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저녁에 오랜만에 찾아오신 반가운 이들이 있었다. 남자 나이 55세, 여자 나이 52세의 부부인데 한참 후배인 우리 내외가 멋지게(?) 사는 것 같아 마음에 드니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는 제안이다. 흔쾌히 동의하곤 모처럼 모 호텔의 13층 전망 좋은 일식 집에 자리하여 담소하는데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어 조심스러워진다.
이틀에 걸쳐 두 사람이 함께 다니면서 이혼서류를 챙겨 법원에 갖다 주고 오는 길이라 한다. 나름의 학식과 경륜을 겸비한 부부이건만 딱히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 이혼문제를 맘 편하게 상의 겸 하소연 할 수가 없음을 토로한다.
잠시 우리 부부는 혼란에 빠져 난감하였다. 아주 다정한 부부로 기억되고, 지금도 곧 이혼 할 사이라곤 전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서로 바라보는 눈빛조차 사랑스럽다. 우린 약속이나 한 듯이 두 사람을 편하게 대하였다. 세상 경험이 모자라기도 하지만 자칫 미묘한 부부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하다간 좋은 자리의 분위기마저 어색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상의보다는 하소연을 하기 위한 자리라 생각되기에 되도록 두 사람의 얘기를 많이 들으며 경청하였다. 간간이 부부간에 얽힌 추억담을 서로 나누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전혀 애정이 식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이혼을 결심하고 진행하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결혼 30년 차라는 그 분들은 사랑하기에 이혼한다며 이구동성이다. 어느 소설이나 영화제목 같은 그 소리에 바짝 당겨드니 절절한 내용이 다음과 같다. 서로의 대화체로 꾸며 보았다.
부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편의 장단점을 모두 알아요. 급한 성질에 숨 넘어 가듯 막말을 해 대는 것 때문에 속도 많이 상했지만 그것도 견딜만했고 그 외에는 사람 좋아하고 솔직한 면이 맘에 들어요.
남편: 난 바람을 피우고도 저 사람에게 이실직고하고선 잘 해결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거짓말은 못해요.
나: 남자들은 화나면 절제치 못하는 막말 때문에 결국엔 여자에게 지게 되지요. 대신 성질 급한 사람들은 뒤끝이 없는 장점도 있잖아요?
솔직하다는 말에 남자 분이 오버하는 것 같아 거들면서 화제를 이어갔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부인의 한숨소리가 깊더니 못 마신다는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 말을 이어간다.
부인: 그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왔는데 내 스스로 그만큼 남편에게 해 줄 수가 없음을 알고 더 늦기 전에 자유로이 해 드리고 싶어 결정한 거예요. 저인 아양떨며 상냥한 여인을 많이 바라는데 전 그게 안 되거든요.
남편: 큰일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처리하며 오히려 누님 같은 든든함은 좋은데 여자의 가장 기본인 애교가 없으니...
부인: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저와는 다른 그런 여인을 찾아보세요. 저도 활달했던 당신이 우울해 하는 걸 보면 많이 속상해요. 제가 딴 생각으로 가려는 것도 아니고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위하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당신도 잘 아시잖아요.
남편: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러기에 속박되지 않는 당신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나 또한 이혼에 동의를 한 거 아니겠어?
또 다시 잠시의 침묵이 흐른다. 사랑하기에 이혼한다는 논리가 어디 있느냐며 이해가 안 간다는 아내의 항의에 두 사람은 빙긋이 웃기만 한다. 부부 사이란 타인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베일에 쌓여있는 일들이 많다지만 여타 더 많은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곰곰 생각하니 나로서는 두 사람의 결정에 대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대개의 경우 이혼하려는 사람들은 서로의 악감정으로 표독스러워지며 원수보다도 더한 모습을 보이는데 반해 여느 다정다감한 연인처럼 애정을 보이며 자연스레 이혼의 길로 들어서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과 헤어져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술 마신 조수가 감히 기사님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물어보았다.
“당신 언젠가 내 사랑에 겨워 이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 유효한가? 난 다시 태어나도 당신한테 장가든다는 얘기는 없던 걸로 했는데.”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운전만 하던 그녀를 집에 도착하여 달래기까지는 진실 어린 변명으로 한참을 애먹었다. 분명히 지금도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데 오늘 생각하니, 그건 당신에게 죄악 같아 더 좋은 남자를 만나라는 배려라고 솔직하게 말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