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 클 났다. 내 소원이 하나 있는데.... 꼭 들어준다꼬
약속하마 내 말하고 안된다하마 나 집 나가뿔끼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의 5촌 질녀가 죽을 상을 하고 협박반
애걸반으로 내게 한 말이다.
나는 그때 여고 1년생이었고 그 애는 나보다 한 해 선배인
여고 2년생으로 대구 수성못가에 있는 삼류고를 다니고 있었다.

"와 그라노? 말해봐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마 다 들어주께 "
나는 그래도 엄연한 고모로써, 속으론 무슨 말할까 겁도
났지만 태연한척 그 애를 다그쳤다.

"고모! 이거는 우리둘이마 아는 비밀로 할끼다 절대로!"

그렇게 다짐을 하고는 워낙 엉뚱한 그 애가 내게 한 말인즉,
보충수업을 땡땡이 치고 친구 몇이서 미성년 관람불가 영화를
보다가 학생과 선생님께 걸렸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호통을 치셨는데, 자기는
선생님께 바쁜 부모님대신 고모가 오실거라고 말씀드렸으니
고모가 학교에 와서 자기 담임을 만나뵙고 말씀을 잘 드려서
제발 정학만은 면하게 책임을 지고 임무완수를 해 달라는 얘기였다.

아니, 이 일을 어떡하나?
유일하게 나를 고모로 인정해주는 고마운 그애의 면전에다
"노"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속으론...
"아니야! 난 그애보다 더 어린 여고 일학년인데 어떻게
그 애의 학부형이 될 수가 있나?"
걱정만 태산이다.

막내이신 우리 아버지의 막내로 태어난 나에게는 무려
수십살씩이나 나이를 더 먹은 조카뻘들도 수두룩했다.
그저 항렬로만 따져서 나를 두고 '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도 아주 어린 나이적부터 들어온 나였으니...

그러나, 유독 그애가 부르는 '고모'라는 말은 다른 이들이
그저 항렬을 따라 높혀부르는 '할머니'와는아주 많이 달랐다.
그 애는 늘 나를 진정한 '고모'로 대우를 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그러니 어쩌랴...

그 이튿날, 나는 담임선생님께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거짓말을 하고 조퇴를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큰언니의 뽀족구두에 다이또치마를 입고
입술에다 발갛게 립스틱까지 바르고는 언니의 핸드백을 들고
수성못가에 있는 그애의 학교로 갔다

내가 학교에 간 그 시간은 마침 정규수업이 끝나고 그 지겨운
보충수업을 시작하기 전 잠시 쉬는 시간이었던지라 복도에는
하얀 교복을 입은 내 또래 아이들이 참새떼처럼 모여서
조잘조잘 깔깔거리고 있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교무실을 찾으려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애들이 나의 이상한 차림새를 힐끔거리며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얘, 쟤 **여고 일 학년생인데 지가 경옥이 학부형이라꼬
선생님 만나로 왔다카데 오 ㅎㅎㅎㅎㅎ"

네들이 암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하는 수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하이힐소리 요란하게 또각거리며
보무도 당당히 2학년 2반 선생님을 만나러 교무실로 향했다.

"선샘예, 저 경옥이 고몬데 우리 경옥이가 선샘께서 부른다케가 왔심더"
순간 선생님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눈치시다.
금방이라도 이런 말이 선생님의 입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머 이런 기 다있노! 니가 학부형이라꼬? "

그래도 선생님 체면에 막말은 못하시고 키 150짜리 비린내나는
경옥의 고모를 아래위로 훓어보시다가는 하시는 말씀,

"마 됐심더(요것들을 기냥 콱 뽀사뿌까) 가 보이소!"

처음 신어본 뽀족구두로 인해 내 다리는 거의 << 자 모양새가
되어 이상한 걸음걸이를 하며 겨우 교무실을 빠져나오는데,
나를 향해 한 무더기의 애들이 승리의 환호와 함께 그 긴 복도가
끝날 때까지 배웅해줬고 나는 신발을 벗어 들고는 천천히
교정을 걸어 나왔다

"아싸, 내가 해냈어!"

그 애는 그후로부터 지금까지 더 깍듯이 나를 '고모'로 대우해주고 있다



작가 : 벼리 (대청 2003/01/26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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