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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행(1) -동화 글/느낌표




여행은 언제나 설렘과 기대로 시작된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만나 새로운
체험을 하거나 가슴이 넓어지는 기회가 된다.
여행이라 하여 꼭 집을 떠나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집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여행도 있다. 나는 그를 일러
‘독서 여행’이라 부른다.


책 속에는 신기한 볼거리가 있는가 하면, 때로 달콤한 맛도 있고,
가슴을 적시는 감동도 있다. 그래서 나는 ‘독서 여행’을 즐긴다.
내가 가까이 에서 곁에 두고 자주 꺼내보는 책을 세 권쯤 고르라면
‘진홍가슴새’ ‘무소유’ ‘세상을 보는 지혜’를 고르겠다.


‘진홍가슴새’는 열 두 편의 동화 모음집이다.
동화는 맑고 따뜻한 영혼이 담긴 책이다. 아이들을 위한 설교조나
교훈조의 이야기라고 하찮게 여기지만 사실 동화는 마음의 고향으로
우리를 안내해 준다. 순진무구함 속에는 어떤 글에서도 찾을 수 없는
환상의 세계가 있고, 불가능한 한계에 도전한 의기가 감추어져 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열고 하늘땅을 비롯하여 짐승과 꽃나무, 풀 포기까지 만든
다음 그들에게 낱낱이 이름을 붙여 주셨을 때의 이야기야.
온종일 작업을 하시던 하느님은 어둑어둑해질 무렵 잿빛 깔의 새 한 마리를 만들어 내셨지.


“네 이름은 진홍가슴새야.” 하느님은 그 새에게 말씀하셨어.
난 한 장의 빨간 날개 털조차 없는데 어째서 저를 진홍가슴새라 부르시는지요?”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하지만 네 마음가짐 하나로 너는 빨간 날개 털을 정말로 받을 수도 있지.”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많은 새알에서 아기 새들이 태어났지.
진홍가슴새는 여전히 잿빛의 새에 지나지 않았고.
그 동안 새들은 진홍빛 날개 털을 지니고 싶어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보았지.
가슴이 활활 타도록 깊이 사랑을 했었어. 사랑의 불길로 날개 털이 빨갛게 물이 들지 모른다고.

‘온종일 노래하고 또 해서 가슴이 부풀어올랐을 때, 이 뜨거움이 날개 털을 붉게 물들여 주지 않았을까’
다른 새들과 겨루어 힘을 키워도 봤지.
‘끓는 투지로 날개 털이 빨갛게 물이 들 거야.’
그랬지만 우리 새들의 노력은 실패였어.


어느 날, 잿빛 새들의 둥지가 있는 언덕 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어.
예루살렘 성문이 열리고 말을 탄 무사와 병졸들, 사형집행인과 재판관, 울부짖는 여인들,
그리고 재미있어하며 따라오는 구경꾼들.


“이게 무슨 일이람. 나쁜 사람 셋이 십자가에 못 박히러 끌려가고 있네.
어쩜, 인간은 저렇게 잔인할까, 십자가에 못박고도 무엇이 부족해서 그 중 한 사람의 머리에 가시관까지
씌웠구나. 이마에 가시가 박혀 피가 흘러내리고 있네. 그런데 저 분은 나쁜 사람 같진 않아.
아, 저분이 괴로워하니 내가 못 박힌 것같이 가슴이 아파 오는 걸.”


잿빛 깔의 작은 새는 가시관을 쓴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람의 이마에서 핏방울이 잇따라 흐르는
것을 보았지.
“나는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새지만 괴로워하는 저분을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작은 새는 용기를 내어 가시관을 쓴 그 사람의 이마에 박힌 가시 하나를 주둥이로 뽑았지.
그때 그분의 피 한 방울이 새의 가슴에 떨어졌어. 핏방울은 곧 번져서 짧고 부드러운 날개 털을
빨갛게 물들였지. 그러자 십자가의 그분은 입술을 움직여 속삭였어.
“너는 조상이 세상 첫날부터 애써 구하던 것을 너는 그 친절한 맘씨 하나로 얻었구나.”
“가슴이 빨개요. 들장미 꽃잎보다 더 빨개요!”


아무리 멱감아도 가슴의 진홍빛은 지워지지 않았어.
아기 새들 모두 그들의 가슴에 핏빛과 같은 진홍 날개 털이 빛나기 시작했어.
지금까지도 그 빛깔은 가슴에서 빛나고 있는 거야.




