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말과 논리적인 말의 차이



'아름다운 말'과 '논리적인 말'의 차이를 생각해 봅니다.
"무엇을 가지고", "무엇에 대해서", "어쩌자고" 라는
세 구절을 가지고 더욱 나누어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육체에 의해', '육체를 위해서' 삽니다.
'삶'이라는 것은 존재의 문제이고 존재한다는 것은 또한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생명의 근원은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전개과정으로 보고 싶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힘이 들게 마련인가 봅니다.
삶이 힘이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을까요.

우리는 정신을 가지고 정신에 의해, 정신을 위해서 삽니다.
'앎'이라는 것을 존재 위에 다져지는 정신 작용이라고 보았을 때,
존재는 곧 나와 나 아닌 것과의 인지 작용의 연속이라고 말을 합니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정보, 지식, 판단, 결정, 행동들이 서로 얽히면서
우리는 육체에 의해서 정신을 다독거립니다.

결국 삶이 힘이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삶에서 앎에 대한 욕구가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삶과 앎은 출발점이 같은 단어가 아닙니까.
우리의 삶, 그 삶은 바로 앎의 습득이고
앎의 습득을 통해서 삶은 확장되는 것이고
소망이 달성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더불어 삶의 존재는 부수적인 쾌감을 얻고….
그러나 우리는 인지의 과정을 너머 초인지의 과정으로
교감을 하고 싶습니다. 하고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요,
삶은 '서로의 당신'에 대한 앎의 지속적 투자를 통해
더욱 성숙되고 즐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름다운 말이란 아름다운 의식의 바탕 위에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일 때 아름다운 것이 되지 않는가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말이 논리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감각적이고 직관적일 때,
그러나 더욱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아름다움에 녹아 논리를 잃고,
또 논리에 얽매여 아름다운 사연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여운이 없어 싫습니다. 실수가 없어 싫습니다.
살짝 핥기는 눈매가 없어 심심합니다.
뒷걸음치는 묘미가 없어 맹숭맹숭합니다.
쫄깃한 사람, 쉽게 입술로 잘려나가는 그런 면발보다는
연달아 이어지는 질긴 면발처럼 입안 가득 품은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왜 사냐곤?
웃지요
라고 답을 한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시구처럼
그저 웃음으로 앞뒤의 삶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논리로 때론 현재적 아름다움을 추스르고
아름다운 말로 논리적인 푸석거림을 질척하게 만들면서
그렇게 예쁜 송편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뼈가 있는 말은 뒤돌아서 들리지 않게 하고
살이 있는 말만 앞에서 들리게 하렵니다.
보이지 않는 뼈의 든든한 버팀목이 세월을 지탱하고
눈에 선한 살의 아느작거림은 시간을 벗기면서
'아름'으로 '다움'을 가져봅니다.

소리에 소리가 묻어 소리가 서로 얼싸안습니다.
눈물은 순수의 솜털로 익어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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