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 삭, 귓전을 스쳐가는 갈바람 소리.
"삐리릭 삐리릭"
"훠어이 훠어이"
"딱 딱"

누렇게 나락 익어가는
논엔 참새 쫓는 소리가 한창이다.
이맘 때 쯤이면 마당엔 벌건 고추가 한 가득이고
들녘은 바라보는 마음만으로도 풍요롭다.

"어이, 칠복이 탁배기 한 잔 하고 가게".
억새숲 사이로 새참 소쿠리가 논두렁을 건너고
술주전자를 든 아이들 웃음이 연어처럼 날뛰었다.
아낙들은 두렁에 찬을 풀고,
고등어 조림이며 고깃국을 맛깔나게 내놓았다.
수저도 서너 벌 더 챙기고 반찬도 넉넉히 담아
새참은 늘 푸짐했다.

사기대접에 뽀얀 탁배기가 콸콸 따라지고
장에 다녀오는 사람,
구들지기 노인들까지 다 불러 술잔치를 벌였다.
지난 봄 물꼬 싸움에 멱살 잡혀 앙숙처럼 지냈던
칠복씨도 슬쩍 끼여 못이기는 척 한 잔 비웠다.

술은 추수 후 햅쌀로 담그는 것을 으뜸으로 쳤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이집 저집 술익는 냄새가 시큼하게 번졌다.
아낙들은 날잡아 쌀 몇 됫박을 담갔다가
시루에 쪄 고두밥을 지었다.

김이 오르고 시룻번이 익어가면
그 달짝지근한 밀떡을 떼어먹는 재미에
아이들은 부뚜막 옆을 고양이처럼 지켰다.
고두밥에 누룩을 섞어 멍석에 말린 이 밥은
쫄깃쫄깃하고 맛이 좋아 손을 많이 탔다.
누룩이 묻어 까슬한 밥을 아이들은
한줌씩 뭉쳐 내달음치곤 했다.

이 밥을 맛 잘든 독에 담고 물을 잡아
절절 끓는 아랫목에 솜이불 폭 씌워 익혔다.
2∼3일 지나면 발효하면서 버글버글 끓어 오를때면
어머니는 쉬지 않게 온도조절하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독을 들여다봤다.

고구마통가리 썩는 듯,
메주를 띄우는 듯 그 쾨쾨한 냄새는 정말 지독했다.
술에 대가 돌면 독 안에 용수를 박아 말간 청주를 떠냈다.
물을 부어가며 체에 거르면 '막 걸렀다' 하여 막걸리가 되고
텁텁하지만 진한 맛이 있었다.

연누른 빛 맑은 술에 밥알이 동동 뜬 동동주는
달짝지근하여 입에 쩍 붙는데
도수가 높아 마시다보면 은근하게 취했다.

꾼들은 냄새가 알싸하게 올라오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술맛을 본답시고
간을 재다 종일 취해 돌아다녔다.
또 아낙들은 술이 익으면 지나는 체부든 동냥아치든
마루로 불러 김치에 술 한보시기 씩 내왔다.

간식거리가 귀했던 시절 아이들은
이 술 찌끼에 사카린을 타 먹곤 했다.
그것도 술인지라 가끔 벌겋게 취해 드러눕는 일도 있었다.

"술도감이다!"
멀리 신작로를 타고 밀주 단속원의 자전거가
나타나면 동네는 선술집처럼 술렁댔다.

대부분 농가에선 제사며 농삿일,
잔칫날에 쓰려고 술을 한 독쯤 익히고 있었다.
삽짝을 걸고 밭으로 내빼기도 하고
이곳 저곳 숨길 곳을 찾느라 소란을 떨었다.

먹다만 술주전자는 아궁이에 밀어넣고
나뭇간, 장독, 헛청, 뒤란 대숲,
심지어는 썩은내 푹푹 나는 두엄까지 들춰 숨겼다.

시치미 딱 잡아 떼는 통에 단속원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집안을 헤집고 다니기 일쑤였다.
특히 철없는 아이들 입단속에 아낙들은 애가 달았다.

모두 그런 일 없다며 손사래를 치면
술도감은 슬그머니 물러섰다가 동구 밖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을 눈깔사탕 하나로 꼬드겼다.

알록달록한 그 사탕을 보면
어머니의 당부는 까맣게 잊고 술술 불어버렸다.
물론 그날 저녁엔 부모님으로부터 치도곤을 당했다.
술을 1말 정도 담갔다가 걸리면
쌀 10말은 벌금으로 물어야했고 무엇보다도 오라가라
해대는 통에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하여튼 시큼한 술냄새를 맡고 이웃집에서
"이 집 술 담그나" 하면"식초 내린다네"하며
눈짓하곤 했다.

"술 한 되 받아오너라".
담근 술도 여의치 않으면 점방에 심부름을 시켰으나
아이들은 무척 싫어했다.
점방 술독엔 나무 술구기가 독 속에 담겨 있었고
됫박 인심은 주인 맘이었다.

짓궂은 아이들은 돌아오는 길 밭둑에 앉아
술을 반 주전자쯤 마시고 우물물로 채웠다.
그러면 어른들은 점방 여편네가
물을 타서 싱겁다며 삿대질을 했고
아이들은 슬그머니 꽁지를 뺐다.

장맛처럼 이 술맛도 손내림이 있어
집안마다 독특한 풍미를 자랑했다.
종류도 많고 맛도 다양해 술맛을 보면
그집 아낙들의 손끝 맛을 알 수 있었다.

꽃이나 과일껍질을 넣어 만든 가향주,
아지랑이처럼 술빛이 아롱거린다는 백하주,
봄철 진달래꽃을 넣은 두견주,
여름철 황혼녘에 빚어 밤을 재운 뒤
새벽닭이 울면 마실 수 있다는 계명주,
연꽃향기가 난다는 하향주,
비스듬히 자란 소나무에 넣고 빚었다는 와송주,
네 번을 빚어 1년이 지나도 쉬지 않는다는 사마주….

일과 화해, 축복의 자리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었고,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기도 했던 술.

우리들은 어쩌면 이 가을의 어느 길목에서,
볕 잘드는 툇마루에 길손처럼 초대받아
잘익은 술 한 잔 대접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1.체부=우편배달원
2.술도감=밀주 단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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