독서여행(2)


법정스님과는 오랜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20년 전부터 샘터라는 작은 책에 스님의 고정칼럼을 읽으며,
그 담백한 맛에 빠지게 되었다.
그 뒤 스님의 단행본들은 물론 얼마 전 스님의 산상모습이 방영된
일요스페설까지 빠짐없이 보고 있다.


스님은 인간이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어내지 못하게 될 때 닥쳐 올
재앙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과잉소비와 포식사회가 오늘과 같은
온갖 질병과 환경위기를 불러들인 것으로 삶의 원천을 망각한 우리
인간들의 탐욕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커다란 생명체인 이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잃으면 자연 속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인간을 깔볼지 모른다. 우리가 어머니인 대지에 소속되려면
먼저 그 대지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돌아가 그 품에 안길 대지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새벽에 눈을 뜨면 맨 먼저 개울물 소리가 귀에 들려오고, 산토끼와 노루를 벗삼으며 밤하늘의 영롱한
별빛과 대화를 나누는 오두막에서 버리는 삶을 실천하고 계시는 법정스님. 진리는 미로 찾기가 아니라
단순함을 강조한다. 삶은 맑고 향기로운 삶이기를 원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순간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저마다 자신이 선택해야 할 삶의 과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 각자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독창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단 하나 뿐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답게 사는 일이 긴요하다.
개체의 삶은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삶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그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다.


좋은 글을 읽은 날은 그 여운이 오래간다. 세상을 살맛 나게 한다.
잠자는 의식을 깨우기도 하고, 무딘 감정을 되살리게도 한다. 법정스님의 글은 한 번 읽고 말글이 아니다.
맛을 음미하듯 조금씩 두고두고 읽어도 새롭다. 스님이 단행본으로 펴 낸 책들도 거의 내 책장에
꽂혀있다.


절이나 교회에 종교가 있다고 잘못 알지 말아라.
어떤 종교든지 일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면 종교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그 때 그 종교는 더 이상 신이나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독선과 아집에 대한 변명이 되어 버린다.


종교의 틀 속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의식이나 상징을 종교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은, 부처와 진리는 이런 곳에 없다.


진정한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있다.
밖에 있는 스승은 다만 우리 내면의 스승을 만나도록 그 길을 가르쳐 줄뿐이다.
받아들이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어 있으면 놓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말수가 적어야 한다. 말은 생각을 어지럽힌다.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은 글들이 어디 이 뿐이랴.



독서여행(3)



빌타자르 그라시안의 ‘세상을 보는 지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서이다. 인생의 지혜에 대한 교훈은 일상생활에도
적용되어야 할 내용이다. 따라서 이 교훈서에서 많은 일상적인
일들을 발견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의 경구들은 대가적인 풍부한 정신력, 사고력, 위트,
서슴지 않는 패러독스로 번쩍이며 신랄한 재치, 빛나는 언어,
통찰에서 우러나온 인간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바로 우리가 삶을 성찰하기 위해서,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개선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교훈 등이다.
‘세상을 보는 지혜’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바보가 마지막에 하는 일을 현명한 자는 처음에 한다. 둘 다 같은 일을 하지만
때가 다르다. 전자가 좋지 않은 때에 하는 것을 후자는 제때에 할뿐이다.
일단 이성이 한번 뒤틀린 사람은 매번 일을 바꿔한다.
왼쪽 일을 오른쪽 일로 만들고, 아울러 매사에 좌익으로 쏠린다.


내면을 들여다 보라. 대부분은 사물은 그 외양과 내면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서 외양, 껍질만 꿰뚫어 보다가 내면에 이르면 착각은 사라진다.
착각은 피상적인 것,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은 피상적인 것을 빨리 받아들인다.
그러나 참되고 옳은 것은 깊이 물러서서 자신을 숨긴다.


점잔빼지 마라. 재능이 많을수록 잰 체하지 마라. 이는 비열하고 볼품없다. 치레는 하는
사람에게는 괴롭고 보는 사람에게는 역겹다. 신경을 써서 치레하는 것은 고문 같은 일이다.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이 마치 우리의 천성에서 나온 완벽함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그 안에 들인 노고를 감춘다.


생각하라.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일을. 모든 우둔한 자들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파멸한다.


그들은 결코 사물 속에 있는 본질의 절반도 보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의
노력은 미미해서 자신에게 오는 피해나 이로운 점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큰 가치를 두고, 중요한 일은 경시하는 등 항상 거꾸로 생각한다.


영리한 자는 매사에 대해 차이를 두고 생각해 본다.
귀한 것을 발견할 전망이 있으면 더욱 더 몰두하여 깊이 파고 들어간다.
때로는 거기에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의 숙고를 통해 처음에 감지한 것을 나중에 파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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