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뒷산 고개를 넘어간다. 마른 풀들이 발길에 스치며 발 밑을 스멀스멀 기어오는 안개를 타고 음수골의 샘터로 간다. 안개 덮인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가 구름을 타고 노는 신선 같은 기분이다.
산골의 봄은 늦다. 며칠 전만 해도 밤이면 서리가 갈가마귀 발톱처럼 막 움트기 시작하는 새싹 끝을 움켜잡고 얼리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안타깝게 하더니, 오늘 아침은 맑고 영롱한 이슬만 맺혔다. 지난 겨울 녹차 끓일 물을 긷느라 눈 속을 헤치며 부지런히 넘나들었다. 그 샘물로 끓인 녹차 맛은 정말 일품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그 골짜기에는 온갖 짐승들이 살고 있다. 눈이 하얗게 내릴 때면 밤새 내려와 물을 마시고 간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한 번은 내가 샘터로 들어가는 순간, 놀란 노루 한 마리가 입구 뒤로 난 빽빽한 가시덤불을 헤치고 튀어나갔다.
사람과 짐승이 함께 마시는 샘터에 늦게 온 나의 기척에 놀라서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니 노루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우거진 가시덤불을 헤치고 달아나느라 상처라도 입지 않았는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이튿날 낮에 낫과 괭이를 가지고 와서 뒤쪽의 가시나무를 쳐내어 좁은 길을 내고 조그만 계단을 만들어주었다. 멀리서 내 소리가 들리면 상처를 입지 않고 도망 갈 수 있도록 제법 길답게 만들었다. 그 후, 눈 덮인 그 길로 난 노루와 토끼들의 발자국을 보며 나 혼자 흐뭇해하면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빈 산을 향해 손을 흔드니, 산에서 그 동물 친구들이 꼭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이 산골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오늘 아침 안개를 타고 음수골 샘터로 가는 길은 겨우내 잠자고 있던 내 내면의 촉수들을 고요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다. 파란 소나무 사이사이로 힘겹게 서 있던 관목들의 가녀린 가지엔 연노랑 봉오리들이 조롱조롱 달렸다. 별들이 멀어져간 추운 겨울밤에도 결코 푸른 꿈을 멈추지 않고 새 봄이 오면 자연이 허락한 아름다운 몸짓으로 제 몫을 다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가만히 바라보니 톡톡 터지면서도 말이 없다. 그저 조용히 그리고 멈추지 않고 무언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장자가 아침 산보를 친구와 함께 나갔다. 상쾌한 공기 수려한 경치가 너무나 좋아서 친구가 장자에게 말을 던졌다. "이보게 친구, 아침 공기가 너무나 상쾌하지?" 장자는 말이 없다. "아, 저기 피어있는 꽃들 좀 봐. 정말 멋지군" 장자는 말없이 천천히 걷기만 한다. 머쓱해진 친구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자연에 감탄하며 장자의 동의를 구하느라 바빴지만, 장자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걷기만 했다. 집에 돌아온 친구는 내심 괘씸한 생각이 들어 장자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이 사람아.. 자네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는가? 아침 산보를 같이 갔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이에 장자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자네가 보고 나도 보고 있는데 말해서 무엇하랴!"
샘터가 가까워오니 개울물 소리가 청아하다. 아래 쪽 웅덩이에는 내 어릴 적에 낯익은 버들치가 신나게 헤엄친다. 그 놈들은 참 복 받은 녀석들이다. 다른 데 태어났으면 추운 겨울 날 얼음장 밑에서 떨면서 지냈을 터인데 샘물이 사철 상온을 유지하는 덕으로 겨울에도 훈훈하게 지내니 말이다. 그런데 그 버들치들은 내 어린 시절 조그맣고 하얀 고무신 속에 잡혀 있던 바로 그 녀석들이다. 홍안의 소년이 이제 장년이 되어 찾아왔는데도 그 녀석들은 하나도 변한 게 없으니 내가 꿈을 꾸는지 그 녀석들이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
물 한 통을 받아서 지고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장자의 무언의 참 뜻을 알 것 같지만, 나는 왠지 혼자 걷는 것이 쓸쓸한 생각이 든다. 산에는 노루 토끼들이 나를 보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말을 할 줄 아는 누군가가 같이 걸으며 이 새벽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 감탄과 찬사를 주고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먼 옛날 장자가 느끼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도 느끼지만, 난 아직 장자가 보여주는 도의 바다에는 발가락 끝도 담그지 못 하였나보다. 왠지 사람이 시끌한 대화가 그리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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