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읍내에 나가 자취를 했다.
그리고 주말엔 일주일치 김치와 밑반찬을 가지러 집으로
왔다.
누나와 형님들은 결혼을 하였거나 돈벌러 객지로 떠나고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인 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읍내의 남자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 여자는 읍내의
여고를 다녔는데 그 여자도 주말엔 늘 시골집으로 왔다.
그 여자네 집은 우리 동네에서 산모퉁이 하나를 돌아 읍내가는
방향에 있다.
토요일 저녁이면,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사랑채에서 일찌감치 주무시고 읍내에서
돌아온 하얀 피부의 그 여자가 우리집에 놀러오면 어머니는
슬며시 일어나 이웃으로 마실을 나가셨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그 여자와 나는 거의 말이 없었다.
방문을 조금 열어 놓고 그저 서로 말없이 TV를 보다가 그녀가
"나 그만 갈께!" 하고 일어서면 나도 같이 일어나
그 여자의 집까지 바래다 주곤 했었다.
그 여자네 가는 시골의 밤길은 늘 한적했다. 논가엔
개구리가 울고 밭에는 하얀 감자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산에서 소쩍새가 울면 웬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고 부엉이가
울면 무서웠는지 그 여자는 내게 바짝 붙어 걸었다.
그럴 때 그 여자의 앞 가슴이 내 어깨에 스치기라도 하면
나는 그 짜릿함에 마른침을 삼키기도 했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가엔 늘 수많은 꽃들이 피고 졌다.
제비꽃이 피고, 할미꽃이 피고, 진달래가 피고, 찔레꽃이 피고,
아카시아꽃이 피고, 밤꽃이 피고, 싸리꽃이 피고 지었다.
그 길은
아버지들이 소달구지 몰고 읍내에 장보러 가던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은
내 형님 누이들이 돈 벌러 밤 도망을 쳤던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은
어머니들이 객지로 떠난 자식들을 눈물로 기다리던 길이다.
내가 그 여자를 바래다 주던 첫 사랑의 길, 바로 그 꽃길이다.
그 때 내가 바래다 준 그 여자는
허리를 조여맨 하얀 윗도리 교복을 입은 여고 2학년 이었다.
그해 유월 막 장마철이 시작될 무렵의 토요일 오후
나는 여느 때처럼 왼손엔 빈 프라스틱 김치통을 싸맨
보자기를 들고 집에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갔다.
그 여자도 저편에서 한손에 보자기를 들고 나타나서
나를 보더니 씨익하고 쑥스런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땐 김치통을 들고 다니는 게 제일 창피했다.
그 여자가 나보다 먼저 버스에서 내리면서 오늘 저녁에도
우리집에 가겠노라는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그날 저녁 바쁜 들일에 지치신 아버지와 어버니는 일찌감치
사랑방에서 주무시고 그 여자와 난 말없이 TV에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 지붕에서 우당탕탕 큰 소리가 들렸다.
그땐 대부분의 농촌에선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집을 함석지붕
으로 개량 했는데 비올 때면 그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그 여자가 돌아갈 밤 열 시가 되어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며 우린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있었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키스하는 장면등 그 당시엔
미성년자 관람 불가 정도의 영화 같았다.
이상한 장면에선 쑥스러움에 TV에서 눈을 떼고 딴 곳을
쳐다보곤 하였다.
영화가 다 끝나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아마 그날이 첫 장마비가 시작되는 날이었을 게다.
우린 어쩔수 없이 일어나 겨우 헌 우산 한 개를 찾아 같이
쓰고 그 여자네 집을 향해 나섰다.
영화에서의 야릇한 감흥을 가슴에 남긴 채..
그 여자가 후레쉬를 들었고 난 한 손엔 우산 그리고 다른 손은
그 여자 어깨에 올렸으나 그 헌 우산은 성인이 다 된 우리 둘을
세찬 장마비로부터 막아주지 못했다.
옷은 점점 젖어오고 그 여자의 추워서 흔드는 어깨 떨림이
내 가슴에 따뜻함으로 전해왔고 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뛰는 가슴을 들킬까봐 그 여자의 어깨 등뒤에서 내 몸을
떼고 싶었지만 그 여자가 추울까봐서 그럴수가 없었다.
갑자기 입 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 넘기고
싶었으나 침 넘기는 소리를 들킬까봐 삼킬 수도 없었다.
