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눈이 펑펑 쏟아져 내린 날 아침, 아무도 지나지 않은 눈 속의 오솔길을 걸어보고 싶다. 뽀드득 뽀드득하며 소리를 내는 눈이라면 더 없이 좋으리이다.
먼 곳으로는 단풍 가득한 산이 보이고, 뜰에서는 이리저리 지푸라기를 헤치며 모이 쪼는 닭을 졸리 운 강아지가 쫓는 둥 마는 둥하며 뒹굴 거리는 초가집의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 잘 익은 단감을 한 입 베어보며 온 시름을 잊어보고 싶다. 뒤뜰 아름드리 밤나무에서 까치라도 울어주면 더더욱 그럴 뜻하리다.
잘 뻗은 아스팔트길, 그 것도 포장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콜타르냄새가 은은히 풍기는 신작로 길을, 콧노래 부르며 시원스레 운전하며 달리다가, 그림같이 생긴 깔끔한 카페에 앉아, 흘러간 팝송을 나지막한 볼륨으로 들으며 향기진한 커피를 한 잔 마셔보고 싶다. 세련미 물씬 풍기는 여주인이 있는 카페라면 커피의 진한 향은 가슴속까지 배어 오리다.
동해바다 저 북쪽으로 달려가, 처얼석 처얼석 솨아악∼ 처얼석 처얼석 솨악∼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곱고 가냘프게 생긴 연인과 함께 철지난 바닷가를 거닐어 보고 싶다. 몸이 추워와도 마음을 데우고 싶다. 등대라도 있어주면 한없이 걸을 수 있으리이다.
아들녀석 손을 잡고 북한산을 구파발에서 우이동으로 넘어 내려와, 구수한 촌티가 배인 시골아주머니 같은 분이 별 치장 없이 차려놓은 빈대떡집에 앉아, 아들녀석이 개구쟁이였던 시절의 얘기를 나누며, 소주 한 잔에 옛 추억으로 돌아가 볼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마음 포근한 휴일을 하루쯤은 보내보고 싶다. 아버지를 이해해주는 정도의 아들이라면 그 산행은 보람되리다.
설악산이라도 좋고 아니라도 좋다. 가슴이 후련할 만큼 산 냄새 들 냄새를 맘껏 맡을 수 있는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가끔씩은 마당에 나와 쏟아질 듯 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들 속에서, 어릴 적의 내별을 찾아보기도 하며 온밤을 지새고 싶다. 촉촉한 이슬에 옷깃을 적셔도 좋으리이다.
마지막 낙엽도 가지를 떠난 스산한 날에 속리산 법주사 한가운데 서서,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다, 물소리도 듣고 새소리도 들으며 냇가를 따라 터벅터벅 한 참을 내려와, 정이품송이 위태로이 서있는 곳쯤에 이르러 더덕구이 한 접시에 동동주 한 잔으로 목을 축여보고 싶다. 고사리나물이라도 파는 아낙네가 옆에 앉아있는 풍경이라면 더욱 어울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