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난리




국민학교 시절,
학교는 집에서 시오리길이었다.
킬로미터로 환산한다면 6km
시오리가 조금 넘는 거리라고 했으니 6km가 넘는 셈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에는 도랑 둘과 시내가 하나 있었다.
여름에 큰 물이 지면 도랑과 시내에는 흙탕물이 사람을 삼킬 듯 넘실거렸다.
어린 학생들은 어른들이 업어서 건네주었다.
물론 물이 사람이 건널 수 있을 정도였을 정도에 한해서다.
이상하게도 우리가 학교에 다니지 못할 정도의 큰 물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새마을 운동 덕분일거라는 나름대로 추측이다.


비가 많이 오고 큰 물이 도랑이나 시내를 넘실거리면 아버지들이 업어서 건네 주었다.
그렇지만 몇 개씩이나 되는
도랑과 내를 아버지 혼자서 건네 주기에는 멀고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도랑이나 시내에는 가까운 동네 젊은 남자들이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업어서 건네 주기도 하고
유달리 힘 센 장정들이 따라와 건네 주곤 하였다.


오빠가 6학년이고 내가 2학년이었던 해였다.
그 해도 비가 내리고
어른들은 학교를 가기 위해 나온 아이들을 업어 시내를 건네 주었다.
어른 혼자서 건네 주기에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아이들 수 만큼 어른들도 나왔다.
가장 영향력을 많이 발휘하는 집의 아이가 먼저 건너고 그 순서대로 건넜다.


그런데 그 해는 비가 좀 많이 왔던지
물살이 세고 물의 깊이도 어른의 허리가 잠길 정도였다.
아이를 업은 어른이
내를 바로 질러 건너지 못하고 사선으로 떠 내려가 건너편 둑에 아이를 내려 놓았다.
다 건너고 오빠와 나만 남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 남매를 건너편 둑으로 건네 주려 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오빠가 등을 내밀었다.
키가 크고 덩지가 크다고 하지만 오빠는 겨우 6학년이었다.
나 역시 6학년인 오빠가 업기에는 컸다.
건너면서 떠내려 가면서 책보 두개를 비와 물에 적시지 않고 우리 남매는 시내를 무사히 건넜다.

그 때 어른들은
떠내려 가면서도
학교에 가기 위해
시뻘건 물이 몰아치는 내를
동생을 업고 물을 건너는 오빠와
그 어린 오빠의 등이 얼마나 안전하다고 오빠의 목을 감고
학교에 가겠다고 매달린 나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지금도
소용돌이 치며 벙벙하니 흐르는 여름철 강물을 보면 그 때 그 생각에 잠긴다.


그 이후로 우리는
여름철에 비가 많이 와도 위험을 무릅쓰고 물을 건너지 않아도 되었다.
오빠는 중학생이 되어 나와 함께 학교에 갈 일도 없었고
어른들도 그 이후로는 빼놓지 않고 다 건네 주었으며
곧 이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 다리들이 여기저기 놓인 것이다.

다리를 얼마나 많이 놓느냐에 따라
그 지역 국회의원의 능력과 새마을 운동이 잘 진척되고 있다는 성적표였던 것이다.


부실공사로 수없이 새로 놓기도 했지만
지난 해에 건넜던 그 다리는 무너질 염려는 없어 보였다.
다리 놓는 기술이 발전했고
냇물이 줄어들어 장마철에도
어렸을 적 만큼의 물이 흐를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 덕을 본 적이 있다면서
그 때 아슬아슬했던 이야기를 하며 쓰게 웃기도 한다.


우리 집은
고조할아버지께서 대원군도 허물지 않은
파 시조 할아버지의
사당이 있는 고향을 등지고 타향살이를 시작하면서
우리 집은 몰락한 양반가문이 되었다.

외가집 동네도 아니고
외가집과 같은 파가 사는 동네에
더부살이를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외가집 세력이 만만치 않았지만)
여름에도 보리밥을 먹지 않을 만큼 재력이 있어도 우리는 타성받이였다.

그래서 오빠가 나를 업고 떠내려 가면서 물을 건너야 했다.
어른들은 타성받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기 싫었던 것이다.


올 여름 아직까지 노원구에는 큰 수해가 없다.
그럼에도 텔레비젼 뉴스에 나오는 강물에
왜 그때 그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학교가 파하고는 어른들이 물을 건네 주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엄마가 사 주신 리본 고무신을 물에 떠내려 보내고 혼났다.
리본이 달린 고무신은 아무나 신는 신발이 아니었다.


가끔 학교에 갔다가
아니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내를 건너야 하는데
그 곳은 항상 다리가 무너져 없거나
부서진 나무다리를 건너다
내가 떠내려 가거나 하는 꿈을 꾼다.

그 이후
길가 집 생활을 10년이 넘게 하면서
그 냇가에서
빨래도 하고 머리도 감았건만
그 때의 장면은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아직도 꿈속에서 물을 건너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걸 보면.

꿈 속에서 나는 그 내를 한번도 건너지 못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