침은 점점 입안 가득히 차 오르는데 뱉을 수도 없었다.
그 여자가 기분 나빠할까봐서..
참으로 난감했다. 할 수 없이 젖은 소매자락으로 입 안에
고인 침을 슬며시 훔쳐내기 시작했다.
난 야릇한 감정이 입 안에 그렇게나 많은 침을 고이게 하는 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후에 이발소에서 예쁜 면도사 아가씨가 면도해 줄 때
가끔 침이 고일 때도 있었지만ㅎㅎㅎ...)
난 또 이미 빳빳해진 내 신체의 한 부분이 그 여자의
히프에 닿지 않도록 불편한 걸음을 걸어야만 했다.
이십여 분을 걸어 그 여자의 집 앞에 왔을 때는 이미 옷이 거의
다 젖어 있었고, 그 여자의 젖은 몸이 그 집 앞 가로등에
어렴풋이 비쳤을 때 난 그만 호흡이 멎는 줄 알았다.
나는 이상해져버린 내 감정과 커져버린 신체 일부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잘 자란 말도 못하고 얼른 뒤돌아서서 걸어나왔다.
마을을 벗어나도 이상해진 나의 몸과 감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나는 여자네 동네 입구의 정자나무 뒤에 숨어 혼자 바지를 내렸다.
부르르 떨림과 거친숨..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고 바지를 올렸다.
괜시리 혼자 부끄럼에 우산을 접어들고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해 추석이 돌아왔다.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돈 벌러
서울로 올라갔던 경숙이 등 시골친구들이 내려왔다.
우린 방안에 남녀 둘씩 넷이 둘러 앉아 손목맞기 화투를 쳤다.
손목을 때리기 위해 처음으로 그 여자의 하얀 손을 잡아봤다.
그 여자의 손은 너무 부드러웠고 손 떨림이 내게 전해졌다.
그 여자는 유난히 하얀 피부에 살결이 약해서 나중에 보니
맞은 자국이 하도 선명해 오랫동안 내 맘이 아팠다.
고 삼이 되자 입시공부를 하느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나지
못했다.
그때 우리집에 불행이 닥쳤다. 큰 형님 회사 부도와 형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겐 겨우 논 여나무 마지기만 남겨졌다.
난 아버지의 뜻대로 진학을 포기하고 시골의 면서기 시험을
치뤘고 그 여자는 도시의 대학에 입학했다.
발령은 쉽게 나지도 않았지만 난 왠지 시골의 공무원이 싫어서
아버지 몰래 군에 지원해 입대를 하였다.
서울 근교의 부대에 배치를 받았고 어느 뜨거운 여름날 주말
그 여자가 부대로 면회를 왔고 난 외박을 얻었다.
버스를 타고 서오능으로 갔다. 능 뒤 오솔길을 따라 산 속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태양과 남의 시선을 막아줄 떡깔나무 아래
에 손수건을 펴고 나란히 앉았다.
한참 말이 없다 어설픈 첫 키스를 시도했다. 그리고 난
그 여자의 앞 단추 두 개를 풀었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크게
뛰었는지 모른다.(지금도 뛰네 ㅎㅎㅎ)
그러다 갑자기 그 여자가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깜짝 놀란 나는 왜 우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다. 난 지금도
그녀가 왜 울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날 밤 녹번동의 한 여관을 잡았다.
난 끈질기게 시도를 했고 그 여자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뒤 몇 번의 면회가 있었고 다음 해인 것 같다.
면회 온 그 여자의 머리가 생머리에서 파마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이내 그 여자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다. 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거의 밥을 못 먹으며 가슴앓이를 했다. 차츰
그녀를 잊어 갔지만 그 여자를 잊는데 여러 해가 걸렸다.
2년 전 시골 초등학교 첫 동창회에 그녀가 나왔다.
피부는 여전히 하얗고 고왔다.
난 그 여자에게 "잘 사니?"하고 딱 한마디만 물었고 다른 여자
동창들에겐 짖궂은 농담도 많이했다. 그 여자도 "응"하고
딱 한마디 대답뿐이였다.
지금 그 여자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다. 친구들을 통해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도 있다.
그녀는 어떨지 모르지만 한 번 만나 사랑을 나누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관두리라. 다시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