박스러워 보이는 일본 청년,
가무잡잡하고 입술이 두터운 편인 동남아 사람.

안국로터리 부근 크라운베이커리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어떤 이가 뭘 만들고 있다.
잎사귀를 길게 찢어서
척척 접고 매듭을 짓고
송곳으로 구멍을 내서
그속으로 꿰어당기고...
그렇게 메뚜기를 만든다.
진짜 같은 메뚜기다.
재료가 무어냐니까 종려나무란다.

삼천원에 한 마리를 사서
무얼 할까 생각한다.
누구에게 줄 생각이다.
옳거니...
세 번째로 칼럼지기가 되시는 님께 드리자.
<열마대상>이니 <오월의 여왕>이니
맨날 엉터리 사이버 상만을 올렸던 데 사죄도 할겸.

다시 종로 쪽으로 걸어간다.
시골 촌놈처럼 두리번 거리면서...
스타벅스커피점도 인사동길을 침범했다.
종로에 거의 다와서 大臀女를 보았다.
상돌벤치에 퍼져앉아서 무얼 먹고 있는데,
꼭끼는 흰바지에 정말 안반만하다.
역시 서양사람들은 좀 멍청해보인다.

촌놈 인사동 구경에 기분이 즐거워진다.
그런데 아차 !
십년 넘게 가보려 했던 <歸天>을 깜빡했잖아 !!!.


.( 주 : <歸天>은 작고하신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운영하는 찻집이다.
<종려메뚜기>는 내 책상속에 고이 모셔놓고 있다.)


작은큰통.200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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