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보고싶어"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응" 하고 포장지가 말했습니다.
고운 손길에 포장이 벗겨졌습니다.
"…고마워… 풀어줘서" 라고 하면서 선물이
"속보이고 싶었어" 라고 신음을 하였습니다.
'보고픔'이 그 마음의 근처에서 기웃거리면 덩달아, '보이고픔'이 마중을 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때 있습니다. 서로간에 그리움을 제 가슴에 유치(幼稚)한 후, 기다림을 유치(誘致)하는 것 말입니다.
'보고픔'이 길들여지지 못하고 그만 닳아지면 덩달아, '보이고픔'이 말문을 막아도 맘이 쓰이는 때 있습니다. 둘 사이에 자리한 대기(待機)를 멈추고 그만 그 마음에 기대(期待)고 싶어하는 것 말입니다.
'보고픔'이 어색한 마음으로 *소담스럽게 다가서면 '보이고픔'이 *야멸스러운 마음으로 *벌쪽거리는 때 있습니다. 하나같은 값어치로 같이, 가치(價値) 있는 놀림을 꿈꾸는 것 말입니다.
감추었다가 슬며시 드러날 수 있어야 '보고픔'이 온전히 자리하는가 봅니다. 보챔이 있는 고픔이 아니라 감쌀 수 있는 보로 자근자근 채울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거죽 속에 들어 있어 거품 벗길 수 있어야 '보고픔'이 여물어 탐나게 되는가 봅니다. *되작거리는 마음이 *바글바글 대는 손길에 *가위눌리는 것 말입니다.
'보고픔'은 거울인가 봅니다. '보고픔'을 거울 앞에 세우면 금새 '보이고픔'이 생겨나 *애오라지 닮아가는 것 말입니다.
'보고픔'은 벗기고픈 마음인가 봅니다. 소리의 칼로 틈을 만들고 언어의 톱으로 사이를 비집고 마음의 낫으로 찍어대는 것 말입니다.
'보고픔'은 '드러내고픈 마음'을 그 사람이 머금기를 바라면서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인가 봅니다.
앓아 누워 있는 휘청거리는 삶의 오후에 자그마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서는
'보고싶을 것 같아, 보지 않았습니다.'
'먹고싶을 것 같아, 먹지 않았습니다.'
'좋아질 것 같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였습니다. 괜히,
그런 까닭으로 내 마음을 방목(放牧)시킬 수 없었습니다.
'보고픔'이 한가로이 풀을 뜯지 못하고 그 무엇에 걸리는 것은 쓰다듬어야 할 허기진 발자국이 두 눈에 들리기 때문이고, '삐그덕'거리지만 짊어지고 걸어가야 할 현실이 손목을 휘감기 때문인가 봅니다.
하지만 다시금
"보고 싶어?" 하면
"응" 하고
"많이?" 하면
"응" 하고 대답을 하고마는 것이 우리네 심사인가 보다.
오늘은
보이고 싶습니다.
보고싶은 마음을 들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는
보란 듯이 본 때를 당하고 싶습니다.
볼 낯이 없도록 말입니다.
그럼 안되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